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1722년경 장흥에 별 사건은 없었다. 숙종시대 당쟁혈흔이 여전한 경종시대로, 중국은 강희제 61년 몰년이었다.
먼저 ‘1721년 이전’ 장흥사정을 본다. 1713년경 장흥 부산방 출신 영광김씨 ‘방호 김희조(1680~1752)’가 생원시에 입격하고, 1714년에 ‘반계사’가 창건되고, 1717년에 ‘삼연 김창흡(1653~1722)’이 장흥府 ‘관산객관, 금당도, 천관산, 수인산’ 유람시를 남겼는데, ‘몽와 김창집(1648 ~1722)’의 동생이었다. 1721년경 조정대신들은 “장흥 금당도가 봉산(封山)인지 둔전(屯田)인지”에 대해 논란을 벌였고, 노론에 속했던 ‘간암 위세옥(1689~1766)’은 그 가정 형편과 경종을 둘러싼 서울 분위기가 부담스러웠는지 부친의 고향 장흥으로 낙남하였다.
1721년. 드디어 당풍이 다시 불었다. 왕세제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 4대신(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이 소론 ‘김일경(1662~1724)’의 공격으로 파직되었다. 그해 장흥 유치방 태생의 1708년 문과급제자 ‘성휴 문덕린(1673~1739)’은 ‘영암군수’로 부임해 있었다. 그가 1719년에 병조좌랑이 될 때 “지망(地望)이 얕다.”는 반대의견도 있었다. 1721년 8월에 부임한 장흥부사 ‘이동창’은 별 기록을 남기지 아니했다. 노론 4대신 사건에 연루된 노론140여명에 대한 유배가 있었다. 1721년 12월경 성균관 유생 ‘응재 이희지(李喜之,1681~1722)’는 장흥府 벽사역에, 무장(武將) 출신 ‘유취장(1671~1722)’은 장흥附에, 이조판서 관력의 ‘옥오재 송상기(1657~1723)’는 강진 병영에 유배되었다. 다음해 1722년, 정쟁은 더 세게 타올랐다. 3월경 남인 ‘목호룡(1684~1724)’의 삼급수 고변에 따라, “왕세제 대리청정을 주도한 노론 4대신 행위는 경종 왕위를 노린 역모에 해당한다.”고 비화되었으며, 그 역모를 뒷받침한다는 구체적 독살음모사건이 조사되었다. 그 역모사건 주동자로 지목된 ‘李喜之’는 ‘유취장’과 함께 재소환되기에 이르렀고, 그때 벽사역 찰방 ‘박태준’은 ‘李喜之’를 비호했다는 혐의를 받고 추문 조사를 받았다. ‘李喜之’의 부친 ‘이사명’은 ‘백강 이경여’의 손자에 판서 관력자로 ‘남인이 재집권한 1689년(기사환국)’에 진도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었고, ‘李喜之’는 그 노론 4대신 ‘이이명’의 조카였다. 장흥 땅에 짧게 머물었던 그가 남긴 사연은 없다. 그런데 서울로 불려가는 압송 길에 영암을 통과하며 ‘영암군수 문덕린’에 불똥이 튀었다. 노론출신의 영암유배객 ‘홍석보(1672~1729)’의 부탁을 받고서 ‘李喜之’ 일행과 접촉한 ‘문덕린’은 “언찰 증거를 덜어 내려했다”는 인멸 혐의를 받게 되고, 급기야 1723년에 함경도 회령으로 유배되고 만다. 서울로 간 ‘李喜之’는 1722년 4월 중순경에 고문 끝에 장살(杖殺)되고, 고향 부여에 있던 모친과 부인은 백마강에 투신하였다. 4월 말경에 노론대신 ‘김창집, 이이명’이 賜死되고, 같은 장흥유배객 ‘유취장’의 서제 ‘유후장’은 5월에 물고(物故)되고, 다른 동생 회령부사 ‘유정장’은 6월에 자살하고, ‘유취장’은 9월에 정법 처형되었다. 그렇게들 줄줄이 죽어가던 1722년이었다. 장흥을 유람했던 ‘삼연 김창흡’도 장형 ‘김창집’이 4월 말경에 賜死된 충격인지 그해에 급서하였다. (6창 형제의 부친 ‘문곡 김수항(1629~1689)’은 좌의정 영의정 관력으로 1689년에 진도 유배지에서 賜死되었다.) 1722년경 그 중앙 정객들의 끔찍한 죽음들을 장흥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그해 겨울에 강진 병영의 유배객 ‘송상기’를 찾아온 위문객이 있었다. 1708년 사마양시에 ‘진사장원’이었어도 관직진출을 마다한 사위, ‘담헌 이하곤(1677~1724)’으로 대단한 장서가이고 예술비평가였다. 그는 충청도 진천에서 전라도 병영을 오고간 남쪽 여행길 감상을 <남유록/남행집>으로 남겼는데, 마침 ‘수인산, 보림사, 장흥府, 노봉祀, 천관산, 탑산사’ 겨울풍경이 거기에 들어있다.
장흥府 명소(名所) 모습을 시문으로 찍어놓은 셈. ‘이하곤’은 장흥府에 들린 김에 영광김씨 ‘김수하(1652~1721) 前여산부사‘의 천곡 집을 찾았다가 연전 타계소식을 접했고, 또한 그 장인이 ‘문덕린’을 아는 입장이라 예양강의 동강(桐江) ‘文氏 부춘정’도 들려보았다. 11월 23일경에 보림사에서 1박 하였으며, “쌍계사 대둔사보다 훨씬 낫다./ ‘춘면곡’ 시조별곡을 들었다”고 했다.

이제 ‘1723년 이후’ 사정이다. 1723년 2월에 부임한 장흥부사 ‘유이성’은 별 기록을 남기지 아니했다. 그해 1723년 장흥에 큰 경사가 있었으니, ‘김희조’의 동갑친구 진주정씨 ‘정재춘(1680~1750)’이 문과갑과 장원에, 광산김씨 ‘김광호(1695 ~1746)’는 탐화랑(갑과3위)에 급제하였다.
나중에 정재춘은 ‘해남현감’으로, 김광호는 ‘창락찰방’으로 끝났는데, 큰 출세 후에 ‘파직, 유배, 처형’을 당함보다는 그래도 나앗을까? 안타깝게도 그 장인 ‘송상기’는 1723년에 병영 배소에서 유명을 달리 하고, 그 사위는 고향에서 1724년에 타계하고 말았다. 1724년 9월에 경종이 승하하자, 서울의 바람은 바로 뒤집혀 불었다. 함경도 회령으로 먼 유배를 갔던 ‘문덕린’은 1725년 4월에 해배되었다, ‘예조정랑, 양근군수, 우통례(정3품,1739)’를 거치고서 충청도 부여로 은퇴하였다. (백마강변 규암리에 묘소가 있다) 1726년에 장흥 ‘연곡서원 사액’이 내려지고, 1728년 성균관에서 ‘이인좌 난’을 지켜보었던 ‘김희조’는 이제 과업을 중단하고 낙향한다. 그간 가족들에게 늘 면목 없어 한, 대과낙방 탄식이 그 문집에 남아있다. 장흥에 내려왔던 ‘위세옥’은 다시 서울과 장흥을 오간다. (처형된 ‘李喜之’는 주동자 혐의에 얽힌 필화(筆禍) 때문인지 1766년에야 겨우 신원된다.)
마무리한다. 사실 1722년경 장흥땅에 별 사건은 없었지만, 그 겨울 방문객 ‘담헌 이하곤’이 남겨놓은 <남유록/남행집>의 장흥 여정(旅程)을 따로 기억할 만하다. 배운 자의 거드름을 다소 피우는 듯한 문투일지언정, 후대의 장흥사람에게 약300년전(前) 장흥 실경(實景)을 오롯이 알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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