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어서마을 뒤 주산(主山 238m) 정상에 있는 바위를 봉바위라 부르다가 명풍(名風)이 지나면서 바위를 가리켜 "범바위(虎岩)가 내려다보니 학이 날으려 하나 물이 없어 흠이로다."라고 했다는 말이 傳해 내려오고 있다.

주산이 우산형국이라 하여 우산(雨傘), 또는 어산(御山)이라 부르다가 세종지리지에 어산향(語山鄕)이라 한 후 어산(語山)이라 불렀으며 마을이 동서로 분구되면서 서쪽마을을 어서(語西)로 불러오고 있다. 어서마을은 성균 진사 청강(淸江) 李昇(1556~1628)이 인근 금곡리에서 분가한 후 입촌하여 후손 번손으로 인천이씨의 대표적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12~14대 국회의원을 지낸 이영권(1934년생)님이 이곳 태생이다.

■ 용산면 어서로 41-38, 주산 아래 마을 깊숙한 안쪽에는 비정(榧亭)이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는 '경타(警惰), 게으름을 깨우치다. '교경(矯輕), 가벼움을 바로 잡는다는 표석이 양쪽에 세워져 있어 엄숙함을 자아낸다.

이곳은 1929년(己巳) 어서마을에 거주하는 도편수 이수길(1888~1959)이 현재의 터에 동향 건물로 신축하였다. 목적은 시인 묵객의 휴식 공간인 비정(榧亭)과 후손 강학 및 선조 제향 공간인 영사재(永思齋)로 사용키 위해서였다. 비정(榧亭)의 명칭은 주변에 오래된 비자나무가 있어 명명하였다.

1984년(甲子) 주변 수목으로 인해 일조량이 적고 터 내에 샘(泉)이 있어 습하여 건물에 영향을 주었다. 도편수인 손자 평강(平江) 이춘흠(이명 용채, 두만, 1936년생 )이 현 위치인 남향으로 이축(移築)하였다. 규모는 4칸 겹집의 목조 팔작 기와지붕으로 종형제간 공동 소유다.

비정(榧亭) 내에는 여러 문인들이 흔적을 남겨 두었다.

영사재(永思齋) 액호

영사재기(永思齋記)

청백세가(淸百世家) : 맑고 깨끗하게 대대로 살아온 집을 말한다. 즉 선비를 뜻한다.

율수궐덕(聿修厥德) : 조상의 덕을 그대로 닦아 나간다.

숙흥야매(夙興野寐) :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잔다. 즉 부지런히 일함을 뜻한다. 5개 편액은 극암 이기윤(성산人 1891~1971, 경북 성주 태생) 선생이 썼다.

비정(榧亭) 액호는 일몽(一夢) 정창한(1882~1953, 용산면 인암) 선생이 썼다.

영사재(永思齋) 원운(原韻)은 1929년(己巳) 9월 하순 이수형과 이수길이 삼가 썼다.

영사재(永思齋) 차운(次韻)은 낙오재(樂吾齋) 이정원(1871~1957 용산면 어산), 남곡(南谷) 염석진(1879~1956, 관산읍 방촌리 태생), 백동선(1894~1985, 용산면 상금)이 썼다.

영사재(永思齋) 차운(次韻)은 1949년(己丑) 10월(陽月) 영광人 김한상, 광산人 김홍수, 영광人 김경식이 삼가 남겼다.

숙비정(宿榧亭)은 호남지역 한학 문장의 맥을 마지막까지 지켰다는 評을 받고 있는 효당(曉堂) 김문옥(광산人 1901~1960, 화순군 절산) 선생이 썼다.

청송(靑松) 편액은 주인 이수길의 장손자 이귀원(1927~ ?)이 아호를 썼다.

비정(榧亭)을 창건한 이수길은 자(子) 4명을 두었다. 첫째 호근(1908~1982), 둘째 창근(1910~1936), 셋째 용주(1915~1986), 넷째 귀주(1918~1954)이다.

손(孫)은 귀원(1927~ ?), 상원(1929~ ), 춘흠(1936~ ), 병연(1946~ ), 병춘(1950~ ), 부원(1929~ ) 등 6명으로, 귀원은 호근 出이고, 상원·춘흠은 창근 出이며, 병연·병춘은 용주 出이고, 부원(생부 호근)은 귀주 出이다.

영사재(永思齋)에서는 매년 4월 셋째 토요일에 평강(이춘흠)丈을 기준으로 7대조 이하~4대조 간 선조 16位 제향을 봉행한다.

이곳 비정(榧亭)을 이축(移築)한 도편수 평강(平江) 이춘흠 丈은 세상에 태어난 1936년 그해 선친이 별세하여 조부 밑에서 자랐다. 재능을 타고나 어린시절부터 목수 일을 조부에게 익혔다. 1957년 강진 다산초당 건축을 시작으로 1982년 장흥읍 남산공원 팔각정, 1993년 합천 해인사, 2005년 영암 월인당 등 전국 주요 한옥 건물을 건축하는 등 널리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의 도편수 기능 보유자(제4452호)로 지정되었다.

평강(이춘흠)丈의 언동에 의하면 비정(榧亭) 내에 극암(이기윤) 선생의 편액 5개가 소장된 연유는 조부는 장흥·강진 등 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도편수였고, 극암 선생은 문장이 특출하여 친분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강丈이 12~13세 쯤 조부께서 목판을 다듬어 주면 목판을 등에 멜빵 봇짐을 하고 어산 마을에서 자울재(眠峙) 고개를 넘어 극암(이기윤) 선생이 거주하는 강진군 칠량 송산까지 약 40리(16km)길을 걸어가 목판에 글을 써 주면 받아오는 심부름을 여러 차례 했었다고 한다. 조부는 받아 온 목판의 글을 조각으로 새기고 다듬어 편액으로 완성하였다면서 영사재(永思齋) 내 극암 선생이 쓴 편액에 대해 극찬(極讚)과 애정(愛情)을 소회(所懷)하였다.

■ 이 나무는 장흥군 용산면 어산리 289-2번지 어동마을 앞 원형인터체인지 부근에 위치한다. 1982년 11월 4일 천연기념물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400여 년 前에 마을 앞 공터에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유달리 크고 수형(樹形)이 좋아 이 나무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여 정자목으로 키웠다. 높이가 24m, 가슴의 둘레는 6.40m의 늠름한 자태를 보이고 있다. 줄기에 굴곡이 많고 밑동은 울뚝불뚝 근육처럼 발달했다

봄에 잎이 늦게 피거나 고루 피지 않을 경우 질병 또는 재난으로 마을에 피해가 있거나 국가가 불란하며, 반대로 잎이 고르게 피고 생기가 있으면 마을에 경사가 있고 나라에 좋은 일이 생긴다 하여 현재도 나라의 태평과 풍년, 행운을 빌기 위해서 매년 음 1월 15일 주민들은 온 정성을 다해서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장흥군청>

▶자문 : 춘사(春史) 이영숙(용산 접정 새터, 1932년생)丈, 도편수 평강(平江) 이춘흠(용산 어서, 1936년생)丈
▶드론사진제공 : 향토사진작가 마동욱((안양면 학송리 태생)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