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양 해창(海倉), 장흥府 조운창(漕倉) - '안양 해창(海倉)'은 '장평 사창(社倉), 고읍 남창(南倉)'과 더불어 "장흥 3倉"에 속하며, 세곡(稅穀)을 운송하는 '장흥府 조운창(漕運倉)'이었다. 장흥 세곡米를 海倉의 '조운선(私船 또는 京江船)'에 싣고 약15일 걸려 서울 京江으로 운반했다. 또 배를 제작하는 부선소(附船所)가 있었다.
<정묘지,1747>에는 "倉庫 -본읍세미 해운(海運)경창, 매년 민정(民丁)을 동원하여 船倉 굴토를 한다. 수군(水軍)의 대선, 병선, 사후선 각1척에 전선 저치米 3,200여석이다"고 했다. 그렇다면 정유재란 당시에 李충무공 수군재건로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곳, "장흥 감관(監官) 색리(色吏)가 관리하던, 군영구미 倉庫"는 어디겠는가? 바로 '안양 海倉 조운창'이다. 일부 보성 사람들과 노모 해설사가 주장하는 '보성 회천 군학리'는 단순한 海村에 불과하여 장흥의 감색 官吏도 없었고, 그들이 관장할 포구와 창고도 없었다.
장흥府 '안양 해창' 포구를 건너뛰어, 세곡창고도 없는 '회천 군학'으로 멀리 세미(歲米)를 운반 저치할 수 있겠는가? 조선후기에는 대동미(米) 세곡을 운송하는 조운선(漕運船) 치패(고패)사고로 장흥부사가 파직 또는 문책되는 일이 꽤 있었다.  장흥부사가 조운의 무사고를 기원하였던 곳, 거기에 장흥부사 철비(鐵碑)와 '영신당(堂)'이 있다. 해창 앞 '장재도'는 장재선(船) 정박지였다.

2. 안양 수문포(水門浦), 전라감영의 도청(都聽) - <정묘지,1747>에 水門浦, <호구조사,1789>에 水門里로 등장하나, <안양면지>에도 그 개포(開浦) 유래는 불명확하다. 그런데 1725년(영조1년,7월11일), <영조실록>에 나온, "장흥府에 신설하는 水門浦 도청(都廳)를 혁파해야 한다."는 장령 '최도문(1676~1729)'의 상소에 근거한다면, 水門浦는 그 무렵에 공식적으로 개설된 포구일 것. (물론 그 마을 자체는 오래 전에 성촌했을 것) ‘최도문’은 '간암 위세옥(1689~1766)'과 가까웠고, '천관산歌'를 남길 정도였으니, 아마 1721년 낙남 이후에도 자주 서울을 오갔던 ‘위세옥’한테 그 사정을 들었을 것. '장흥부사가 관장하는 海倉'의 바로 옆에 '전라감영이 관장하는 水門浦 도청'의 등장은 장흥府 입장에선 큰 부담이 되었을 것. 
<정묘지>는 "浦民居所 船戶"라 했다. 어쨌거나 水門浦는 새 중심지로 발전하였다.(1770년 水門浦市場, 1918년 水門주재소, 1919년 水門우체국) 그 水門浦 어원 유래는 어떠한가? 水門이 먼저 있어, 水門浦라 했을 것. 水門 설치시점은 불명이나, '여닫이(여다지)' 지명과 통할 수 있겠다.  속칭 '숨포'설도 있는데, '수문'이 '숨'으로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치 들숨과 날숨처럼 조수간만 차(差)가 컸던, 그 일대를 '여다지(여닫이)'로 불렀다. '숨은 浦'설도 있는데, 그 '수문 < 숨은’으로 음차 하여, "숨을 隱"으로 받은 사례로 '隱洞(은동)'이 있다. 1425년경에 등장하는 소마포(召麻浦)와는 관련성이 없다.

3. 안양 사촌포(沙村浦), 염소(鹽所) - <정묘지>에 따르면, 沙村浦에 '염소(鹽所)'가 있었다. 불로 굽는 소금가마에서 '화염(백염)'을 생산했을 것. 또한 '제철지, 당제터'도 있었다. '사촌(沙村)'의 지명 유래는 어떠한가? 우선 바닷가 모래가 많아 '사촌(沙村)'이라 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砂村’으로는 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전국에 산재한 '沙村里' 유래를 보면, '사기점(沙器店)' 사례도 꽤 된다.  '안앙 沙村'도 주변에 '사기점(店) 가마터'가 있었다. ‘沙’가 沙器를 지칭하는 사례는 많다. 沙器(사기, 자기) 산지인 강진 대구 '사당리(沙堂里), 白沙里'도 沙를 사용한다. <정묘지>는 沙村 마을에 거주하는 성씨를 함께 기록하지는 않았다. 1961년경 사촌 간척사업이 있었다.

4. 회령방 율포(栗浦), 전라병영의 도청(都聽) - 율포(栗浦)에는 전라병영(兵營)의 도청(都聽)이 있었다. 회령방 포촌(浦村)에 있는 ‘栗浦’를 ‘밤개’라 불렀다. 그 유래에 대해 '먹는 밤나무, 논배미 뱀(밤), 바위 밤' 등으로 엇갈리나, 필자는 '논배미 밤'에서 온 것으로 파악한다. 그 포구에는 논배미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 1914년 행정관할 구역변경으로 '보성군 회천면 율포'로 되었지만, 원래는 장흥군 지역이었다. '남파 안유신(1580~1657)'은 詩,"장흥 율포 백사정(白沙汀)"을 남겼을 정도로 그 白沙汀은 장흥땅이었다. “임진난 당시에 '회령 군학'에 회령포鎭과 회령포鎭 만호가 있었다”고 우껴대는 보성쪽 주장은 가히 흉측하다.) 전라병영이 관장하는 '栗浦 도청'의 폐단에 대해 장흥사람 '만수재 이민기(1646~1704)'가 순찰사에게 민폐를 호소하는 '민막(民?)狀'을 올렸었다. ‘도청(都聽)’은 잡세(雜稅)와 현물수익을 올리는 일종의 수탈 연락소였을 것.

5. 맺음말. - 조선 시대엔 '안양 海倉'이 ‘장흥府 조운창(漕運倉)’이었다. <청구도,대동여지도,장흥도호부지,조선지지>에 '해창, 해창津'으로 나온다. 수심이 깊고, 미곡창고와 접안시설이 튼실했기에, 1960년대까지도 해운역할이 지대했었다. 그러나 수차 거듭된 간척사업과 海倉저수지 축조로 海倉포구 원형이 망실되고 말았다. 너무 안타깝다. 이제라도 "本邑稅米 海運京倉, 李충무공 過해창浦"라는 표지석을 세우면 어떠할까? 아울러 '수문포 전라감영 도청‘, '율포- 전라병영 도청’,  '사촌포 - 염소와 사기 가마소‘가 있었음도 기억하자.  (기타 장흥府 치소에 가까운 “안양 남쪽 2포 -안양 지천포, 목단포”가 있었고, ‘안양 주교포’는 없었다. <정묘지>는 "지천浦 -지천촌 앞에 있고, 해상선박이 모두 이곳에 집결한다. 목단浦 -안양방 남쪽에 있고, 쌍어도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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