> 칼럼
‘천방선생’에 관한 몇 이야기(1)예강칼럼(126) /박형상/변호사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8.07  10:18:2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1) “선생(先生)”칭호 - ‘천방先生’ 호칭으로 보아 “존재선생이 ‘천방선생’을 무척 존경했을 것”이란 주장도 있는데, ‘先生’ 호칭은 극존칭도 되지만, 학덕 있는 선학이나 선비, 과거 급제자에게도 붙는 일반적 존칭도 된다. ‘영천 신잠’의 <관산록>에 나온 ‘연곡先生, 연곡子’를 두고 “연곡先生을 ‘신잠’이 지극히 존숭했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관산록>에는 ‘귤정 윤구’를 ‘윤子’, ‘인보 정만종’을 ‘정子’로 불렀을 정도다. ‘만수재 이민기’는 ‘기봉 백先生’이라 했고, 후대에 ‘소석선생, 오헌선생’ 호칭도 나오니, ‘천방先生’ 호칭에 민감하지는 말자. <정묘지>는 ‘천방선생’을 ‘鄕(향)선생/ 향당사종(鄕黨師宗)’이라 지칭했다.

2) 학맥과 제자들 - 후손 후학들은 ‘율곡(1536~1584) 문인’을 강조하지만, 선생은 먼저 ‘남명 조식(1501~1572)’을 배웠고, 남명 타계 이후 1577,1578년경에 해주시절의 ‘율곡’을 일시 찾아갔다. 학문적 노선변경이 아닌, 당신의 학문적 지평의 확장일 것. ‘옥봉 백광훈(1537~1583)’과 진사시 동방인 ‘율곡’은 ‘천방’과 같은 1584년에 먼저 타계하였다. <정묘지>는 ‘남명 조선생’을 기재했을 뿐, ‘율곡문인’ 사정은 미기록했다. 당대시점은 기축옥사(1589) 발생 이전으로 천방선생은 당색(黨色)초월한 산당(山堂)처사였을 뿐이고, 제자들을 ‘율곡 노선’으로 몰아 키우지는 아니했을 것. 제자 ‘반곡 정경달(1542
~1602)’과 그 아들 정명열은 ‘동인’ 쪽이었다. ‘정경달’을 ‘수제자’로 보는 의견도 있으나, 그는 소과낙방 후 서울 외지로 나가 과시에 진력하여 1570년 대과급제자로 출사한 입장이니, 연배가 앞선 ‘청계 위덕의(1540~1612)’가 수제자였을지 모르겠다. (정경달은 스스로 ‘삼석(三席)’이란 표현도 했다) 1573년 생원입격 위덕의는 은퇴 후에 제자교육에 나섰으며, 훗날 ‘죽천사’ 주벽으로 모셔졌다. 한편 ‘정경달이 극진히 모셨던, 인근의 평생처사 ‘송정 김경추(1520~1612)’는 ‘송천 양응정(1519~1581)’의 제자인데, 그 유문(遺文)에 ‘천방선생’은 등장하지 않았다.

3) 천방선생은 “장흥 고문학 시조”인가? - 장흥 일각에서 사용하는 ‘고문학 시조’ 표현은 합당한가? 그 고문학(古文學) 개념의 시간적 내용적 범주는 어떠한가? 아마 장흥 학맥의 자생적(自生的) 태동을 강조하는 발상일 것으로 짐작되나, 그 출생은 늦으나 몰년은 앞서며 문집을 남긴, ‘기봉 백광홍(1522~1556)’도 있다. 1699년경 <신증여지승람 수정판> 준비 중에 ‘장흥지방 대표선비’를 선정함에 있어 후보 3인(백광홍, 정경달, 김삼달)의 인물지열(人物之列) 논란이 있었는데,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백광홍, 김삼달, 정경달’ 순서를 언급하였다. 무장현감 관력의 영암김씨 김삼달은 ‘천방선생’과 ‘1534년 소과동년’이고, 1543년 대과에 1546년 문과중시 급제자이다.

4) “영천 신잠”과 관계는 어떠했을까? - ‘천방선생(1502~1584)’은 ‘영천 신잠(1491~1554)’을 모신 ‘신잠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서로 전혀 인연이 없다면 그런 일은 부자연스러울 것. ‘신잠’의 <관산록>에 ‘유호인’은 없지만, 그 시절 연배로 ‘신잠’의 제자였던 ‘남계 김윤(1506~1571)’은 반곡 정경달의 고모부로, 그 아들 대과급제자 ‘지천 김공희’는 반곡의 고종사촌 형이다. 원래 ‘천방’은 ‘부동방 건산’ 출신이고, <정묘지>에 현 장흥읍에 속한 ‘부동방’ 인물로 등장한다. ‘건산처사’ 별호도 있었으니, ‘국당 임희중(1492~)’의 방문詩에 “暮宿(모숙) 건산처사劉(유)”로 나왔다. 장흥부 치소에 가까운 ‘건산’에서 1570년경에 ‘용계방 연하동’으로 이거했으니, ‘영천 신잠’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있겠다, ‘천방’은 1534년 소과 입격자이고, ‘영천 신잠’은 1537년 해배로 장흥을 떠났다.

5) <천방유집>의 “시(詩) 백수’를 누가 수습하였는가? - 어떤 劉씨후손이 1816년경에 남긴 언급, “그 문인 위백규가 주워 모았으며, 단지 詩백여수를 수집했다.”는 것에 터 잡아 “존재가 그 유고수습에 관여했다”는 주장이 일부에서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아니다. ‘정경달’은 <천방행록(1599)/천방행장(1600)>에서 “선생유고를 보관하다가 그나마 詩 백수를 지켰다”고 말했고, ‘위백규’도 劉씨후손들이 가져왔을 유고에 있는 ‘소시(梳詩)’에 관한 <소시변(辨)>에서 ”정경달이 삼석(三席)에서 스승의 詩 백수를 수습했다“고 전언했다. 한편 “경학(經學)분야 유고(遺稿)를 누가 수습했는지”도 문제되는데, 당시 劉씨후손들이 검토를 부탁했을 ‘유고’에 대한 추기(追記)로 <書(서)천방유선생일고(逸稿)후 /일고후서(逸稿後?)>를 1777년에 남겼을 뿐이니, 그 <일고(逸稿)후서>의 기재 범위를 벗어난 유고 행방은 존재도 모를 일. 1798년에 존재선생이 타계했던 반면에, <천방선생유집>의 ‘목판본 소판’은 1811년경에, ‘목판본 대판’은 1819년경 간행으로 짐작된다. ‘천방선생 묘갈명(1924)’은 한참 이후에 등장했다.

6) 존재선생이 그 목판도 2점을 그렸는가? - 그럼에도 “천방선생을 존재선생이 흠모한 나머지 <천방유고>를 적극 수습했고, ‘목판원도 2점’을 직접 그렸는데, 천방후손들이 불민(不敏)하여 목판에 그만 ‘평(評)’으로 오기했지만, 존재선생이 직접 ‘작,화,제(作,畵,題)’ 했음에 틀림없다. 존재선생이 ‘연하동’을 직접 방문했다.”는 일부 주장이 있다. 살펴본다. 1798년경 존재 타계시점 보다 한참 늦은 <1819년 목판본>에 새겨진 ‘評’ 자체도 얼른 믿기지 않지만, 어쨌거나 목판에 새겨진 ‘評’을 일응 수긍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 목판도는 회화적 의미와 거리가 있는 <서당위치도(略圖), 족보산도(山圖)> 수준에 불과하다. 존재 시점이면 ‘연하동 서당’은 이미 오래 전에 없어졌고, 단지 ‘폐허지’였을 뿐이다. ‘評’이라야 주관적 논평 관점이 아니며, 그저 ‘운(云)’을 전하는 단문에 불과하다. 요컨대, ‘위백규 유고수습說’을 일방적으로 과장한 것 말고는 ‘존재선생의 작화(作畵)설’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사정은 일절 찾을 수 없다. (계속)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여백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톱기사
여백
중요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