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웅부(雄府)였던, 장흥府 영역은 어떠했을까? 고려 중기에 장흥府 승격, 조선초(1413년)에 장흥도호府 승격을 거치면서 ‘최대 속현6’을 관장하였다. 서쪽으로 ‘탐진현’은 고려청자 전성기 무렵 1149년경부터 장흥 관할이었고, 동쪽으로는 ‘현 고흥에 소속된, 두원, 도양’도 그 관할에 속하였다. 그와 같은 6속현 체제에서 먼저 ‘탐진현’이 조선 개국과 더불어 창군된 ‘강진’에 1417년경 넘겨졌고, 다시 ‘두원, 도양’이 세종 때 ‘흥양’으로 이속되었다. 조선 내내 장흥 땅이던 ‘웅치,회령,천포’ 3방(坊)은 1914년경에 보성군에 이속되었다. 돌이켜 장흥府는 “현 강진군 일부 + 장흥군역 + 현 보성군 일부 + 현 고흥군 일부”에 걸치는 광역 雄府였다. ‘정안’을 본부(本府)로 하여 시작된 장흥은 <세종실록지리지,1454>에서 ‘수녕, 회녕, 장택, 두원, 도양’등 5속현을 거느렸다. ‘장흥府 茶所13’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거명되어 있는데, <신증>에는 그 방향과 거리가 표기되어 있다. 한편 <세종지리지>에 나온, ‘장흥 6향(鄕) - 도내산, 유치, 얀양, 어산, 아서, 加乙田’ 중에 ‘가을전(加乙田)향’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 장흥 6鄕이 <신증>에서 5鄕으로 줄어들 때, <신증, 대동지지(1865)/보성군>에 이른바 뇌원차 산지라는 ‘갈평’이 없는 반면에 <신증, 대동지지/ 흥양현>에 ‘가을(갈)평鄕- 남양’이 따로 기록되고 있다. 장흥과 그 인접지에 있던 茶所와 茶산지에 대해서는 장흥府 기록의 역사적 관할에 유념하여 전후 내력을 파악해야 할 것.

- 이하, ‘장흥府 13茶所’를 살펴본다. 일부 보성사람은 “장흥府 13다소는 아예 없다”거나 “茶所로 ‘향여所, 가을평所’만 해당하고 나머지는 ‘금소, 와소, 자기소, 사기소, 도기소’ 등에 불과하다”는 출처 불명의 주장을 한다. 장흥 관내의 야생차밭(茶田) 현황과 ‘웅치,회령,천포’ 3방(坊)이 1914년경 보성에 이속된 역사적 사정에 무지한 데서 비롯된 속견일 것. 심지어 장흥의 ‘자기소, 사기소’를 따로 구별하는 수준이다. ‘장흥 13다소’를 살펴본다. 장흥에는 아직도 야생차밭이 꽤 현존하며, 부근에 ‘사찰’이 있던 공통점이 있는바, 茶所를 ‘사찰 다공소(茶貢所)’라는 제다설비 시스템으로 파악한다면, 정치적 성격의 ‘鄕, 所’와도 능히 병립 가능할 것. ‘기록에 표시된 거리’는 ‘茶所 위치’를 말해주는 것인데, 현재의 茶田 위치 현황으로 ‘옛 茶所 위치’를 역(逆)추적함은 퍽 어려울 것.

1) 요량(요량)所/南35里 - ‘관산읍 방촌 부근’으로 비정. 야생차밭이 ‘방촌 다산(茶山), 지정리 일대(10.7ha)’와 ‘천관산록, 장천재 일대(8.6ha)’에 있고, ‘호동古寺,소산古寺/ 천관寺,탑산寺’가 있었다. <이하, 2019년경 통계자료 인용>
2) 정화(丁火)所/東5里 - ‘장흥읍 평화리’로 비정, ‘魏유형’ 묘소가 있는 다전등(茶田嶝)에 야생차밭 일부 현존. 정화사(淨化寺)가 구전되며, <정묘지,1747>에 ‘고적(古跡) 정화所’로 기록된 반면에, 봉수대는 東7리 억불산에서 조선시대 내내 가동되었으니, ‘茶所 정화소’와 ‘봉수대 봉화소’는 서로 구별될 일.
3) 수태(守太)所/東10里 - ‘안양방 수양리’ 수대폭포 쪽, 억불산 은경암 아래로 추정. 또한 ‘안양 기산’에도 야생차밭(0.7ha)이 남아있다.
4) 정산(井山)所/東10里 - ‘안양방 지역’, 위치 불명, 위3)항 설명 참조
5) 웅점(熊店)所/東15里 - 현 보성 ‘웅치면 중산(약산)’ 일대로 추정. 보성측은 ‘金所 웅점소’를 주장하면서, 또한 <신증, 대동지지/보성>에 나온 ‘南20리- 적촌鄕(추촌鄕), 포곡所’를 ‘이른바 茶所 갈평’에 등치시키려 하지만, <신증/장흥>의 ‘東15리- 웅점소’와 그 위치 방향이 크게 상이하며, 더구나 <신증, 대동지지/보성>에는 ‘갈(가을)평’ 자체가 없다.
6) 칠백유(七百乳)所/東20里 - 위치 불명, ‘片茶/ 백유’를 의미할지 모르겠다. 보성측은 ‘장흥 칠백유소’를 ‘자기소’로 우겨대나, <세종실록지리지/ 장흥>에 는 ‘자기소, 소아곡리’가 따로 나와 있다.
7) 가을평(加乙坪)所/東31里 - 현 ‘보성 회천’ 관내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그 연원은 ‘고흥(흥양) 두원- 가을평鄕’일 수 있다. <대동지지/장흥>에도 ‘東30리, 갈평’이 있으나, <신증, 대동지지/보성>에는 ‘갈(가을)평’ 자체가 없었다.
-특히 ‘‘北20리, 4곳 茶所’는 집중거점 설비일 수 있다. <세종지리지/신증> 등에 표시된 거리 ‘北20리’에는 마침 ‘가지산, 용두산’이 있었다. ‘보림寺(가지산/유치 봉덕,용문/35.8ha)’와 ‘금장寺(용두산/부산 관한,금자/12.7ha)’, ‘해원寺(백림사/장흥읍 행원/28ha)’, ‘금강寺(장동 거개,용곡)’등에 딸린 ‘사찰 다공(茶貢)소’에서 ‘장흥부 北20리 일대의 茶田’을 취급했을 것으로 추정. (‘가지산’은 후대기록 <대동지지>에서는 ‘북40리’로 나온다)
8) 운고(雲膏)所/北20里 - 위치불명, ‘부산면 기동’說에는 부동의.
9) 향여(香餘)所/北20里 -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 남쪽 일대로 추정.
10)창거(昌居)所/北20里 - <정묘지 용계방, 古跡>에 기록된 ‘姜상서(尙書)基’에 이어진 ‘창개시(創開是)基’로 추정하는 일부 견해(李경기)도 있다. ‘부산면 기동’說에는 부동의. 보성이 주장하는 ‘와소(瓦所)’說은 너무 터무니없다.
11)거개(居開)所/北20里 - ‘장동면 거개’로 추정. 배후에 ‘금강寺’가 있고, 용곡일대 및 제암산록에 야생차밭이 있다. 장흥府 기록에 나온 ‘자기所, 所兒谷’ 지역에 ‘茶所 거개소’가 병존하여도 서로 간에 하등 이상할 일은 아닐 것.
12)가좌(加左)所/北30里 - ‘유치면 조양’說에 부동의. <정묘지>에 ‘古跡 가좌소’로 나온 ‘古가좌현지’로 ‘현 장평 우산 부근’에 해당할 것.
13) 안칙곡(安則谷) - 위치불명. ‘부산면 내동 또는 기동’說이 있다. ‘행원’지역의 茶田에서 생산한 물량을 ‘茶所 안칙곡’에서 취급했을 수 있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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