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문화,제41호,2019>에 “첨지중추부사 백기호(白基虎)의 명(明)과 암(暗)”이란 글이 실렸다. 일부 공감을 하면서도 당대실상과 주변사정을 보충하고자 한다. 장흥 수원백씨 집안은 ‘백광홍,백광성,백광훈,백문손,백문창,백진항’에 이르는 문인전통에 아울러 ‘정해군 백수장(1469~1543), 중종반정정국공신, 공조판서/백한남(1567 ~1639),장흥부사/백민준(1568~),1603년무과/백민수(1577~1615), 의병장, 풍암 문위세(1534~1600)의 사위, 호조참판 추증 /안양 비동8장사,백홍룡,백봉기/백문규(1643~1691),부령부사/백한상(白漢相),나주영장(1713),안동영장(1718)‘ 등 무반전통이 있다. 오늘의 쟁점인물 ‘관포 백기호(1823~1891)’를 살펴본다. ‘동계 백광성’의 후손으로 수원백씨 동계공파에 속하며, 제주판관으로 통칭된다.
문과공부를 하다가 투필(投筆)하여 1846년도 무과 갑과3위 출신이었지만, 1862년 철종민란 때 ‘선산민란 수괴 전범조’를 홀로 진압한 공적으로 부장(部將)에 단부 되고, 1863년 5월에 제주판관(5품관)으로 부임하였다. (당시 제주실정은, 1860년 2월경 제주암행어사 심동신이 ‘목사,前목사,판관,前판관’을 모조리 지목하여 탄핵서계를 올릴 정도였고, 1862,9월~11월경 제주민란이 있었다.) 무반 출신, 제주목사 양헌수(1816~1888)는 1848년도 무과 급제년이 백기호보다 더 늦었고, 판관 백기호보다 늦은 1864년 3월에 부임하였다. 그런데 상급자 양헌수 목사는 1864년 12월경 추동(秋冬) 고과(考課)에서 백기호에게 ‘최하 폄하(貶下)’를 주었고, <제주판관백기호 논(論)파계(罷啓)>를 올렸다. 이로서 임기 중에 관직을 끝내게 된 ‘백기호’는 전라감영에 관인을 들고 찾아가 통곡하며 소송을 하겠다는 소란을 부렸던 것. 이에 1865년 2월15일경 ‘전라감사 정건조’ 역시 제주목사의 첩보에 근거한 계본을 올렸고, 조정은 “투옥, 엄형 後 흑산도 유배”를 하교하였다. (양헌수는 1866,8월경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1866년 ‘병인양요’에 정족산성 수성장으로 참전한다.)
백기호는 4년여 흑산유배를 마치고 1869년 3월에 석방된다. 1873년경 선전관 추천에 권문세족을 이유로 탈락하지만 선천 자격은 회복한다. 1878년 6월경에 ‘함경도 북병영 우후’로 복직된다. 1879년 6월에 ‘오위장, 첨지(첨지중추부사 정3품)’로 되었다가 은퇴한다. 이에 다시 살펴본다. 이번 <장흥문화>에 실린 “백기호 명암론”은 징치(懲治) 기사와 암(暗)에 치중되어 있으며, 당시 제주목(牧) 상황과 흑산도 유배의 발단배경 설명이 부족해 보인다. 기실 백기호는 명색이 관장(官長) 신분임에도 고과(考課) 포폄(褒貶)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해패지류(駭悖之類)’의 경망한 처신을 보여준 데서 유배제재를 받았던 것. 그가 부패축재에 관한 의심 부분에 자해(自解) 해명을 했다지만, 제주목사의 考課에도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회계숫자도 제시되었다. 제주민란 직후라서 민간을 상대로 한 직접 수탈방식은 어려웠을 것이고, 다만 관직내부의 뇌물부패는 여전했을 것인데, 여하튼 양헌수 목사가 부임 9개월 만에 ‘폄하’ 考課를 내린 것에 불만을 품고 전주감영에서 통곡 소동을 부린 데에 징치(懲治) 유배가 발단된 것. 아마 그는 “주관적 재량평가로 임기내(미고만,未苽滿)에 해직 퇴출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 나 혼자만 그런 것인가?”고 호소하고 싶었을지도 모르나, 그런 난동 항의는 분명 잘못되었다. 어쨌거나 병인양요의 정족산성 수성장 양헌수의 공적에는 늘 ‘제주판관 백기호’의 징치사례가 붙어 다니고 있다.
한편, 당사자 백기호에 관한 기록에 일부 억울함이 남아있다. ‘송사 기우만(1846~1916)’의 <송사집>에 실린 <제주판관백공 묘갈명>에는 “公무예절륜 사문업(舍文業)궁마 登병자제(第) 상(嘗)이(以)필마(匹馬) 금(擒)선산적괴 제주擾(요) 命公爲통판(通判), 주문(州聞)公자해(自解) ‘피주목무(被州牧誣) 적(謫)흑산(黑山)’”이라 되어있어, 오히려 ‘제주목사에 의한 무고 피해’를 기록하였다. ‘오남 김한섭(1838 ~1894)’의 <오남집>에 挽詩 <白우후 만(挽,10수)>가 있는데, “제1수, 유(惟)公호해기(湖海氣) 간담(肝膽)상륜균(常輪?) 조년(早年)등갑제(登甲第) 투필(投筆)고하인(古何人) /제3수, 영해(瀛海)미고만(未苽滿) 흑산(黑山)구어리(久禦?) 촌장(寸腸)사욕열(思欲裂) 기나(其奈)의려비(倚閭悲)”라 하였다. 장흥선비들, ‘영광김씨 김경현(1833 ~1906), 수원백씨 백영직(1841~1912), 관산위씨 위관식(1843 ~1910),위계창(1861 ~1943)’등의 挽詩도 있다.
대개 사승관계에 친인척 또는 친분관계에 기하여 우호적으로 써지는 ‘묘갈명’과 ‘만시’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그들 선비들 면면을 통하여 백기호의 인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나아가 ‘고읍 당동’의 기와집들을 부정축재 증거로 쉽게 단정할 것은 아닐 일이고, ‘고읍 당동 마을변천사’와 ‘판관 백기호 집안의 흥망사’는 구분해야할 것 아닐까? 예컨대, 이번 ‘명암론 필자’가 언급한 “고래등 같은 기와집 수십채, 수십톤 넘는 검은 곰보석 연자방아, 수백년 고급정원수” 등에서 ‘곰보바위 연자방아’를 제외한 나머지 '수십채, 수십톤, 수백년' 사정들은 그 짧은 제주판관 재임 19개월과 유배 4년간에 이루어질 일은 아니겠다.
‘고읍 堂洞’은 원래 ‘장흥 임씨 唐洞’에서 유래하여 여러 역사적 성쇠를 거친 만큼 차제에 <당동 마을변천사>의 정리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관포 백기호’의 아들 ‘자경 백성흠(成欽,1841~1919)’을 덧붙인다.
무과 출신에 선전관 경력이었다. 1895년 흉년에 백미 250가마를 구휼(기부)하였다. 1919년 1월경 고종 음독사를 비관하여 식음을 전폐하다가 역시 운명하였다.(고종시대사, 기려수필) 1924년에 <선전관 白公성흠(成欽) 기선비(記善碑)>가 ‘춘헌 위계반(1848~1939)’의 근찬(謹撰)으로 세워졌으며, 지금도 현 관산읍사무소 앞에 있다. 가슴 아픈 ‘향토인물사’이지만, ‘제주판관 백기호’를 통하여 그 균형 잡힌 명암론(明暗論)에 상응 합당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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