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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의 큰별, 연당 박성준 기적비(蓮堂 朴成準 紀積碑)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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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03  12: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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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연당박성준기적비(蓮堂朴成準紀績碑)는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관산읍사무소 청사 민원실 앞에 위치한다.

 <비문> 박성준은 밀양人인데 규정(糾正)공 현(鉉)의 후(後)로 창식(昌植)의 자(子)요, 호는 연당(蓮堂)이며, 1930년 4월 25일에 옥당리에서 출생하였다. 公은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노력으로 자수성가 하였으며,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오직 고국의 향토발전에 전념해오면서 모교인 관산국민학교 동쪽에 위치한 강당 청사 신축과 관산고등학교 설립 기금을 헌성하여 후진양성에 공헌하였다.

   
 

관산지서(支署) 청사 개축, 관산읍 청사 증축, 보림사 복원 헌금, 각종 기자재 기증 등 지속적으로 지역발전에 참여하면서 새마을 사업과 빈민구휼 등에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관산면에서는 그 공헌에 지대함을 찬양하기 위하여 면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워 그 공덕을 영원히 기념하는 바이다. 서기 1974년 3월 관산면민 일동으로 세웠(竪)다.

비석을 세우는 일은 통일주체 초대 대의원 덕운(德雲) 위황량이 주도하고 비문은 남전(南田) 위정우(1936년생, 방촌리 태생)가 초안(草案) 하였다.
■ 연당(蓮堂) 박성준(1930~1994)은 父 박창식(1900~?)과 母 선산김씨 사이에서 차자로 관산읍 옥당리에서 태어났다. 관산국민학교를 졸업(18회)하고 서울 중동중·고교를 졸업하였다. 6.25 전란을 피해 1951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橫浜)에 정착하였다. 항구에서 갖은 잡일을 하면서 정착 기반을 다졌다. 이후 미군부대 장교와 인연이 되어 운수업에 종사하였다. 증식한 재산을 주로 관광업, 부동산업에 투자하여 많은 재산을 모았다. 이때 모국 고향 관산국민학교 강당 청사 건립 등 고향 여러 기관에 지속적인 헌성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연당은 1960 중반년에 재일교포 거류민단 초창기부터 청년회장을 맡아 참여하였다. 당시 교포사회는 조총련을 지지한 세력이 80%로 북한을 추종하면서 지원을 하였다. 이에반해 거류민단을 지지한 세력은 20% 정도로 남한을 추종 지원하였다. 남한과 북한은 이념에 편승 재일교포 사회를 서로 지지 후원 세력으로 두기 위해 줄기차게 경쟁한 시기였다. 1970년 초중반년부터 재일교포 대한민국 거류민단 부단장을 맡아 매년 교포들을 대동하여 모국 방문 하는 등 모든 일을 앞장서 주도적으로 추진하여 교포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로 성장하였다. 이후 민단 의장을 맡아 대한민국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목련장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에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을 자주 예방(禮訪)하였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은 어렵고 가난한 시절에 모국을 떠난 해외 동포들에게 새마을운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으로 발전한 대한민국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해외 교포들의 모국 방문을 적극 추진하고 국정홍보 정책에 활용하였다. 교포들의 모국 방문을 계속 앞장서 추진해 정일권 국무총리, 김종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등 정부관계자들과 폭 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또한 1972~1973년 거물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에 체류시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전두환 정부에서는 정호영, 유학성 등 정권의 핵심 실세들과 친분이 두터었다. 특히 호남 정치인으로는 장성군 출신 후농(後農) 김상현(1935년생)을 아우로 호칭하는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정부 관료로는 광양 출신의 제 20대 전라남도지사(1980년 5월~1982년 1월)와 건설부장관(1982년 1월~1983년 10월)을 역임한 설성(雪城) 김종호(1926~1984)와는 긴밀한 유대를 하였다. 고향 관산을 찾을 때 여러번 동행하면서 장흥의 도로 사정이 좋치 못함을 알려 1981 ~1983년간 23번 국도(현 장흥대로)가 확장되면서 아스팔트로 포장되었다.(시공사 한보종합건설) 여기에는 연당의 숨은 공로가 이었다. 1981년 성공적인 88 서울올림픽 유치를 위해 재일교포 10만여명의 성금을 모아 필요한 건물 건축에 사용될 기금 기부에 공헌하였다. 1982년 금융권에는 재일교포 다수가 주주(株主)로 참여한 신한은행이 창립(창업주 이희건)되었다. 연당은 앞장서 주주로 참여하여 오늘날 신한은행 발전의 초석(礎石)이 되었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김윤환, 김용환, 최병렬 등 7인회 멤버들과 친분을 유지하였다. 1988년 4월 26일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민주정의당에서는 장흥군 지역구 민주정의당 후보로 연당을 출마시키기 위해 청와대 관계자가 두번 일본에 있던 연당을 찾아와 출마를 권유하였다.

   
 

불출마를 고집하였으나 집요하게 거듭된 출마 권유에 따라 연당은 출마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따라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흥군 선거구 기호 1번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26.52%를 득표하였다. 평화민주당 이영권 후보(71.77%)에게 패하여 낙선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시기에 건강이 좋치 않았다고 한다.

이후 1990년에는 고향 관산지역 내 친분을 유지했던 위계상(1927년생, 옥당), 위황량(1927년생, 옥당), 위성렬(1928년생, 방촌), 위 열(1929년생, 옥당), 이충기(1931년생, 옥당), 조병섭(1931년생, 옥당), 최판영(1931년생, 장흥 건산) 등 7인 부부를 초청하여 우의와 애정을 베풀었다. 현재 생존인은 위황량 丈, 위성렬 丈 두분이다.

1993년 김영삼 문민의 정부가 출범하였다. 주일본대사에 오래 전 대사관 근무 때부터 친분을 유지해온 공노명(1932년생)씨가 대사로 부임하였다.

   
 

건강이 악화됨이 공노명 대사를 통해 본국에 보고되었다. 정부에서는 연당의 그간의 애국의 행적이 지대함을 높이 평가하고 최고 권위의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주일대사를 통해 수여하였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994년 3월, 65세로 별세하였다. 가족들은 화장하여 유해(遺骸)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도쿄(東京) 우에노공원에 안장(安葬)하였다.

가족으로는 제주도 출신 申氏 사이에 2남4여를 두었다. 자(子)는 박 찬(1960년생)과 박신의(1963년생)로 현재 일본에서 거주한다. 손녀 3명이다.
형(兄)은 박성인(1919~1951)이다. 묘소는 관산읍 방촌리 호동마을 뒤 망치등(嶝) 산이다.
조카(姪)는 자운(1941~1986)으로 묘소는 방촌리 망치등 산 고영하(考塋下)이며, 종손(從孫)은 종효(1969년생), 규관(1976년생)이다.

자문 : 덕운(德雲) 위황량(1927년생, 관산읍 옥당리 거주), 박종효(1969년생, 광주광역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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