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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촌 유물관의 ‘퉁소’, 두 <심양일기>예강칼럼(101)/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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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10  10:5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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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촌의 '퉁소' 표찰 유물 - 방촌유물관의 전시품 '퉁소' 유래가 엇갈린다. 위씨 일부 후손은 "청(淸) 심양에 '위정철'이 회답별사로 갔던 때에 淸 태종에게 받은 '옥피리 철피리' 하사품이다"고 설명하는 반면에, 방촌유물관은 "방어사 ‘위정철'이 북방통치 때 위무를 잘하여 여진으로부터 ’철퉁소, 옥퉁소‘를 받았다고 전한다."고 하였고, <"장흥"전, 나주박물관>은 "북쪽 여진족한테 받은 ‘철퉁소, 옥퉁소’. '위정철'은 1636년 영흥대도호부사 겸 함남방어사 등 북쪽 여진인을 상대하는 직책 중에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같은 전시품을 두고 왜 달리 설명되는 것이며, 그 실제 곡절은 어떠한가? 먼저 객관적 시점을 정리하면, 1627년에 정묘호란이 있었고, 1631년 3월경 '위정철'은 회답별사로서 아직 후금(後金) 시절에 심양에 가서 '홍타이지'를 만나고 돌아왔다. 1636년 4월에 '홍타이지'는 淸 태종으로 등극하였고, 1636년 12월에 병자호란이 있었고, 같은 해 '위정철'은 '함남 방어사'가 되었다. 살펴본다. 먼저 그 전시품이 피리(笛)인지, 퉁소(簫)인지, 실제로는 가로 세로 어떻게 부는지? 실체가 궁금하다. '피리, 적(笛), 퉁소, 소(簫)'로 혼돈스러운데, 혹 상징적 악기는 아닌지도 궁금하다. 다음, '위정철'은 과연 언제 어떻게 취득하였는가? '1636년, 淸 태종 하사품설'과 '1636년 위정철 방어사 취득설'은 '위정철'이 1631년에 파견된 시점에 배치되어 믿기 어렵다. 그런데 '1631년, 후금 홍타이지 하사품설'도 바로 믿기 어렵다. 사행기록 <심양왕환일기>에 나온 선물 목록에 '퉁소(또는 피리)'가 없기 때문이다. 목록에 "안구마 1필, 담비가죽 10령, 은자 50냥"만 있고, ‘옥소, 철소’는 없다. 어떤 역문은 ‘옥소, 철소’를 추기(追記)해 놓았으나, 그 <일기> 원문에는 없다. (혹 목록에서 '누락' 또는 '은폐'되었을 가능성은 일단 배제한다.) 그렇다면 방촌유물관의 '통소 하사품' 전말은 어찌되는 것인가? 마침 해결 실마리가 <장흥읍지 정묘지,1747>의 ’고읍방‘ 편에 있다. 무과 인물 '위정철' 부분에 "일찌기 영유(현 평안도 평원)를 지키면서 어느 때 '가도'에 들어가니(時入假島), 천사(天使)가 유장풍류(儒將風)가 있어 '양한지(兩漢志), 용관(龍冠), 철적(鐵笛)'을 예물(禮之)로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다시 살펴본다. '만회재 위정철'은 1627년 정묘호란 이후에, 1628년~1629년 윤4월경 '영유현령'으로 재직했다. 그 이전 1622년경 이래 明나라 장수 '모문룡(1576~1629)'은 후금 '홍타이지' 군대 정벌을 핑계 삼아 평북 철산의 가도(假島)를 점거하여 요동도독부를 자칭하였다. 조선은 明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향명배금(向明排金) 노선을 취하면서, 假島의 '모문룡'을 지원해 주었다. <정묘지> 기록대로, '위정철'이 영유현령 재직 때 그 가까이에 있는 假島를 방문하였다면, '모문룡' 또는 다른 明 사절(天使)한테서 ’철적(鐵笛)‘ 등을 받을 수 있었을 것. 요컨대, 방촌유물관의 전시품은 북방 여진족 '홍타이지'의 하사품에 해당하기 보다는 <정묘지> 기록에 비추어 ’영유 현령 위정철‘의 가도(假島) 방문길에 明 쪽에서 받은 '철적(鐵笛), 옥적(玉笛)'일 가능성이 높다. 황제 하사품으로 보기에는 그 장식 재질 문양 등이 여러모로 소박하다.

2. 두 <심양일기> -  후금의 요동 정벌은 회피하면서, 假島에서 明과 조선을 상대로 여러 전횡을 저지르던 '모문룡'은 드디어 1629년 3월에 明의 '원숭환' 장군한테 처단되고, 이에 假島를 접수한 '유흥치'도 내부 변란으로 1630년 4월에 살해되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假島의 明軍에 식량 등을 지원 해주던 조선에 불만이 컸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조선 사절단을 박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정철'은 회답별사 특명을 받아 1631년 3월19에 '홍타이지'에 사절로 갔던 것. <정묘지>는 "정묘호란 후 척화使로 추천받아 심한(瀋汗)에 사절로 갔다(斥和使薦 公使瀋汗)"고 기록했다. 조선과 '위정철'은 明과 '홍타이지' 세력 사이에 눈치를 보아야했고, 그 <일기>에 당시 '假島 변란' 상황이 언급되고 있다. <심양왕환(往還)일기,1631,3.19~4,30>를 남긴 '위정철'은 후금 심양의 '홍타이지'를 '호(胡)'로 표기하였다. <왕조실록>은 '홍타이지‘를 금한(金汗)'으로 지칭하던 때였다. 그런데 또 다른 <심양일기>가 있다. 1년 전, 1630년경에 '홍타이지'에 위문사로 갔었던 보성출신 ‘선약해(1579~1643)’는 <심양사행(使行)일기,1630,4,3~5,23>를 남겼다. 그 경력을 보면, '선약해'가 전국구 무반이라면, '위정철'은 북방 오랑캐 전문이라 할 수 있는데, '위정철'은 월경(越境) 채취한 인삼허부 문제로도 북방 여진족과 다툼이 많았고, 나중에 1643년 만포첨사 재직 때엔 淸 칙사의 문책 처벌을 받기 직전에 풀려난 일도 있다. 동향 출신 두 무반의 교류사정은 발견하지 못했다.

- 심양사행일기, 백종 선약해, ('부사 선의문' 아들.) 1605,무과/ 1625,울진군수/1627,함종부사/ 1630,4,3~5,23, 위문사('금편, 초구, 옥배' 답례품을 받았다). /1630, 평산부사 /1634,안동영장/1635,정평부사/1636,12월, 병자호란/1639,밀양부사/1641,경상좌도 수군절도사/1739, 보성 오충사 배향.

-심양왕환일기, 만회재 위정철, ('훈련원정, 군자정감, 위덕화' 아들.) 1603,고금도 정시무과/1623,인조반정 공신/1624, 이괄 난 진압공신/1628~1629 윤4월, 영유현령 /1631,3,19~4,30, 회답사('안구마1필, 담비가죽, 은자' 답례품을  받았다.) /1633, 가리포 첨절제사/1636, 영흥도호부사 겸 함남방어사/1636,12월, 병자호란/1638, 숙천 도호부사 /1642, 갑산 도호부사/1643, 만포진 병마첨절제사 /1644, 은퇴/1645, "위정철을 남방(南方)직에 서용함은 가능하다"고, 청 사신 발언/ 1806, 장흥 죽천사 배향 ( 그 손자기 ‘간암 위세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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