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 기록, 해석의 상충관계 - 옛 장흥 실체를 온전하게 되찾을 수 있는가? 장흥의 역사적 기록들이 언제나 객관적이던가? 인물에 대한 개인적 편견은 피할 수 있는가? 땅과 사람의 정체성과 자존감 사이에 갈등 여지는 없는가? 장흥향토사 뒤안길에도 천리마(千里馬)를 알아보는 '백락(伯樂)'의 눈이 필요한가? 보물찾기에 급급하여 낙화(落花)낙엽(落葉)을 함께 쓸어 담는 무모함은 없는가? 長興은 장흥 땅에 사는 장흥사람의 눈에만 잘 보이는가? 그간 <예강칼럼>을 기고해오면서 늘 고민스러운 부분이었다.

2. 천관녀와 도둑골, 長興 - 왜 어떤 사람들은 '경주 김유신의 천관(天官)녀'를 '장흥 천관(天冠)산 천관(天冠)보살'로 아둥바둥 끌어온단 말인가? '장흥 천관산(天冠山)'에 '경주 천관녀(天官女)'는 없다. 분식된 스토리텔링일 뿐 아무런 관련이 없다. 혹자는 장흥의 '도둑골'에 도둑이 많았기에 장흥 땅에 교도소가 들어섰다고도 풀이한다. 그러나 '도둑골, 도적골'은 '도작(陶作)골,도장(陶匠, 陶場)골'로 '대덕 청다리 도둑골', '관산 죽교 도둑골', '용산 운주,월송,풍길,묵촌 도둑골', '안양 운흥,고당 도둑골', '장동 하산 도둑골' 등은 가마터 유적지이다. '도장(陶匠,독장)'이 '도장(陶場,道場)'에서 '도작(陶作)'을 했던 장소일 것. 우리말 '돋(돝)안, 도장'에서 온 '도잔골, 도장골'로 보기도 한다. 돌이켜 長興이 長興인 것은 "길게 興하라"고 기원보다는, "넘버원 퍼스트, 가장 좋고 오래된 자기 산지"였기 때문 아닐까?(옛 '장흥부 탐진현 시대의 고려청자'를 생각해보라) 기록에도 "공예태후 임씨지향이라 장흥府로 승격했다"고 했을 뿐이고 달리 "길이 興하라는 뜻에서 長興이라 명명했다"는 기록은 없다. 전국에 산재한 여러 長興은 '오리지날 브랜드 長興'에서 확산된, 파편 지명으로 도자기 산지들이었다. 장흥의 長은 '長자,長남,長관'처럼, '최초, 맏, 우두머리'의 뜻이고 興은 ‘새로운 가마터 불길’을 말하는 것으로, 가마터 지명에는 興자가 많다.

3. 떨어져 나간 기억의 파편들 - 고려 장흥부(府) 최대관할은 6속현(屬縣)이었다. <세종 지리지>에 나온 '5속현(수녕,장택,회녕,두원,도양)'에 '조선초 1417년에 신설한 강진현에 이속된 탐진현'을 합하면 전체 6속현이었다. 고려 '탐진현'은 고려 인종조~1417년까지 약300년에 걸쳐 장흥府에 속하였다. 장흥 서쪽의 엣 명칭 '아서향(鄕)'은 그 시절 흔적일 것. 동쪽으로 '두원, 도양, 고이부곡'은 1441년 등에 '흥양'縣으로 이속되고, '웅치,회령,천포' 3방(坊)은 1914년에 '보성'郡으로 분속되었다. (그때 판소리 지역 '웅치, 회천'이 보성으로 넘어가버린 것). 옛 고려와 조선 초 장흥府에는 지금의 '강진,보성,고흥의 일부'도 속했는데, 그 당대 시점과 당대 공간의 당대 인물을 대상으로 역사적 해석이 이루어져야 합당할 것.

 4. 지명의 소중함, 99번째 기억 ‘예양강’ - 지명은 그 사회문화적 정체성에 직결된다. 남도비가사(南道悲歌士) 옥봉 백광훈(1537~1583)이 읊은 '예양강(汭江江)'을 곧장 '탐진강'이라 새겨버리면 그 시공간적 감흥이 온전할 수 있을까? '예양강 8정자'도 마찬가지. 조선 내내 '汭陽江'였음에도, 일제시기에 시작된 '탐진강'으로 대못질해 버린단 말인가? 부디 '탐진강' 대신에 '예양강' 또는 '예양강(현 탐진강)'이라 옮겨보자. 그 '예강' 지명 유래에 정설은 없고, '물굽이 예(汭')로는 해결되지 않는데, '예(옛)강'과 '구(九,舊)강'의 상통관계를 추론해본다. 九에는 '오래된(old)九,늙을九,합할九'가 있는데, '汭江'의 마지막이 '구강포(九江浦)'였다. '예강(汭江)'은 이쪽 남쪽에서 사람들 사연이 가장 오랜 '옛강, 구강(九江,舊江)' 아니던가? 마침 예강 상류의 가지寺 터전 ‘구룡(九龍)’ 세력처럼, 외부세력에 저항한 옛(九,舊,濊,汭) 토착세력이 오래 있었을지 모른다.

덧붙인다. '강진쪽 예양강'을 읊은 詩 2수이다. '장육재 문덕구(1667~1718)'가 예양강 강두(江頭)에서 올라오면서, 현 강진 군동 '석교(石橋)'와 '화방산'을 읊었던 "예양9곡가(歌) 제1곡"이 있다. 남도에서 활동한 외지인, '효당 김문옥(1901~1960)'이 '강진(금릉)'을 읊었던 "도(渡) 예양강"도 있다.

 - 예양구곡歌 제1곡, "석교(石橋)", (장육재 문덕구)
一曲江頭繫海船   
일곡 江 머리에 海船 머무르고
花山秀色映長川   
'화방산' 풍광이 예강에 비치네
春來無限橋邊柳  
봄은 石橋 버들에 매양 올 테니
織得東風萬縷烟  
봄바람 얻으면 만루연사를 짜리

- "도(渡) 예양강", 예양강을 건너며, (효당 김문옥)
柳外沈沈碧一江  
버드나무 사이로 짙푸른 碧江
背人沙鳥去雙雙 
등 뒤로 물새는 쌍쌍이 날고
南來風土金陵好 
남녘 풍경은 '강진'이 좋아라
隔岸靑山入酒缸 
건너 靑山 두고 술동이 잡네

<주> 오류와 실수들 - '선인들 생몰연대의 현저한 오류', '낙남(落南) 입향선조에 관한 과장분식'도 있지만, <정묘지, 사마재제명록> 등 공식 기록에도 일부 오류가 있다. <장흥읍, 면지>도 일부 오자 오류가 심각한데, 장흥부 관방(關防) '회령포진 이진(移鎭)시점 오류'가 대표적이다. 재간행이 필요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일부 <번역시문> 사례들이 있는데, 책임지는 <장흥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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