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사랑을 향한 형제 간의 암투가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지 지난 54차 여정에서 우리는 물에 빠져 떠 내려가던 소년과 그 동생의 이야기를 통해 들었습니다. 형제 간의 암투는 어린 시절, 거기서 끝나고 마는 걸까요? 답은 ‘아니오’입니다. 만약 어린 시절이 끝나면서 우리의 상처도 끝이 난다면, 그리고 어린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면서 우리의 상처도 어른으로 성장해 준다면 세상에 이렇게 많은 갈등과 관계의 문제는 있지도 않았겠지요..세월과 함께 몸은 자라 어른이 되지만, 상처받은 어린 아이는 거기서 멈추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겉껍질만 어른이 된 채 어린아이의 정신, 어린아이의 생각, 어린아이의 마음과 정서로 살아가는 이른 바 ‘성인아이’, 이런 성인아이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이 칼럼을 읽는 여러분 주변에도, 아니 어쩌면 여러분 자신도 그 성인아이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처럼, 세상엔 완벽한 환경도, 전혀 상처없이 아이를 키운 완전한 부모도 없으니까요..그리고 그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 한 대물림되는 것이니까요.
서울을 벗어난 지방의 어느 대도시, 큰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대형 교회이다 보니 반주자가 여럿 있었습니다. 1부 2부 3부 예배에 맞추어 피아노 반주자가 셋, 올갠 반주자가 셋, 도합 여섯 명의 반주자가 예배 음악의 중요한 부분을 맡아 봉사하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찬양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순서 중에 담임 목회자가 특별히 부탁한 곡을 피아노와 올갠, 그리고 다른 현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시간이 있었지요. 정성껏 준비한 아름다운 연주 속에서 모든 교인들은 행복한 은혜에 잠겼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가 끝난 이후에 벌어졌습니다. 피아노 반주자가 잔뜩 화가 나, 올갠 반주자를 향해 씩씩거리며 너 때문에 교회를 다닐 수 없노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유인 즉슨 연주 중에 올갠 소리가 피아노 소리보다 더 컸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악기의 왕이 피아노인 줄도 모르냐면서, 피아노가 리드햘 자리에서 어떻게 올갠 소리가 피아노보다 클 수가 있느냐고, 올갠에 묻혀서 피아노 소리가 잘 들리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자기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올갠 연주자는 연주자대로 지지않고 맞섰고, 옆에서 만류하는 사람들의 손길도 아랑곳없이 그들은 점점 더 언성을 높여댔지요. 급기야 그 교회의 부목사님이 달려오시고 나서야 싸움은 일단락이 됐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일로 피아노 반주자는 교회를 떠났고, 어쩌다 나오는 날이면 어떻게 알았는지 마치 교대라도 하듯 올갠 반주자가 나오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결국 올갠 반주자도 교회를 떠났고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다가 이사와 함께 아주 그 도시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피아노 반주자와는 영원히 등을 돌린 채 말입니다.
상대방이 나쁘고 자기가 잘했다고 서로 소리를 높이는 장면은 부모가 자기 편을 들어 주기를 바라고 서로 상대방의 잘못을 일러대던, 우리 어린 시절의 모습과 어쩌면 그리도 닮아 있는지요..
한두 살 먹은 어린 애도 아니고 어른들이 대체 무슨 짓이냐구요? 어른이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의 상처받은, 그래서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아이가 그러는 것 이지요. 그들은 틀림없이 어린 시절,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서로 부모의 사랑을 차지하려 벌인 처절한 암투 속에 성장한 분들일 겁니다.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 수 있냐구요? 굶주린 사람이 밥을 가지고 다투는 법이거든요... 만약에 그 반주자들이 만족할 만큼 충분한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이라면, 절대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충분히 먹었으니 싸울 필요도 없는 거지요. 성서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 야곱과에서,  그리고 요셉과 그 형들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사이의 암투는 한 결같이 죽음과 그에 준하는 참혹한 아픔을 낳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경 에서 자라셨습니까? 어린 시절 받은 사랑은 충분했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으로 그 부족한 사랑을 채우시겠습니까?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