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흥사람들의 고향 사랑은 남다른 애틋함이 내재되어 있다.
2020년 장흥 군정의 쾌거는 단연 “대한체육회 체육인교육센터”의 장흥 유치일 것이다. 전액 국비가 투입되는 전국 최초의 ‘체육인교육센터’의 장흥 유치는 대내외적으로 장흥을 선양하고  군정의 도약에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흥군민에게 모처럼의 희소식이었던 ‘체육인교육센터’의 유치 그 과정동안 장흥군청의 집행부를 비롯하여 관계 공직자들의 많은 노고가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한편으로 주목 받았던 것은 ‘체육인교육센터’의 유치에 재경 향우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일조 하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다. 고향의 큰 사업에 영향력 있는 서울의 향우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동원 하여 ‘체육인교육쎈터’의 유치에 물심양면으로 기여를 하였다. 그 행간의 언행은 순수한 애향의 마음이었고 개인적인 이해와는 상관이 없는 순수한 ‘고향 사랑’의 발로였다.
‘장흥사람들’로 지칭되는 그래서 비껴갈 수 없는 동질감으로 연대되는 ‘향우’들은 떠나 살던 지키고 살던 우리 모두의 고향인 장흥의 크고 작은 일에 이렇듯 한 마음이 되는 것이다.
순천시에서 사업에 성공 하여 활동 하는 회진면 덕산리 출신의 황의병 회장도 장흥사람임을 잊지 않는 대표적인 인사일 것이다.

● 마지막 교인을 자처하는 덕도 출신의 천도교인
“시천지조화정 侍天地造化定 영세불망만사지 永世不忘萬事知 
자기금지원위대장 至氣今知願爲大降”
1935년생 금년들어 86세의 연세임에도 정정하고 당당한 언행의 황의병 회장은 천도교의 주문呪文인 시천주경을 거침없이 외웠다. 그 뿐 아니었다. 1992년에 필사로 간행된 ‘덕산향토지’에 수록된 덕호가를 거의 낭랑하다 싶게 부르시었다.

 “1. 피가 끓는 이십세기 덕호 청년아
깨어라 어서 깨라 작야춘몽을
  (후렴) 이 지경이 당한 것이 절통 하거든 힘을 모아 일을 하자 개척 시키자
2. 금수강산 삼천리는 뉘의 땅이며 삼천여만 백의민은 뉘의 자손인가”

이 대목을 부르시는 황의병회장의 표정은 70여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회진면 덕도의 개화와 민족정기가 투철했던 향맥과 덕산리 천도교인들의 기개가 의연하게 엿보이고 있었다.
황의병 회장은 ‘덕호가’는 일제강점기 김재계 선생과 함께 부른 노래라면서 곡조를 잊지 않고 취재진 앞에서 우렁차게 ‘덕호가’를 부르면서 옛날을 회상하였다.(德豪歌-한자漢子 명칭은 필자가 유추하였음, 덕도德島의 ‘德’자 호걸의’豪’자를 빌려, 덕도 청년들의 큰 기개를 표현하며 일제 강점기의 시대적 상황을 극복하자는 노랫말이 아닌가 정의하였음)
덕호가! 이 노래를 누가 작사 작곡 하였으며 어느 때부터 불리었는지 상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근대 장흥의 개화를 주도 하였던 덕도의 역사성이 담긴 노래이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산 세월이 70여년을 지났음에도 소년 시절 함께 불렀던 노랫말과 곡을 잊지 않고 부르는 그이는 천상 장흥의 향인이었다.

회진에는 등대가 3개 있었고 한때는 김 생산량이 전국에서 제일 많았고 반일감정도 높아 박찬봉씨가 아들을 일본 명치대학에 보냈는데 아들이 일본여자를 데리고 오자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도창욱 교장선생님 제사를 지금도 명덕초등학교에서 모시고 있다. 한승원 병원 형제와의 우정과 정모씨와의 첫사랑 사연도 잊지 않는 옛이야기는 황 회장님의 추억 속으로 이어졌다.
“우리 덕도가 말이시, 장흥에서는 젤로 끄트머리 섬이지만 아매도 장흥 전지역에서도 개화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고 민족정신이 월등 햇제. 그란디 이놈의 왜놈들을 이길라먼 배워야 쓴다고 해서 교육열도 젤로 앞 섯을 것이시. 우리 덕도 양영학교는 100년이 넘었을 것이여. 그것이 다 천도교 믿음 때문이었네. 거그 덕산리에도 교당이 있었쓴께. 우리 부모님도 열렬한 천도교인이었네. 우리 엄니는 막둥이 여동생을 들쳐 업고 거그 덕도에서 영산포까지 걸어 가셔서 기차를 타고 서울 교당의 천일기념회(天日紀念會)에 참석하신 분이었응께. 거그다가 우리 조모님이 여걸이신 분이었어. 웬만한 남정네들은 호령 한 마다로 휘어 잡았씅께. 조모님이랑 부모님이 밥상 앞에 앉으면 감사 기도를 드렸는디...“하늘님과 스승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렇게 열 번을 외우고 숟가락을 들었어. 그런 조모님, 아부지, 엄니가 키워서 자란 내가 천도교인이 아니면 쓰것는가. 요새는 한 집 건너 교회 댕기고 한 집 옆에서 절에 다니제 마는 나는 어디고 갈 생각이 없어.
우리 자식들이야 어짤지 모르지만 나는 끝까지 천도교인 인께. 70여년의 도시 생활에서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의 말씀은 정이 간다.

● 15세 소년의 출향, 구억사(九億社)의 창업
황의병 회장은 1935년 회진면 덕산리683번지에서 태어났다. 5남4녀 9남매중 아들로는 셋째여서 위로 두분의 형님이 계셨다. 선대부터 천도교인이었던 집안의 가세는 넉넉지 않았다.
무엇보다 9남매나 되는 형제들이 의식주를 해결하기에는 시대적 상황도 지역의 형편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일찍이 출향 하였다.

“내가 열다섯살이 되던 1950년 12월이었는디... 그날은 유독히 추웠는디. 눈보라까지 몰아치고 징한 날씨에 덕산에서 걸어서 산정가서 하룻밤을 자고 보성 득량에서 기차를 탓는디.. 참 서럽고 외롭대. 순천에는 마을 사람 연고와 소개로 철물점에 점원으로 취직을 했는디. 그때야 월급이라고 제대로 받았겄는가. 재워주고 세끼 해결하고 용돈이나 받았을 것이시. 그렇게 철물점에서 10년을 일을 했어. 철물점 일을 하다 본께는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보이드라마시. 1960년대 그 쯤에는 순천에도 자동차가 늘어 나드라마시.. 아~ 앞으로는 자동차 관련 일이 많아 지겠구나.....”
 

▲삼립공업사/순천시 팔마로175번지

철물점 점원으로 익힌 경제동향을 밑천으로 하여 10년만에 독립을 하였다.
자동차부품 판매 사업을 시작했다. 상호를 구억사(九億社)로 정하였다. 황의병 회장은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고 9남매의 형제가 각기 1억원 정도의 자산이 있으면 불편하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9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명명한 상호였다.
황의병 회장의 예상은 적중하였다. 자동차는 교통의 중심이 되었고 부품판매와 정비업은 호황을 누렸다. 자동차 부품 판매 사업이 기반을 갖추자 자동차 정비와 건설기계 정비를 주업으로 하는 삼립공업사를 창업 하였다. 삼립공업사는 순천시 팔마로175번지 2,000여평의 대지이고 창업 당시에는 외곽이었다. 삼립공업사는 현재 휴업을 하고 있지만 순천 지역뿐만이 아니라 전남 남부 지역에서는 가장 크고 기술력이 월등한 정비업체로 성업을 하였다. 창업 당시에는 큰 액수인  9억원의 자산을 모으겠다는 목표였지만 회사 관계자의 평가로는 수십여배의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라고 귀띔 하였다. 15세의 소년이 출향하여 70여년을 오로지 한 업종에 종사하여 구억사(九億社)의 목표를 훌쩍 넘어선 성공을 거둔 황의병 회장은 시간을 내어 친구들과 골프를 즐기고 향우들과 고향 이야기를 나누며 일상을 향유하며 지낸다.

● 회진면 덕도 출신의 재순천 향우, 황의병회장의 고향 사랑
황의병회장의 고향 사랑은 남다르다. 재순천 장흥향우회의 2대 회장을 역임하였고 고문직을 맡아 향우회의 모임에는 거르지 않고 참석 하여 고향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향우들의 동향에 손을 내밀고 말을 보태며 교류 하는 것을 좋아 한다. 그래서 삼립공업사의 2층 회장실은 향우들의 사랑방이었으며 휴업중인 지금도 1층에 사랑방을 마련하여 매일 찾아오는 향우들과 어울린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하재. 사람이 어떤 형편으로 살든지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고 이야기 나누며 사는 것이 젤로 마음이 편하대. 신문이나 방송에서 ‘장흥’ 그라면 귀가 번뜩 열리고 눈이 간단 말이시”

황의병회장은 아무리 사소한 고향의 소식이라도 들으면 그저 반갑다고 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일화를 들려주었다. 50년 되었을까 장흥에서 “보림문화제”라는 군민 축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와락 반가웠다. 그래서 아는 이는 없었지만 장흥군청을 찾아가서 내무과장을 하는 이를 만나 보림문화제 성공에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성금을 기탁 하였다. 당시로는 꽤 거금이었지만 아깝지 않았다. 40년 전에는 고향의 친지에게서 우연한 이야기를 들었다. 유치면에서 수형(樹形)이 좋은 동백나무를 군청 청사 앞에 옮겨 심어야 하는데 인력으로는 방법이 없고 장비가 없어 이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삼립공업사에는 광주 전남에서 두 번째로 도입한 일제(日製) 미쓰비시사의 대형 렉카를 보유하고 있었다. 황의병 회장은 공장장에게 지시하여 직접 장흥에 가서 동백나무 이식을 도와주라고 하였다. 동백나무를 무사히 이식 하였지만 나중에 들으니 고사하였다고 하여 아쉬웠다고 하였다.

순천시에서의 사업이 성공을 거두자 자연스럽게 사회 활동과 봉사도 병행이 되었다.
민주평통순천시협의회회장을 최장기간 역임 하였고 순천정원박람회조성추진위원회부위원장, 순천시체육회상임부회장, 전남정구연맹회장 직을 역임 하였다. 이렇듯 사회적 활동의 반경이 넓어지고 다양한 사업과 행사를 주최ㆍ주관하는 경우에 장흥을 경유하거나 답사하는 일정을 포함하여 장흥의 인문지리와 문화적 자원, 경관과 명소를 소개하고 선양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황의병 회장은 당신이 느낀 아쉬움을 이렇게 표현 하였다.

“사람이 말이시, 고향에 뭣이든지 도움을 주고 싶고 챙기고 싶은 것은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여. 그라재마는 오고 가는 말은 정이 있어야 쓰것대. 내가 별것은 아니재마는 손을 거들었는디.. 장흥군의 누구도 인사가 없드란 말이시.. 대덕 학교에 장학금도 보내고, 보림문화제 성공하기를 바라고 그라먼 문화제를 어느 날 개최 합니다. 놀러 오셔서 즐겨 주십시오. 그런 연락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매도 반갑고 좋아서 버스 대절해서 갔을 것이시.. 그래서 나는 물축제도 안 좋아하네. 물축제가 시대적으로는 성공하는 케이스지만 그보다는 보림문화제가 더 크게 개최 되어서 고향을 떠나 사는 장흥사람들이 1년에 한번은 모여서 정을 나누고 고향 발전의 이야기를 모아보는 그런 축제가 되었으면 원이 없겠어”.

필자가 황의병회장을 취재하는 날에도 휴업중인 삼림공업사 1층 사랑방에는 장흥의 향우들이 7~8분 모여 있었다. 향우들은 장흥의 소식들을 훤하게 듣고들 있었다. 근자에 장흥군에서 발신되는 크고 작은 일들에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고 아쉬운 사안들을 지적 하였다.
“그라고 칠거리를 도시재생사업으로 발전시킨다는데 칠거리 한마당시장으로 검토하여 칠거리 발전방안 적극 추진했으면 하네. 전국에서 장흥읍 7거리는 자랑거리도 될 수 있다네” 라고 고향의 발전 방향 의견을 주셨다.

경향 각지에서 경제, 사회, 문화, 언론, 공직 등 처처에서 성공적인 생업을 영위 하고 있는 ‘장흥인’들이야 말로 우리 장흥군의 자산이 아닐까. 체육인 교육센터 유치와  미래 에너지 수소연료전지발전소 건립의 과정에 기여 하였던 향우들의 성원이 대표적이듯이 순천의 원로 향우 황의병회장의 정연한 고향 사랑의 열정 또한 우리가 오래 기억해야 할 자산일 것 같았다.
   (취재정리/주필 김석중, 대담 백광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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