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가가 되려거든 손문처럼
대장부가 되려거든 안중근처럼 되어라”
중국에서 전래되어 오고 있는 말이다. 그는 멋진 사나이였다.

안중근 의사 애국 혼 살린 ‘장흥 해동사’ 방문의 해
장흥군 ‘2020 해동사 방문의 해’ 선언
安 의사 숭고한 뜻 기려 기념공원 조성 중
영정 모신 해동사엔 복제유묵 등 전시 
하얼빈-광화문-장흥 동경 128도 위치

 

초나라 항우같은 무인이 되고 싶었던 그의 인생목표는 단순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 것. 멋진 사나이를 찾아가서 의형제를 맺는 것.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며 사냥을 하는 것. 황해도 최고 갑부의 아들이었던 그는 훌륭한 부모 밑에서 부러울 것이 없는 엄친아 였다. 열여섯에 결혼했고, 항상 사냥을 다니고 기생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일본의 침략으로 저물어 가는 대한제국 국운의 끝에서 방황하던 그는 이천만 동포를 등에 지고 바람 부는 만주벌판과 러시아 땅 블라디보스톡을 헤매인다.
목숨을 건 전쟁의 실패와 친일 앞잡이들의 모진 억압과 배신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는 열 한 명의 동지와 함께 손가락을 끊어 대한 독립에 목숨을 바치기로 다짐한다.
드디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뤼순 감옥에서 탈옥할 기회, 항소해서 살아남을 기회, 잘못을 반성하고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내던지고 초연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소원은 오직 대한독립과 동양의 평화였다. 그가 바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걸출한 인물 안중근이다. 안중근은 그렇게 우리에게 영웅이 되었다.

구한말~일제 항일 ‘미스터 션샤인’의 으뜸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의사이다. 그러나 해방후 친일파들이 여전히 득세하는 가운데, 안중근 의사를 10년동안 아무도 돌보거나 기리지 않았다.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 숭모회가 생긴 것은 1971년이다.

문림(文林)이자 의향(義鄕)이기도 한 장흥은 이 보다 16년 앞선 1955년 장동면 만년리, 고려 유학자 안향 선생의 제례공간 만수사 한켠에 한 칸짜리 추모 건물을 마련하고 이름을 해동사(海東祠:전남 문화재자료 제291호)라고 했다. 그의 순국이 동방의 해뜨는 나라 대한민국을 밝게 비췄다는 의미를 담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이다.

북한쪽인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와 본관은 다르지만, 안 의사를 아무도 기리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죽산 안씨 문중이 이를 주도했다.
그해 10월27일 안의사의 딸 현생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위패 봉안식에는 남해안 각지에서 1만여명이나 찾아 뒤늦은 추모를 송구스러워 하면서 그의 구국혼을 되새겼다. 이를 계기로 2년 뒤 전국적 자발조직인 ‘안의사 사우 모의계’가 만들어졌다. 매년 3월 26일 안의사의 순국일에는 수많은 참배객이 찾는다.

1996년 해동사를 3칸 넓이로 증축했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10여 계단 쯤 오르는 높은 단 위에 전각을 짓고 그 안에 안의사의 영정과 배향시설, 유묵 복제본 등을 두고 있다.
유묵 중에는, 단지(손가락을 자름) 혈서로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를 썼던 결기를 떠 올리는 듯 한 5언절구 4행의 글귀가 안의사 사진 옆에 서 있다. 五老峰爲筆(오로봉위필)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靑天一張紙(청천일장지)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오로봉을 붓으로 삼고, 삼상 물을 벼루에 담아, 푸른 하늘만한 큰 종이에, 내 마음 속 시를 쓰려네>.(보물 569-9호) 대한독립이라는 크나큰 대의를 위해 한 목숨 바친 자신의 모습을 여유자적 시인으로 표현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족적에 비해 추모사당은 크다할 수는 없지만, 죽산 안씨 문중을 중심으로 장흥 일대 뜻있는 인사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이라 의미를 더한다.

2010년 정남진 공원에 높이 4m짜리 안의사 동상이 세워졌다. 정남진이란 경도 상 동경 128도로 서울 광화문과 같고, 그 정남쪽이라는 의미인데, 공교롭게도 안중근 의사의 거사가 성공한 하얼빈 역시 같은 경도이다.
장흥군은 지난해 하얼빈-광화문-정남진 장흥이 수직선상으로 연결된 군 상징 일러스트를 새로 발표했다.

장흥군은 올해를 ‘국민, 해동사 방문의 해’로 정해, 이 일대에 70억원을 들여 기념관, 역사 체험 교육시설, 역사공원, 애국 탐방로, 김구ㆍ안창호ㆍ윤동주 등을 함께 기리는 메모리얼 파크를 만들고 있다.

1879년 해주 태생인 안의사는 1894년 세살 위인 청년 김구와 인연을 맺고, 1905년엔 자주적 교육에 몰두했으며, 1908년 의병부대 ‘동의회’를 창건해 우(右)부대장을 맡았다.
1909년 2월,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 러시아 크라스키노(연추마을)에서 왼손 무명지를 잘라 선혈로 태극기에 ‘大韓獨立’이라고 썼다. “3년내 거사를 못하면 자결한다”고 마음먹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말을 듣고 춤을 췄다고 한다. 그는 조국을 위하여 뤼순 감옥에서 교수대에 올라 대한독립을 외치며 형장에 이슬로 사라졌다. 어찌 영원토록 우러러 받들 대한에 영웅이 아니겠는가? 이를 볼 때 이 나라를 이끌어나가는 현 정치인들은 어떤가? 틈만 나면 당파(黨派)싸움으로 나라를 어지럽게 해서 될 것인가? 이 나라를 되찾게 한 민족의 영웅(英雄)들에게 부끄럽지 않은가? 지금부터라도 선열(先烈)들의 그 뜻을 이어받아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몸 바쳐 작은 영웅이 될 그런 정치인은 없는가 라고 묻고 싶다.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우리 모두는 참배해야 한다.
갈 곳을 잃었던 안중근 의사 흉상이 드디어 LA에서 빛을 보게 됐다.
제작된지 17년이 흘렀지만 설치 장소 문제로 한인사회에 공식 선보이지 못했던 안중근 의사 흉상이 특정 장소에 자리를 잡고 누구나 와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7일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는 LA 한국교육원에서 LA 총영사관, LA 한국교육원, 대한민국 안중근 의사 숭모회의 후원으로 ‘대한국인 안중근 의사 흉상 제막식’을 개최했다. 이날부터 안중근 의사 흉상이 LA 한국교육원 1층, 지난달 개관한 한국역사문화 체험관 옆쪽에 위치해 누구나 와서 관람할 수 있게 됐다.

이날 제막식에서 윤자성 미주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최석호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김완중 LA총영사, 토니 안(안도용) 안중근 의사 증손자 등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안중근 의사 흉상에 덮여있던 도포를 벗겨내자 참석자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미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심정수 조각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이 흉상은 높이 43인치, 너비 27인치의 크기다.

윤자성 회장은 “안중근 의사 흉상 건립은 새로운 시작”이라며 “이를 계기로 미주 동포에게 안 의사님의 숭고한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 평화사상이 널리 선양되고, 후손들에게도 널리 계승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다만, 이 흉상은 당분간 LA 한국교육원에 임시 설치돼 있는 것으로, 관련 허가가 떨어지면 본래 설치 예정지였던 한인타운 노인 및 커뮤니티 센터나 제3의 장소로 이전된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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