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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잠사, 예양사, 오현사, 예양서원’(1)예강칼럼(123)/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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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7.10  10: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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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은 ‘1612년 예양서원’ 건원을 전제하여 다섯 선현을 소개한다. 그러나 어떤 명칭이 다름은 그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 1612년 이후에도 <동국여지지,1656>에 ‘신잠祠’,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예양祠/영천사우’, <정묘지,1747>에 ‘오현祠’ 명칭이 있었다. 그럼에도 오로지 ‘예양서원’으로 존재했을 것인가? 그런 명칭 차이에 어떤 곡절은 없는가? 그간에는 ‘사우(祠宇) 사당(祠堂)’과 ‘서원(書院)’을 분별하지 아니한 채, ‘예양祠’를 ‘예양書院’으로 간주하여 ‘1612년 예양서원’ 건원(建院)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사정은 다르다, ‘신실(神室) 사당’에 ‘학당 강당(講堂)’이 함께 갖추어져야 (대개는 ‘전학후묘(前學後廟)’ 형태이다) ‘書院’이 가능하다. 선현을 모시되, ‘교육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에 ‘예양祠’ 명칭은 ‘사당’에 한정된 반면에, ‘예양書院’ 요건은 ‘사당 + 학당’을 요구하는 것이니, ‘祠, 사우’를 바로 ‘서원’으로 옮겨서는 아니 된다. 돌이켜, ‘예양서원’에 앞서 ‘신잠사(申潛祠)’가 있었다. 장흥유배객 ‘영천 申잠(1491~1554)’이 향촌교육에 기여한 은덕을 기리는 ‘사당’이었다. ‘신잠祠’를 아예 부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동국여지지,1656>에도 ‘사묘(祠廟) 신잠祠’였다. (신숙주의 증손자 ‘申잠’은 17년 유배기록 <관산록>을 남겼고, 나중에 태인현감 시절에 ‘생(生)사당(1549)’이 생겨날 정도로 학덕이 있었으며, 장흥제자로 ‘김희련, 김윤, 임분, 백광홍’ 등을 이끌었다.) <천방선생문집>에도 ‘예양祠(신잠主享,천방配享) 건사(建祠)‘로 나왔다. 1644년에 장흥으로 유배된 심동구(1594~1660)를 따라온 아들 심유(1620~1688)는 ‘영천사우(靈川祠宇)’를 목격한 詩를 남겼다.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그 詩에 ‘예양祠 /영천祠宇’를 말했고, “예양지사(汭陽之祠) 초이(初以)영천주향(主享), 천방이배(以配)”라 했다. ‘연곡院(1689)’이라 했어도 ‘예양院’이라 부르지 않았다. ‘계서 백진항(1760~1818)’은 “예양서원은 원래 ‘申영천 타령지소(妥靈之所)’에서 시작했다”고 전했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처사 양공(梁公)행장>에서 “청금 위정훈(1578~ 1662)이 ‘申영천선생 사우(祠宇)’를 기(旣)창건”이라 했다. 모두들 ‘영천 申잠을 모신 祠宇, 사당’을 ‘신잠祠, 예양祠’로 지칭했다. ‘신잠祠(영천祠宇)’를 부정하는 쪽은 <제암집>에 실린 <천방 유호인(1502~1584) 행장>에 의지하여 ‘1612년 예양書院’ 건원을 단정해 버린다. 그러나 ‘예양書院’ 체제를 갖추어 출발했다면, 앞 사례들에서 ‘신잠祠/영천祠宇/예양祠/申영천 타령지소/오현祠’로 지칭되었을 것인가? 그런데 <제암집, 천방행장(1624)>을 다시 살펴보면, “적거선현(謫居先賢) 申영천 위종(爲宗), 천방 병향지계의(幷享之計議), 칭이(稱以) 사우당(祠宇堂), 춘추향사(享祀)”라 했다. 단지 ‘祠宇堂’일뿐, ‘예양書院’이라 칭하지도 아니했다. (그 ‘祠宇堂’이 ‘신잠祠’일 가능성은 남는다) 짐작컨대, 장차 書院을 도모하되, 우선은 ‘신잠祠’에 ‘영천主享, 천방配享’으로 시작했던 것이고, 달리 ‘학당’ 교육시설 등은 정비하지 못한 것이리라. 이제 ‘신잠祠/예양祠’가 ‘오현祠’로 변모하는 모습을 본다. 처음엔 ‘신잠祠’였고, ‘영천(主享),천방(配享)’을 함께 모신 ‘예양祠’로도 통칭되었다, 그러다 ‘월봉 김광원(1478~ 1550)’을 추배하는 ‘삼현祠’ 개편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1642년도 생원 ‘이취당 조덕길’에 부촉한, 병향(幷享) 발론이 여의치 못한데서 ‘우산 안방준(1573~ 1654)’이 관여했다한다. ‘남포 김만영(1624~1671)의 <남교일기>에도 언급된다. ‘안방준’의 발론을 부정하는 의견도 있으나, <은봉선생전서 연보>에 ‘월봉 추배’에 관련한 <찬(撰) 예양祠 축문>이 있다. 그러다가 “기왕에 ‘추강 남효온’을 수향(首享)하자”고 ‘이민기’가 ‘사현祠’를 주창(主唱)하였고, 이에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추강선생 봉안문>을 받고, 그 기회에 ‘목은 이색’을 더 추배하면서, 1681년경 ‘5인 합벽, 오현사(五賢祠)’에 이르렀다. 五賢 순서는 “이색,남효온,신잠,김광원,유호인”으로 정해졌다. 그 사정을 당대에 목격한, ‘만수재 이민기(1646~1704)’는 “예양之祠/初以영천主享천방爲配/其後우산(牛山)발론 월봉竝享(병향)於영천/ 鄕議(향의)之立異(입이) 蓋自此始(개자차시)/而又其後목은추강爲首享(수향)/而自영천以下三선생乃爲東西配位”라 기록했다.
‘월봉 추배’에 ‘향론 이견(異見)’이 있었다는 것. 여하튼 강학기능을 못 갖춘, ‘祠, 祠堂’ 수준에 머물렀기에 <정묘지,1747>가 ‘오현祠’로 지칭했을 것. ‘방호 김희조(1680~1752)’가 詩 <예양講堂 유음(有吟)>에서 “유사(遺祠)에 남은 오현風”을 읊으며 “창아충(愴我衷)” 비애감을 토로함은, 그때도 그 운영이 여의치 못했던 것 같다. 예양서원 기록은 여러모로 부실하다. 당대의 書院記文과 시문, 강안원규등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사액서원도 아니었다. 아마 ‘목은, 추강, 영천’ 3賢이 ‘지역 선현’이 아닌, ‘실세(失勢)한 가문의 외지인’이다 보니, 기본 동력이 미미했을 것. ‘월봉 추배위계’에 관한 향론(鄕論) 갈등이 있었으며, ‘관산위씨,인천이씨/남평문씨’등 지역토반은 ‘연곡서원/강성서원’에 치중되었으니, ‘강릉유씨, 영광김씨’만으론 한계가 있었을 것. ‘존재 위백규’도 ‘예양서원’에 어떤 언급을 하지 않았고, 다만 <사마재 제명록> 개수(改修)를 위한 방문(1789)을 했을 뿐이다. 1683년경 화재를 당한 ‘향교 사마재’는 ‘오현祠’에 합쳐졌다했다. 1851년 8월경에 폭우 산사태로 ‘서원’의 붕괴사고도 있었다. ‘서원훼철령’ 대상에는 해당하였으며, 1869년엔 ‘예양서원 유허비’도 세워졌다. <장흥도호부읍지,1868>엔 ‘예양祠‘로 기록되고, 1871년에 ’사마재‘ 재산분쟁이 있었다. 다시 1927년에 ’강당‘ 신축이 되고, 1944년 갑자년에 ‘예양서원’ 편액이 새로 걸렸다. 1975년에 神室 ‘숭현묘’가 신축되었다. 그렇다면 ‘오현祠/ 예양書院’의 역사적 문화적 의의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 것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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