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김헌(金憲)’을 기리는, ‘존재 위백규’의 <의도 김공전>예강칼럼(104)/박형상/변호사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0.02.14  10:04:11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반곡 정경달(1542~1602)’의 ‘사위(郞) 김헌(金憲,1561~1592)’의 죽음에 관련하여, ‘존재 위백규(1727~1798)’의 당파적 변개(變改)설이 제기되었다. <반곡난중일기>의 역자 신해진 교수의 주장이다.
첫째, <심양사행일기(선약해)/심양왕환일기(위정철)>등은 노론지지를 받은 주류문학으로, <반곡집, 반곡난중일기> 등은 남인지지를 받은 비주류문학으로 이분하면서, 반곡후손들이 남인 ‘한치응, 정약용’을 찾아 <반곡집> 서문과 산정을 받게 됨은 당파적 인연이었고, 특히 동인이 몰살된 ‘기축옥사(1589)’ 기억 때문이다는 것.
그러면서 “한치응의 선조 한준겸( 1557~1627)의 형 한백겸(1552~1615)이 정여립 시신을 염(殮)했다가 유배를 갔던 일, 웅현(熊峴)전투의 지시자인 전라감사 이광(1541~1607)이 정여립 일당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시도했던 일”을 거론하였다. 그러나 그런 당파적 관점에 앞선 사정들이 따로 있다. 반곡선생은 경오년(1570년) 동방(同榜) ‘정여립(1546~1589)’과 이미 소원했고, 한백겸의 아들로 역시 同榜인 ‘한효윤(1536~1580)’과 인연시가 <반곡집>에 있으며, 그 한효윤의 동생 ‘한효순(1543~1621)’은 전라감사 시절에 반곡의 상산본가를 직접 방문했기에 그런 세교지계(世交之契)에 터잡아 그 후손 ‘한치응’을 찾아갔으리라. 또한 1801년 강진유배에 훨씬 앞선 1793년경에 서울 명례방으로 ‘정약용’을 찾아간 것도 ‘같은 압해도에서 연원했다는, 丁氏동족 宗人의식’ 때문일 것. 직부전시 특례로 1789년에 탐화랑으로 대과급제한 나주정(丁)씨 정약용은 정(丁)씨들 희망이었지만, 당시 장흥의 영광정(丁)씨들은 오랜 동안 실세(失勢)한 처지였기에 대외적 당파활동을 펼칠 여력도 없었을 것. 또한 기축옥사 피해도 없었다.
둘째, 신교수는 “웅현에서 사망했던 ‘金憲’이 2차금산싸움 사망자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학자적 견해일 터이지만, 서인(노론)과 ‘조헌(1544~1592)’의 영광에 편승하도록 ‘위백규’가 부러 고쳤다는 말인가? 신교수가 <반곡일기, 역본>에서 그 무렵 ’전라도 웅현(熊峴)‘을 ’김천 개령면 웅현‘으로 오해한 잘못에서 비롯된 억측 아닐까? 그해 7월 초순경에 시작되었던 ’웅현(熊峙)전투, 이치전투(권율 참전), 1차금산싸움(고경명 순사)‘은 시기와 순서를 놓고 혼선을 빚는데, 8월18일경의 2차금산싸움(조헌 순사)은 상대적으로 명확하다. 여기서 ’웅현, 이치, 1차금산, 2차금산 ‘싸움을 거시적으로 묶어보면, 하나의 광역전적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호남(전주) 장악을 위하여 그 연접 요충지에서 연속적으로 싸운 것이니, ’金憲‘의 당시 행동반경은 그런 광역적 차원에서 짐작될 수 있을 것. 결국에 ‘1차, 2차 금산패전’은 ‘금산 칠백의총’으로 귀결되었는데, 바로 거기에 ‘金憲’이 모셔져있다.
계속 검토한다. 먼저 <반곡난중일기/ 92,8,19>에 “노복 귀복이 (선산으로) 가져온 家書에 따르면, 웅현 싸움 후에 시신을 못 찾았고, 혹 탈피 가능성이 있다.(年記, 사위사건은 7월8일에 있었다.)”라 했고, <?8,23>에 “귀복은 환향, 聞(문)錦山승전”이라 했고, <11,13>에 “귀복이 가져온 家信에 金憲 仍(잉)무거처”라 했다. 그러니 <반곡일기>는 처음부터 ’金憲, 웅현 사망’을 단정하지도 아니했고, <11,23>에도 “김헌 무거처(無去處)”라 말할 뿐이니, 그때까지 ’金憲‘ 행방을 제대로 몰랐던 것. 이제 <의도김공전(義徒金公傳)>을 살펴보면, ’위백규‘는 “완주와 금산 경계에 적병 기세가 대단했고, 7월4일에 웅현을 침범했다. 金公은 ’만마동‘을 거쳐 ‘조헌’의 의병격문에 ‘공주’로 말을 달려갔으며, 8월18일에 ‘금산’에서 전사하였다.”고 했다. 그는 ‘경상도 웅현’과 ‘전라도 웅현’을 구별했으며, ‘장흥, 전주(만마동), 웅현, 공주, 금산’을 거쳐온, ‘金憲’의 행적을 제시하였다. (‘만마동’은 ‘웅현’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무엇보다도, ‘조헌’의 <중봉(重峯)집>에 ‘강위귀’와 ‘金憲’의 동반참전 순사가 기록되어 있다. <정묘지,1747>에도 ‘金憲’이 먼저 ‘전주(완산) 만마동’에 간 사실이 나온다.
‘위백규’의 <義徒金公전(傳)>보다 후대시점이지만, <진주강(姜)씨 삼강문(나주 산포,1858)>과 <사우(祠宇) 귀천단(장흥 부산,1928)> 기록에도 “강위귀, 강봉령 부자와 ‘金憲’의 2차 금산싸움 동반순사”가 나와 있다. 설령 부분적으로 부정확하더라도 ‘존재 위백규’는 어떤 당파적 편의 차원에서 허위사실을 작출하지 않았다.
그는 <義徒金公전(傳)>에 덧붙였다. “그렇지만 公이 여기 칠백의총에 있으니, 重峯선생은 알아줄 것이고 7백명 동지들도 알아줄 것이니, 그늘진 달빛 비추는 밤과 비바람 부는 낮에 분명 서로 더불어 한가로이 노닐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느냐의 여부에 대해 公이 또 무슨 유감을 갖겠는가. --公이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이미 그의 忠義를 알고 있기에 슬픈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그 忠義를 끝내 알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대략 서술하여 전(傳)을 지어 당세 청운지사(靑雲之士)에게 알린다.”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신해진
호남의 의와 관련된 문헌들이 전승과정에서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며 노론은 언급하였을 뿐 &lt;남인&gt;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없으며, &lt;의도김공전&gt;이 반곡난중일기 내용과 달리 바뀌어 있다(변개되어 있다)고 했지 직접 변개했다고 한 적은 없으나 어느 정도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해진-
(2020-02-15 12:53:07)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여백
여백
톱기사
여백
중요기사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장흥신문  |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주)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