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잔재 청산은 국민 의식의 무장이 관건이다.
일제강점의 35년 역사는 우리 민족의 수난이며 흑역사로 치부하여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관과 곡절을 감당해야 하는 아픔이 있다. 해방 75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반일 항일 극일의 구호를 수없이 되풀이 하여 왔고 그런 다짐에 대한 성과를 따지기에는 아직도 미흡 할 수 밖에 없다.  풀리지 않는 앙금이 앞서는 나라 “가장 가깝고도 가장 먼 나라”인 일본과의 교류는 지구촌 시대의 우호와 선린을 감안하여 대승적으로 유지하여 왔지만 근간의 대한 수출규제와 아베 정권의 편향된 정치적 시각은 해석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필자는 지난 30여년간 한.일간의 문화, 축제 청소년 교류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를 혹은 주도하고 혹은 참여해 왔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사고방식 이를테면 ‘위안부와 강제 징용 징병’의 문제 ‘독도’의 문제에 대한 각론은 한국측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는 역사적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는 일본 지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견해는 개인적인 입장이었고  공식적으로는  ‘양국이 극복해야 할 역사’ 라는 모호한 입장으로 선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대한 필자의 예민한 반응에 언론사 간부 출신의 한 일본인 지식인이 이런 말을 하였다.
“대동아공영을 신봉하는 일부 국수적인 우익세력은 일본의 한반도 식민 시대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산업 등 제분야에서 근대화를 앞당기는데 공헌 하였다고 자평 합니다. 그들의 의식속에 잠재해 있는  ‘대한 우월감對韓 優越感’을 어느 한 순간에 설득 할 수 있겠습니까. 현재의 아베 정권 내각에 포진되어 있는 정치 세력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 할 수 있는 해답은 한국 국격의 상승과 경제와 산업의 우위 국민 의식의 무장이 관건이 아닐까요”

●전국적인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는 활동을 주문한다.
필자의 청소년 시절 우리 역사를 공부하는 가장 대표적인 교과서가 ‘이병도의 한국사’였고 신석호가 감수한 참고서였다. 필자와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들은 이병도와 신석호는 우리 역사학계의 가장 존경하는 석학이었다. 이 땅의 청소년들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주관한 ‘조선사 편수회’의 민족의 정체성을 유린한 35권의 조선사를 편찬 간행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친일분자였던 이병도와 신석호의 역사관을 수학하며 성장 하였던 것이다. 이들 친일 학자들은 해방 후에도 역사학계의 주역으로 승승장구하여 세상에 없는 명예와 권력과 명성을 누릴 수 있었다. 식민통치의 피해와 왜곡이 어찌 역사학 뿐이었겠는가. 돌이켜 보면 이승만 정권의 친일잔재청산의 민족적 염원을 외면한 우리의 역사는 현재에도 뼈아픈 진행형으로 성찰해야 할 사안이다.
한 일본 지식인의 고언처럼 대일본의 역사를 정립하는 관건은 국민의식의 무장이며 방법론으로는 ‘친일잔재 청산’일 것이다. 이 명료 하고도 확실한 방법을 75년동안 말과 글의 성찬만 나열했고 구체적인 행동은 미진했다. 일부 민간 단체에서 친일행적의 인명록을 편찬하는 과정도  폄훼와 방해 공작과 여론으로 얼마나 지난 하였던가.
이제 문림의향文林義鄕의 향맥이 정연한 우리 장흥군에서 ‘친일잔재 청산’의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시작이라 할 것이다.
일정으로는 1~3단계의 절차를 거쳐 수개월 동안의 시한으로  자료를 신고 받아 정리하고 섭렵하는 간단치 않은 활동이 전국적인 모범 사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친일잔재 청산”과 “일제잔재 청산”의 경계 설정에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친일잔재 청산’과 ‘일제잔재 청산’ 의 방법론은 많은 난제를 안고 있다.
장흥군이 조사 범위로 예시한 일제 강점기의 행정구역 명칭, 친일관련 기록물, 건축물, 도로명, 지명 변경사항, 문화유산 문화재 등을 전수 조사하여 친일잔재의 요소가 있다면 청산 하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작업일 것이다. 아시다시피 국가의 기관 지방정부의 행정조직 사법제도 치안 제도  조직의 용어와 명칭에는 수없이 많은 ‘일제잔재’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사회적 기반에도 예외는 없다. 토목 건설 현장의 용어는 일제의 잔재가 무수하게 혼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고찰해 보면 우리 장흥군의 ‘지명 변경사항’ 중 마을 명칭의 대다수가 고유의 문화가 베어있고 아름다운 유래가 내재된 이름들이 1914년 일제의 주도로 행해진 행정구역 개편 당시 편의적으로 이루어 졌다. 현재는 자연 마을 단위는 고유의 명칭이 혼용되지만 대부분의 행정 마을 명칭은 엄밀한 의미에서 ‘일제의 잔재’일 수 있다. 우리 지역의 사정적이며 경관이 빼어난 수자원인 ‘탐진강’의 명칭도 예외는 아니다. 기록을 살펴보면 1914년 이전의 우리 지역 강의 명칭은 지류인 예양강, 지천천, 금강천, 옴천천 등으로 호칭되었고 통칭하는 명칭은 전래하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탐진강은 일제의 의해서 공식화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상당수의 도로명도 이에 해당된다.
특히 ‘친일’이라는 용어에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언행과 활동이 수반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이 경우 대부분 ‘인격체’가 개입되어 있다. 소위 친일의 행적으로 민족의 지탄을 받거나 주목을 받았던 인격체인  우리 지역의 ‘친일인사’들은 기록도 존재도 종리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사례를 어느 범위에서 청산해야 하는가. ‘친일잔재’와 ‘일제잔재’의 범위를 어떤 경계에서 설정 운용해야 하는가. 친일잔재이든 일제잔재이든 엄격한 청산을 적용해야 하는 경우에는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될 수 있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가(문화재청)에서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문화재를 지방자치단체장이 청산할 수 있는가 등 고민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건축물 기록물 상징물 문화재 등도 완전 청산할 것인지 보존은 하되 안내판을 설치하여 성찰의 자료로 삼을 것인지 등의 무수한 판단이 요구되고 있다. 특히 형상이 있는 상징물이나 건축물 석비石碑 등은 보존 하되 그 역사적 유래와 일제 침략의 만행을 기술하는 안내판을 병행하여 반면교사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35년의 식민치하 그 굴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고 75년이 지난 세월동안 민족의 자긍심 회복 그 제도와 시기를 놓쳐 기관과 사회의 곳곳에 정착되어진 일제의 잔재를 장흥군이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그 기대와 더불어 청산의 대상을 설정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이 치열한 연구와 토론과 전문성이 수반 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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