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며 너와 나와의 관계속에서 생활하는데 늘 근심 걱정이 그림자 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보다 발전적이고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욕망이 있기에 사람의 마음속에는 항상 성취하고자 하는 성취동기가 심리적으로 작용하는데 그 꿈을 실현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보람된 인생을 살려면 어떠한 인생관(人生觀)과 가치관(價値觀)을 가져야 하느냐에 따라 또한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잠시 머물다가 빈손으로 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더욱 무상(無常)함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과연 여태까지 무엇을 했으며 왜 이렇게 살아왔는지 또한 살고 있는지, 지난날보다 오늘 현재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한다.
늘 생각할수록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면서.... 명상(冥想)에 잠기기도 한다.
언제인가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떠나야만 한 것이 자연의 이치(理致)이며 섭리(攝理)가 아니겠는가.
나 자신을 발견하면서 성인들에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자 했다.

석가모니는 중생을 위하여 생노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고자 수도(修道)하였으나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자필멸(生者必滅)에 무릎을 꿇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 그는 제자에게 진리(眞理)의 지팡이를 물려주면서 자연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한 시대를 살면서 지현(支賢)들을 상기하게 되는데 훌륭한 인격(人格)과 인품(人品)으로써 존경의 대상이 된 선조들의 자취를 두루 살펴 알고 있으나 오늘날 현실은 어떠한가.
주변에 그런 분들이 얼마나 있으신지 모르겠다. 벌이 꽃의 향기를 찾아 모여들 듯이 인격과 덕성을 갖추신 분의 곁에만 있어도 존경심과 훈훈함이 감돌고 앉아 있는 자리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선친으로부터 삼강오륜의 유교정신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五常(오상)에 대하여 기본적인 소양교육을 받아왔던 것이다.
부모의 거동은 자식에게 거울에 비추어지고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한다.
그로 인한 가정환경과 人牲敎育(인생교육)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봄에 씨앗을 뿌려 잘 가꾸어서 좋은 결실을 맺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나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여 항상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부모님의 은혜에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자식으로써 그저 풍수지탄(風樹之歎)일 뿐이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부(富)의 가치에 너무 현혹되어 정신적, 윤리도덕 가치를 뒤로한 채 눈에 보이는 경제적 가치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윤리적, 도덕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전자는 생활의 매개체일뿐 수단 가치에 불과하나 후자는 목적가치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두가지 가치가 전도될 경우 인간의 비극이 시작되고 불행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늘 보아오지 않았던가.

복잡한 사회구조에서 자행되는 일들이 자기중심, 이기심 등 여러 가지 욕망 때문에 근본의 마음이 혼탁하여 흔들리고 있으며 내가 나를 알고,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상당한 수련과 교육 정신적 수양이 쌓여 짐으로써 인격이 형성되는데 知ㆍ德을 겸비함으로 훌륭한 인격자로 발돋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구하고자 하나, 마음대로 얻지 못하는 것은 인생의 냉엄한 현실인 것이다.
어제의 너의 행동이 오늘의 너를 결정하고 오늘의 너의 거동이 내일의 너를 좌우한다는 명제, 선을 많이 쌓고 그러면 행복해 질 것이 아닌가.

탐욕과 무리한 욕심 때문에 눈이 어두우면 내가 나를 보지 못한다. 또한 자기 자신의 허물을 감추면서 남을 험담하고 비방하면서 남의 흉, 단점을 드러내는 위선행위는 아주 나쁜 습관에서 오는 처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부화뇌동(附和雷動)하지 말자. 우리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지혜와 슬기를 모아 가치판단을 잘하여 감정보다 이성적으로 앞날을 살아간다면 얼마나 현명하겠는가.
항상 역지사지(易地思之)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상적(理想的)일 것으로 여겨진다.
좀더 관대한 마음으로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시야를 넓혀 가까운 산보다 높은 산을 주시하면서 마음을 비우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란 말이 생각난다.

사람의 가치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인간관계 속에서 인간미를 발휘하여 환경에 따라 잘 적응하고, 언제나 어진 마음을 지니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리라 본다. 또한 오늘 생각하고 내일 말하는 내면에 마음가짐 그래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도 있지 아니한가.
인간관계에서 공자는 안연과 예수는 베드로와 석가모니는 안난과 철인 쏘크라테스는 플라톤과 함께 미담과 미덕을 나누었으며 성인 孝子는 道와 德이란 두 글자를 써놓고 홀연히 살아졌다고 한다.
그때 당시 내가 생존해 있었다면 노자를 끝까지 찾으려고 했을 텐테...

특히 쏘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아라” 말씀하시면서 正義와 眞理에 앞장 서셨다고 한다.
평범한 우리 인간은 일반적으로 자화자칭함은 물론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자주 보아왔다.
빈 수레가 요간하다는 말,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듯이 자중하면서 자기를 되돌아 볼 줄 아는 인간이 가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영조대왕과 실학사상의 선구자이신 다산 정약용 선생님, 이퇴계와 이이, 이율곡 선생간에 학문연구, 고려말 충신 중 三隱(포은, 목은, 야은)은 어느 정각에서 정서적으로 자연과 벗삼아 글(詩)를 읊었다고 하는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분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한줌의 부토로(흙)으로 변하였지만 오늘날 인간의 가치로 영원토록 후손들에게 전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보이지 아니한 인간의 가치가 여기에 있으며 훨씬 위대하다 할 것이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는 머지않아 드디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빈손이 아니겠는가.
과거사에는 부귀영화를 누렸던 시절, 기록에 별로 없으며, 있었다면 천민과 노비가 경제적 가치를 팔아서 양민(兩班)으로 둔갑했던 기록으로만 알고 있다.
집을 지을 때 좋은 목재가 필요하듯이 고목(古木)도 꽃이 피고 쓸 만한 목재가 있다면 얼마나 가치가 있겠는가. 마음에 양식을 쌓게 할 현대적인 良書도 좋겠지만 역사적으로 검증된 고전에 뛰어난 인물들이 많아 인간의 가치를 더욱 느끼게 하고 있으니 소중함을 아니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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