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속에서 여가를 의미있게 활용하는 한 방편으로 산책은 건강과 명상의 힐링에 유익한 스포츠다. 산책은 검소하면서도 체력 소모도 덜 해 연령에 제한없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모처럼 일상의 혼탁한 소음에서 일탈하여 소슬한 호숫가를 홀로 거닐며 느껴보는 낭만이야말로 자연의 숨결에 기대어 범사에 감사하고 추억도 더듬어 가면서 자신의 정체까지 재확인해보는 클래식한 감정속으로의 여행과도 같다.

지난 3.1절 휴일날 유명한 산책로의 러시는 핵 코로나의 확산으로 저지되어 별종 필자 혼자만이 볼거리 풍성한 길다란 곡선, 탐진강 호수 둘레길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인적이 호젖해서인지 마치 내가 이방인이나 된듯한 분위기에 잡다한 상념들이 깊어만 갔다. 호수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초겨울 오후같은 정적만이 감돈다. 한 여름 정열이 폭발하던 정남진물축제 현장의 오만한 기세는 간데없고 힘차게 솟구치던 봇물마저 고개를 떨군채 주변은 흡사 큰 명절을 치루고 난 후 피로감에 대낮 포곤히 잠든 종갓집 중년 여인의 지순한 모습이다.

느슨해진 나의 감정을 깨우기라도 하듯 갑자기 두 개의 그림이 물살을 가르며 분수처럼 수면위로 솟아오르더니 이내 가라앉는다. 외가리 한 마리 그 길쭉한 고개를 한참 빼내더니만, 밖을 탐정하려는가 피래미를 낚아채려는가 두리번거리다 다시 제 위치로 회귀한다. 이웃 물오리떼들도 합세한다. 물오리 원앙 한쌍이 발갈퀴를 휘저으며 다정히 돛선처럼 수면위를 유연하게 구른다.

시야를 좀 더 넓혀보니 저만치 강 외진곳 습지 갈대밭에선 솔방울처럼 둥근 어린 새들이 서로 엉키고 뒹굴면서 노래한다.
이곳은 아마 옛적에 따오기, 뜸북새가 둥지를 틀고 서식한 청정 영역이었을 것이다. 새들의 화음에 맞춰 풍! 덩! 덩치 큰 잉어 한 마리 공중으로 점프하더니 뱅글 360도 회전하며 날래 산소 몇 모금 삼키고서는 덜렁 드러눕는다.

덩달아 피래미 몇 마리도 반지르한 주홍 뱃살을 연잎처럼 활짝 펴 보이며 존재를 과시한다.
봄의 풍요한 여적은 지천을 현란하게 꽃 수 놓고 나그네 마음까지 설레게 한다. 둘레길을 치마처럼 두른 청초한 봄 들꽃들의 향연이 절경이다. 제비꽃, 냉이, 팬지, 개쑥갓, 광대나물, 쑥이 친숙하고 낯익은 이름모를 들꽃들도 날 반겨주어 흐뭇하다.

길가에 자생한 쑥잎 몇 개 따내 둥글게 주물러서 임시방편 콧마개로 실험했더니 식물성 천연 섬유질외 박하향 내음이 특유의 약초 한방술로 진화한다. 화학성 코로나 마스크 따윈 경쟁력에서 뒤져 아예 후순위로 밀려난다. 그래서 챔피언 타이틀은 무명의 침입자에게 빼앗길 수 있는 가벼운 밀짚모자와 같은 것이다.

휘 둘러보니 강 건너 나즈막한 산아래 장독대에 엉킨 독립가옥 몇 채가 눈에 잡힌다. 바로 장흥읍 성 안의 자존심 동동리 산 허리에 아직 남아있는 역사의 풍속도다. 그 곳에는 1970년대 후반 필자가 군청 초입시절 식목일 행사 때 이현호 전 군수의 지휘아래 동료들과 함께 심어 놓은 벚나무 군락이 있다. 그 나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여 의젓하게 키 작은 어린 수목들을 보호하고 있는 풍경을 대하고 보니 사랑스럽고, 새삼 그 시절 추억들이 되살아나 왈칵 그립고 또 그립기만 하다.

등을 돌려 내 중학시절 낚싯대 담구던 그 곳 강뚝을 찾았더니 낮은 잔디밭으로 개발되어 반갑잖은 간이 화장실만 덩실 놓여있어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이처럼 이들 고향의 대명사들 앞에서 누구나 숙연해질 수 밖에 없음은 인간의 본능이리라.
이제 발길은 둘레길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필자의 청춘시절 예양리 남산공원과 함께 연인들의 유일한 데이트 코스로 사랑받던 박림소 보트장과 몇 걸음 위쪽 풍류의 서정어린 창랑정이 고개를 내민다.

한 폭 동양화 같았던 현장은 정작 오랜 세월의 풍상에 몸은 다 헐어지고 앙상한 뼈대만 남아있어 보기에 측은하다. 보트장 나룻터엔 뱃사공은커녕 우정 몇몇이 걸터앉아 담소를 나누며 풍류를 즐기던 넓적한 천연방석 큰 바윗돌은 그 형체마저 볼 수 없어 휴일의 낭만은 비애로 돌변하여 서러워라! 허탈한 심사를 달래려고 겨우 사진 한 컷 담아 위안삼고 쓸쓸히 고별했다.
오늘 같은 날 어느 한 곳 노송아래 가슴저린 잔설이라도 쌓여있어 밟아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하지만 모처럼 고향 땅 냄새를 홉씬 맡으면서 사유해 보는 멋스런 시간을 보낸 것이 그렇게 즐겁고 보람 있었다. 이 또한 정감 넘치는 짤막한 애향의 표현이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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