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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큰 인물, 충렬 위계정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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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19  11:4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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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충렬(忠烈) 위계정(魏繼廷 5세 1038~1107) : 고려 제8대 현종(顯宗) 때 문하시랑 동평장사(門下侍郞 同平章事)를 지낸 위기로(魏耆老)의 차자이다. 문종(文宗) 때 문과 급제하여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등 6조를 모시면서 송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초안하는 등 문장으로써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동문선》에 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가 전한다. 특히 청렴 강직하여 청백리로서도 청사(靑史)에 빛나면서 숙종의 고굉 대신으로 예종이 즉위할 때 친히 옥새(玉璽)를 진배하는 등 관(官)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예종 4년 졸하자 충렬(忠烈)이라 증시(贈諡)하고 인종 때 예종묘정(睿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 제암산 자락이다. 매년 음 10월 9일 묘전에서 제향하고 장흥군 회주사(懷州祠)와 경기도 파주시 고려 통일대전에 배향되었다. 配는 소국부인(小國夫人) 황주황씨이며 처부(妻父) 즉 장인은 황주량(黃周亮, 황주人 ?~?)으로 1004년(甲辰 목종 7) 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한림원과 사관의 요직을 거쳐 세 차례 지공거(知貢擧 : 과거시험 책임관)를 맡았다. 수태보겸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 등 중요 관직을 역임하고 거란과의 전쟁 후 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실록」 36권을 편찬하였다. 타계하자 정종묘정(靖宗廟庭)에 배향되고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1.주요 역임 관직 등
1) 文宗
△좌보궐(左補厥) : 정6품
2) 宣宗
△어사중승(御使中丞) : 종4품(어사대 소속)
△지제고(知制誥) : 정4품(왕의 조서와 교서 작성)
△한림학사(翰林學士) : 정4품(文翰職)
△예부시랑(禮部侍郞) : 정4품(1087년 宋나라에 다녀옴)
 3) 肅宗
△예부상서(禮部尙書) : 정3품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 : 정3품
△이부성서(吏部尙書) : 정3품
△빈객(賓客) : 종2품
△소보(小保) : 종2품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 종2품(중추원)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주국(同中書門下平章事柱國) : 정2품(내문화성 및 중서문하성)
△참지정사(參知政事) : 종2품(문하성)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정2품
△개부이동삼사(開府吏同三司) : 종1품
△수사도판예부사(守司徒判禮部事) : 종1품 및 정1품(상서예부의 재신)
△판이부사(判吏部事) : 상서이부 으뜸벼슬 재상이 겸임
4) 睿宗
△태자태부(太子太傳) : 종2품(태자부)
△수태위 문하시중(守太尉 門下侍中) : 종1품(상서중서령 원로에게 주는 명예직)
△삼중대광(三重大匡) : 정1품
△검교태사(檢校太師) : 정1품
△수태보(守太保) : 정1품(3사 중 왕의 셋째 고문)
△지공거(知貢擧) : 관직의 최고명예직. 좌주(座主)
△상주국(上柱國) : 국가 공훈자에게 주는 첫째 등급의 훈직(정2품)

<예종 묘정 배향 인물>
고려사(高麗史) : 卷60-志 卷第14-禮
 -수태부 문하시중 충렬공 위계정(守太傅門下侍中 忠烈公 魏繼廷)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 정간공 유인저(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 貞簡公 柳仁著)
-수태사 문하시중영평백 문숙공 윤관(守太師門下侍中鈴平伯 文肅公 尹瓘)
-수태부 문하시중 문성공 김인존(守太傅門下侍中 文成公 金仁存)

2. 묘소, 묘각 하산재(霞山齋)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산 36-4번지 연하동 제암산 자락이다.

   
   
 

묘각 하산재(霞山齋)는 묘소 아래 연하동 저수지 주변에 위치했었다. 처음의 묘각 명칭은 충렬재(忠烈齋)로 모암재(帽巖齋) 위계철(31세 1840~1913)이 1910(庚戌)년 중수하였음이 장흥군 경술지(庚戌誌)에 확인되나 장흥위씨 대동보(大同譜)에는 기록이 없다. 1925(乙丑)년에 묘각 동편에 설단하고 시조 회주군(懷州君) 위경(魏鏡)과 고려 합문판사(閤門判事) 위충(14세 魏种)의 제사를 지내면서 묘각의 명칭은 지명을 따라 하산재(霞山齋)라 하였다.
 

   
 

1953(癸巳)년 도문중에서는 시설이 낡아 2차 중수하기로 결정하고 안양면 비동리 길씨 재각을 구입하여 옮겨지었다. 그 후 1971(辛亥)년 시설 보수공사를 하였고, 1975(乙卯)년 장흥읍 평화리에 하산사(霞山祠)를 신축하였다. 1989년까지 가을 제향에 사용하다가 시설이 낡아 누수 되고, 진입로가 협소하여 교통 불편 등으로 2001년 도문중 결정에 따라 타인에게 매매된 후 철거되어 아쉬움이 크다.

   
 

하산재의 흔적으로는 1962(壬寅)년 설주(雪舟) 송운회(1874~1965) 선생이 88세 노년에 쓴

   
 

하산재 액호 편액과 1971(辛亥)년 입추절 백당(栢堂) 위대환(33세 1907 ~1979)이 근지(謹識)한 하산재중건기(霞山齋重建記) 편액이 남아있다. 2점의 편액은 현재 장흥읍 평화리 회주사(懷州祠) 강당 백산재(栢山齋)에 소장되어 있다.

3. 신도비(神道碑)
2018년 8월 장흥위씨 도문회에서는 위계정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장흥군 장흥읍 외평길 168 회주사(懷州祠) 앞 도로변에 삼가 세웠다.
전액(篆額) : 三重大匡 檢校太師 守太保 門下侍中 開府儀同三司 判吏部事 上柱國 太子太傅 忠烈 長興 魏公繼廷 神道碑銘 幷序라 새겼다.
비양(碑陽) : 門下侍中 忠烈 長興 魏公繼廷 神道碑銘이라 새겼다.

   
 
   
 
   
 
   
 

<비문> 위씨는 문장과 절의를 긍지로 삼은 장흥의 망족望族이다. 이러한 문풍은 신라에서 시작되고 고려에서 현저하였으며 예종 때 문하시중을 지낸 휘諱 계정繼廷에 이르러 더욱 빛났다. 시조는 신라 선덕여왕의 청으로 당태종이 파견한 한림학사 위경魏鏡인데 서기 638년 동래하여 백성을 계도한 공으로 아찬에 이르고 고려 충선왕 때 회주군懷州君으로 추봉되었다. 회주는 장흥의 고호다. 이후 298년간 실계失系하여 여초의 시중 창주菖珠를 중조로 기일세起一世하였다. 2세는 문하승선과 감찰어사 달澾이요 3세는 중랑장으로 자금어대를 받은 원보原補이며 4세는 문하시랑동평장사를 역임한 기로耆老다. 5세 계정繼廷은 시호가 충렬忠烈이요 평장사의 차남으로 1038년 장흥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문종조에 문과 급제하여 예종에 이르기까지 6조에서 봉직하였다. 문종 때 좌보궐에 올랐고 선종 때는 지제고 어사중승 등의 요직을 맡아 왕을 간쟁諫爭하고 왕명을 집행하는 조서詔書와 국서國書를 작성하는 사신詞臣으로 일하였다. 숙종 때는 예부상서 한림학사 이부상서 빈객 소보 한림원사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 상주국 참지정사 문하시랑평장사 개부의동삼사 수사도판례부사 판이부사 등의 중책을 수행하였다. 예종 때에도 삼중대광 태자태부 수태위 문하시중 검교태사 지공거 수태보 등을 두루 거쳤다.
공의 생애는 나라와 백성을 위한 삶이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해동역사 海東繹史 등에 등재된 공의 행적을 보면 예부시랑 재임시인 선종 3년 음력 11월 15일 왕을 수행해 법왕사 팔관회 행사를 마치고 환궁하던 중 왕이 왕족들에게 장수를 축원하는 잔치를 베풀자고 하명하였다. 공은 호부상서 이자인李資仁과 함께 아뢰기를 “백성들은 가뭄으로 살기 어려운데 왕족들이 술을 마시며 노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주청해 중지하게 되었다. 어사중승 때는 선종의 애첩 만춘萬春이 자신의 집을 호화롭게 짓고 있었다. 공이 아뢰기를 “만춘이 전하를 기망하고, 백성들에게 괴로운 부역을 시켜 큰 사저를 신축하고 있으니 그것을 즉시 허물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주청하였다. 왕은 듣지 않았지만 질책하지도 않았다. 추밀승선 때 왕이 연등행사 후 연회에서 공에게 춤을 추라고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영인伶人이 있는데 어찌 신臣이 춤을 추겠습니까” 라며 거절하였다. 그러자 신료들이 놀라면서 춤을 추라고 권유했다. 공이 정색을 하면서 일찍이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시기를 “비록 전하의 말이라도 “예 예”만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고 하셨다”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때부터 불가상서不可尙書란 별호가 붙었다. 1087년 송나라에 박경작朴景綽과 함께 사행使行했을 때 공이 읊은 “천인채산경일기千仞綵山擎日起 일성천락루운래一聲天樂漏雲來 천 길의 채산이 해 받치고 솟아나자 즐거운 천상 음악 구름 속에서 울려오네” 라는 상원절 관등시가 송나라 정치가인 심괄沈括의 저서 보필담補筆談에 실려 전해온다. 두 번째 사행은 공이 예부시랑이던 1090년 음 7월 호부상서 이자의李資儀와 사은진봉사賜恩進奉使로 송나라에 갔다. 공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일행은 진귀품을 다량 구입해 왔지만 공은 빈손으로 오니 불가상서 不可尙書에다 청백리淸白吏라는 별호가 더해졌다. 공이 쓴 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는 해동의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요遼나라 도종의 생일을 축하하는 표문으로 동문선에 실려 있다. 1096년에 즉위한 숙종은 공의 학덕과 인품을 높이 보아 요직을 두루 내렸다. 1105년 숙종 10년 급환으로 왕위를 예종에게 양위하면서 문무백관을 불러놓고 후사를 당부하는 숙종 교서에 “재신宰臣 위계정 이하 문무백관에게 교서하노라.” 하였으니 공에 대한 지극한 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공은 예종의 즉위식 때 백관을 대표해서 옥새를 진배하였다. 예종은 즉위한 후 공에게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시중을 맡도록 하였으나 노환을 이유로 극구 사양하였다. 그럼에도 왕이 강권强勸함에 어쩔 수 없이 수락하였다. 시중을 맡은 지 반년 만에 건강을 지탱할 수 없자 체직을 주청하였다. 그래도 임금은 윤허하지 아니하고 류인저 한교여를 보내 개유開諭를 하고 차와 약을 보냈으며 200일 휴가를 주는 등 2년 동안 계속 은전을 베풀었다. 그러나 건강이 회복되지 않자 마침내 체직을 윤허하면서 삼사로 하여금 2분록을 주게 하였다. 공은 임금이 내린 은전도 사양하다가 1107년 타계하였다. 17대 인종은 공을 예종 묘정에 배향하라며 아래와 같은 교서를 내렸다. “삼중대광 검교태사 수태보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판이부사 상주국 위계정은 청검이 한 때를 드리웠고, 공의 덕행은 백관들이 중히 여기었으니 실로 이는 백성의 선각자다. 숙종의 고굉 대신으로 예종이 즉위할 때 친히 옥새玉璽를 진배하고 홍기鴻基를 힘써 도왔다. 선생을 배향함에 어진이를 공경함이 더욱 드러난지라 비록 죽었으나 살아있는 것 같아 충혼이 영세하리라. 충렬忠烈의 증시贈諡를 더하노라” 하였다. 한편 공은 고려 통일대전과 회주사에도 배향되었으며 묘는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 손룡갑원이다. 후손 중에는 원개元凱 문개文凱 형제가 장원급제함으로써 생가 뒷산을 장원봉이라 칭했다는 유래비由來碑가 있다. 원개는 불가에 귀의하여 송광사 6대 사주가 되었으며 입적 후 원감국사圓鑑國師 시호를 받았다.
국사는 시문에 밝아 동문선에 최치원 선생 다음으로 많은 문장이 실려 있다. 임란 호란 등 국란을 당하여 창의한 충의사 30위의 위패가 창평의 조선 오란 충혼탑朝鮮五亂忠魂塔에 새겨졌고 호조참의 창조昌祖는 어명으로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저술하였으며 실학자 백규伯珪는 90여권의 저서를 남겨 공의 드높은 충절과 문맥을 잇고 있다.
 2018년 장흥위씨 도문회 총회에서 후손 황량滉良이 문중의 숙원인 충렬공 신도비를 근수 헌성하겠다고 제의함에 이를 수용하면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정우禎佑 정철正哲 위원이 관련 자료를 정리 지참하고 불녕不佞에게 비명碑銘을 청하여 한사코 고사하다가 마침내 사양하지 못해 사실을 정리하고 이어 느낀 바를 명銘하노니 하늘이 점지한 정토淨土 회주향 위문 천세의 찬연한 햇살이어라 문종조에 등과하여 육조六朝의 초석을 닦아 놓으시고 문장이 빼어나 조서詔書와 국서國書를 찬하니 임금의 뜻 앞서 헤아려 군신간의 도리를 세우셨네 시문詩文은 신묘하여 송나라에까지 떨치고 하천안절표문賀天安節表文은 동문선에 실려 후세에 빛나네 임금님 말씀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면 불가함을 간쟁 諫爭하셨고 청빈함이 맑은 물 같아 청백리라 회자 되었네 숙종은 문무백관 중 으뜸 신하로 세워 후사를 당부하는 교서 내리시고 예종 즉위 때는 옥새를 공께서 직접 진배進排하셨네 즉위 후 문하시중을 제수했으나 노환을 들어 체직을 주청하고 임금은 불허하며 몇해 동안 붙든 손 놓지 못했으니 군신간의 애틋한 정이 얼마나 간절했던고 하오나 천명을 어찌할고 오호라 애통 하도다 고려 하늘 부려 놓고 훨훨 하늘 길 가셨네 인종은 부왕의 유지 받들어 예종 묘정 배향하고 충렬 시호 더 하였네 군신과 목민의 도를 아울러 세우신 공의 충절과 문맥이 천세에 빛났건만 왕조의 성쇠와 세월의 이끼로 이제는 그 큰 기둥 흔적조차 희미하더니 한 평생 회주 성지 땅 기운 지펴 온 지극한 한 후손 있어 사직 지신으로 숭앙 받는 선조의 빛난 행적을 새겨 여기 큰 비를 세우도다.
二○十八년 戊戌 八월 일
高麗大學校 十七代 總長 全州 李基秀 謹撰
聽溪公十一代孫 滉良 獻誠
長興魏氏 都門會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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