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자금헌성기념탑
1936년 전후 덕도의 주민들이 독립을 염원하여 헌성한 독립자금 교부인들의 명단과 은동장을 교부받은 사실을 알리는 기념탑.
2006년 덕도의 주민들이 참여 하고 고김제현님이 주동 하여 자신의 사유지인 덕도 신덕리 동구에 건립하였다.

●●● 코로나19 감염의 사태를 극복하는 장흥군민의 역사 의식이 돋보인다.
코로나19 감염의 사태로 온 나라가 경직된 삶을 감당하고 있다. 전 국민이 감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한 예방 수칙과 사회적 물리적 거리 두기 수행을 일상에서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지구촌에서 모범된 코로나 방역 국가로 인정 받고 있다. 이 과정의 불편함을 국민적인 단결로 지켜 내는 한국인의 국난 극복의 자세는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렇듯 어려운 시기에 항일 독립 투쟁의 역사를 조명하여 시대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는 장흥군의 정책과 군민의 호응은 다른 어느때 보다 명료한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국내외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국내 최초로 안중근의사의 기제사를 봉행하는 ‘해동사’ 건립의 의의를 민족적 자긍심으로 승화 하고자 2020년을 ‘해동사 참배의 해’로 지정한 그 의의는 코로나19의 사태로 역동성을 발휘하고 있지 않지만 오래 기억되어야 할 사안일 것이다.
더불어 장흥문화원의 역점 사업인 “장흥군 항일 의병사”발굴은 그동안 묻혀있던 장흥인들의 항일 투쟁 지사와 열사들의 행적과 기록을 확인하여 2019년에는 13명의 독립운동 지사들의 후손이 대통령 표창을 받는 성과로 이어졌다. 이 사업은 향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그동안 묻혀지고 잊혀졌던 장흥인들의 애국 지사들과 항일 독립 지사들의 행적이 조명되어 군민 모두가 존경하고 공유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근대 장흥의 개화를 앞당긴 회진면 덕도德島(명덕明德) 역사 이야기
덕도는 회진항과 연계된 섬(島嶼)이었다. 덕산리, 장산리, 대리, 신상리, 신덕리 5개 마을이 덕도라고 불리었으며 또 다른 섬인 노력리까지 포함되어 그 지역을 덕도 혹은 명덕이라고 지칭 하였다. 지리적으로는 장흥의 남단이며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1964년 연륙이 되기까지는 주민들의 일상 생활이 많은 제약을 받는 오지奧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리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덕도 주민들의 역사 의식은 장흥군 전역에서 가장 진취적이고 개성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으며 특히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근대사의 변환기에는  민족성이 투철하고 일찍이 개화를 수용한 선진 의식을 보여 주었다.
그 중에서도 덕도 주민들의 개화의식과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회진면 근대 교육의 시원은 장덕長德 신학술강습회가 그 효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09년 김재계 선생께서 5월에  신상리에 장흥교구사범 198호 강습소를 개원하여  이어서 연정리蓮亭  연지리蓮池에도 설립 수백명의 청년 자제들에게 신문화를 교육 하였다.
그 후 천도교가 주축이 되어 시작한 신학술강습회는 덕도사립양영학교로부터 출발 하였다. 1921년 천도교리 강습회장을 지낸 바 있는 김병후 명의로 인가를 신청하여  당시 조선총독부 전라남도 지사로부터 인가를 얻었고 매년 갱신하여 1924년까지 운영 되었다. 그러나 총독부에서는 천도교 교인들의 주축이 되어 민족 정신을 구현하는 강의를 빌미 삼아 인가를 보류 하였다.
덕도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0년 덕도 신상리 천도교 교회당에서 덕도 간이 학교를 개설하여 그해 4월 19명의 학생을 모집 하여 개교 하였다. 이 학교가 명덕초등학교의 전신인바 덕도의 신식 교육의 시초는  111년의 놀라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민족 종교인 천도교의 교리와 민족 자정의 의식으로 출범한 간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항일의 의식 교육과 근대의 시대에 대응하는 개화의 교육 과정으로 덕도 주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었다.

●●● 덕도와 천도교 그리고 일제강점하의 민족 독립운동의 산실
덕도와 천도교의 상관 관계는 유추하기 어렵다. 이 부분은 보다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여 진다. 일찍이 1906년 (포덕布德47년) 장흥의 천도교인들은 장흥군 부내면 교촌리에 (현 장흥읍 교촌리) 천도교 교구를 창립하고 각 면단위에 전교실을 세워 신앙과 전도에 대대적으로 정진하였다. 장흥이 낳은 천도교 지도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재계(1888-1942) 선생 같은 탁월한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무인멸왜. 독립성취 기도와 시천주 주문이 덕도 일원을 덮는 듯이 기세를 올렸다.
덕도의 천도교인들과 주민들은 기도와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물심양면으로 항일 독립 운동의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덕도의 신덕마을 앞에는 2006년에 조성된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당시 천도교 중앙본부에서 중임을 맡고 있던 김재계 선생을 비롯하여 김재반, 황생주, 황 업주 등 동지들과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중앙본부에 전달 하였다.
1918년을 전후 해서는 3.1독립만세운동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으며 이에 그 해 3월6일 군내郡內에서 모금한 거금 5백원을 전달 하였다. 이 자금으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하여 서울에서 전남 일원으로 날라다가 비밀리에 배부하는 역활을 감당하였다. 그런 연유로 전국적인 독립만세 운동의 거사일인 3월 1일에는 정작 조직적인 만세 운동에 동참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3월15일을 전후 해서 장흥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의 지도자들과 장흥의 애국 지사들은 일경日警과 헌병憲兵의 대대적이고 치밀한 감시와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지속적이고 산발적인 기습 만세 시위로 장흥인의 기개를 보여 주기도 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의 후유증으로 일제의 탄압이 문화 침탈 내선일체의 고도화된 모양으로 전개되고 조직적인 감시는 강화 되었다, 그러나 덕도의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1936년을 전후하여 독립자금의 헌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열성과 참여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당시 무려 235인의 주민들이 헌성 모금을 하였으며 그렇게 모금된 자금은  관산 대평리 거주 김영화 교인의사敎人義士와 회진 명덕 거주 한오화 교인의사敎人義士 두분이 부인婦人의 처지임에도 불구 하고  회진에서  영산포까지 걸어가는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일경과 왜헌병의 감시를 피해 중앙본부에 전달 하였다.

▲독립자금을 헌성한 이들에게 교부된
은동장銀銅章. 당시 은장을 교부 받은 헌성액은
논 서마지기 값에 해당 하였다고 한다.

독립자금 헌성은 일경日警에게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액수를 표기 하지 않고 은동장銀銅章을 교부交付 하는 것으로 구분 하였다. 전래 하기로는 당시 은장銀章의 헌성액은 논 서마지기 값에 해당 하였고 동장銅章은 논 한마지기 값 정도 였다니 명덕 인근과 장흥 천도교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참여의 열기를 짐작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교인은 전재산을 헌성하고 고용살이를 하면서 생개를 유지 하였다니 이들의 독립에 대한 간절함을 유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듯 장흥의 남녁 덕도의 주민들이 보여준 민족 정신과 항일 독립의 의지가 처절하게 투영된 역사는 묻혀 가는 듯 했지만  2006년을 전후 하여 회진 신덕리의 김제현 선생이 앞장 서고 덕도의 주민들이 합심하여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을 건립하여 그 사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장흥인들은 문림의향의 향맥을 선양하면서도 회진면 신덕리에 소재한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의 존재를 모르고 있다.
지난 4월 28일 장흥문화원의 임원들과 회진면 회원들이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을 찾아 주변 정화와 청소를 하고 참배하였다. 장흥문화원의 금번 행사는 잊혀져 가는 문림의향의 향맥 그 현장을 보존 선양 하겠다는 취지에서 시작한 첫 행사였다.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을 관리하고 있는 김제현 선생의 차남인 김생씨(독립자금헌성유족회 회장)는 외부인이 찾아와 관심은 물론 주변의 정화 작업을 하는 현장에서 감격해 하였다.
더불어 이 ‘독립자금헌성기념탑’이 장흥읍의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혹은 천도교 장흥교구 근처로 이전 복원되어 더 많은 장흥인들이 찾아오는 역사적 유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였다.

●●● 덕도德島(명덕明德)의 역사를 확인하는 주민들의 기록記錄 문화
 -덕호가 가사가 들려 주는 민족 정신

‘덕호가’ 이 노래의 가사가 어디에서 유래 되었고 누가 지었는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덕도의 덕산리 주민들이 1992년 필사하여 단면으로 편집 간행한 70여쪽의 향토지鄕土誌 맨 앞 3쪽에 수록되어 있다. 한 마을의 주민들이 손으로 직접 쓰고 제책하여 마을의 역사인 향토지를 간행 하였다는 사실이 놀라웁다. 이 간행물에는 덕산리의 풍속 현황과 마을 주민들의 활동 내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술되어 있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일찍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 땀 한 땀 엮었다는 사실이 역시 덕도의 깨어 있는 주민 의식의 발로가 아닌가 싶다.
특히 덕호가의 가사 그 내용이 심상치 않게 다가온다. 절절이 나라 잃은 비분강개를 직시하고 떨쳐 일어나 독립을 쟁취 하려는 간절하고 당당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노래를 누가 짓고 곡을 붙였는지 그 유래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덕호가
1. 피가 끓는 이십세기 덕호 청년아 깨어라 어서 깨어라 작야 춘몽을 (후렴) 이 지경이 당한 것이 절통 하거든 힘을 모아 일을 하자 개척 시키자
2. 금수강산 삼천리는 뉘의 땅이며 삼천여만 백의민은 뉘의 자손인가

▲덕산리 향토지 (표지 사진)
1992년 덕도의 덕산리 주민들이 필사로 간행한 마을지.
마을의 풍속,
인물 산업 등을 정리하였으며 주목받는 노래 “덕호가”가 수록되어
있다.
▲명덕향토사 (표지 사진)
1995년 덕도의 주민들이 간행한 450여쪽 분량의 향토지.
덕도 주민들이 일구어온 역사를 체계적으로 발굴정리
하였다. 주민들이 자율적으로 간행한 마을

 

 

 

 

 

 

 

 

 

 

 


1995년 덕도의 주민들은 또 하나의 역사적 기록문화를 완성하였다. 무려 450쪽에 이르는 “명덕明德(덕도德島)향토사鄕土史”지誌를 간행 하였다.
전문인들이나 전공 학자들이 거들어 주지 않고 순전히 덕도의 주민들이 발로 뛰어 잊혀지고 숨겨진 향토사를 발굴 정리 하여 간행한 쾌거였다. 명덕 향토사에는 덕도 주민들이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부터 항일 독립운동에 이르는 치열하고 당당했던 국난극복의 역사를 촘촘히 기록 하였다.
덕도 신덕리 출신의 소설가 한승원은 이 향토지의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1925년을 전후하여 천도교 청년회는 대대적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신상리 2구 중촌에 양영학교를 세우고 물산장려운동과 저축운동을 펼쳤다. 그 결과로 우리 덕도는 섬이라는 불리한 조건 속에서도 다른 인근의 여늬 마을보다 훨씬 빨리 깨어날 수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그 동학의 뿌리로 말미암아 눈을 빨리 뜨게 되었다고 늘 고마워하고 그 고마움에 대한 채무의식을 가지고 있다”

●●● 장흥군의 전략사업 국가위인공원의 주인공은 장흥의 선인들이어야 한다.
장흥군에서는 해동사를 성역화 하여 선양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위인공원을 조성하여 역사의식을 바로 세우겠다는 전략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국가위인공원, 그 공원의 주체는 명망있는 인물들 중심이 아니라 우리 장흥 땅 곳곳에서 이름없이 국난의 극복에 헌신한 선인들이 먼저 선양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덕도의 역사가 조명하는 것 같이 장흥의 역사속에서 스러져 간 무명의 위인들을 발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장흥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 그 일이야말로 곡절많은 이 시대를 극복하는 문림의향 장흥인들의 소명이 아닐까.
/취재 정리 :김석중(소설가) 황월연(장흥문화원 부원장, 전 장흥군의회의장)

▲명덕초등학교/ 장흥군 관내 최초의 사립 신식 교육 기관. 그 역사가 99(혹은 83년)년이 되었으며 덕도의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과 계몽 신식교육을 실시하여 이 지역의 개회에 크게 기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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