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신라말~고려초에 成村된 본마을은 그 이름을 羅馬谷이라 하였고 조선조 중종 때엔 金華라 불리우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국란을 좌시하지 않고 주민들이 뜻을 모아 양곡 삼백석을 군량미로 헌납하니 선조임금께서 그 충의를 치하하여 마을 이름을 金谷이라 하사하시었다.

이 자랑스런 유래가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때에 下金里로 바뀌엇으니 주민들의 의사와는 무관한 처사였다. 이제 새천년의 시대에 장흥군 조례 제162호(2007년 1월 5일)에 의거하하여 옛이름 金谷을 회복하고 상부상조하는 전통과 의로움을 잇고자 한다. 우리 金谷마을은 화평의 공동체로 만세토록 번영을 이루리라.<금곡마을 회관 내 걸려 있는 현판에서 발췌>
영사재(永思齋)는 장흥군 용산면 금곡리 258번지(금곡길 49)에 위치한다.

이곳은 병절교위공(인천人 21세 경휘, ~?)의 4칸 묘각(墓閣)으로 뒤 야산에 公의 묘소가 위치한다.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장등종중 소유이다. 매년 10월 상기일 장등종중 주관으로 병절교위공(경휘)과 손자 23세 대균 2位에 대해 묘각에서 제향을 봉행한다. 재원으로는 제위답 8두락과 임야가 있다. 영사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영사재 액호는 상금마을 태생 소봉(小峯) 백기선(1887~1957)이 썼다.
영사재수선기는 永曆三百七年甲午小春(1954년 10월) 十三代孫 백헌(栢軒) 이창호(1872~1957) 근서(謹書)하다.

여곡재(餘谷齋)는 용산면 금곡길 8-68, 금곡마을 뒤 동북쪽 금화산 자락에 위치한다.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금곡종중 소유로 묘각(墓閣)이 아닌 순수 후학 강학 장소인 서재(書齋)이다.

이곳은 1865년(乙丑) 여곡(餘谷) 이중섬(1817~ 1884)이 강학 장소로 초옥을 창건하였다. 이후 종중에서 1889년(己丑) 기와로 개축하였다. 이때 금곡 태생 대목장 이사현(1832~?)이 참여하여 현재 형태인 구당 4칸 서재와 재직실 1동으로 건축하였다. 서재에서는 학문이 뛰어나고 덕망 있는 훈장 이찬원(1898~1966), 이종식(1911~1985) 등이 주로 종중 자제들과 인근 척산, 장전마을 학동을 대상으로 강학하였다. 신학문이 확산되면서 서재는 자연 쇠퇴해져 1970년 중반에 폐하였다. 재원은 논 7두락과 일부 임야가 있다.

액호 편액은 해강(海崗) 김규진(1868~1933)이 썼다. 해강은 근대의 서화가로 중국에 유학가서 진,한,당,송(秦漢唐宋)의 명가의 진적을 연구했다. 귀국 후 고종의 어명으로 왕세자 영친왕(이은 1897~1970)의 스승으로 서화를 가르쳤으며, 벼슬은 시종관을 지냈다. 한국 최초로 서화연구회를 조직, 서화발전에 이바지하였으며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의 산수벽화를 그렸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여러 흔적이 남겨져 있다.

요곡재기는 崇禎五回甲乙丑十月日(1865년 10월)餘谷主人餘谷堂 이중섬(1817~1884)이 썼다.

원운 시운 편액글은 1865년(乙丑) 이중섬 고(稿)하다.

차(次)여곡재운은 1870년(庚午) 남파(南坡) 이희석(1804~1889, 묵촌리 태생)과 지운(止雲) 김경현(1833 ~1906, 내안리 태생)이 썼다.

여곡재중수상량문은 文宣王二千四百六十九年戊午十月下浣(1918년 10월 하순) 도유사 호고당(好古堂) 이장석(1850~1936), 감동 백헌(栢軒) 이창호(1872 ~1957), 금화(金華) 이성호(1873~1929) 근지(謹識)하다.

여곡재중수소기는 創建後五十午年己未重陽(1919년 9월)不肖孫 백헌(栢軒) 이창호(1872~1957) 근지(謹誌)하다.
여곡재팔경은 백헌(栢軒) 이창호(1872~1957) 근제(謹題)하다.
-제일(第一) : 용산모성(蓉山暮聲) : 부용산 저물녘 풍경소리
-제이(第二) : 용강어화(龍江漁火) : 용강에서 고기 잡는 횃불
-제삼(第三) : 학지모연(鶴池暮烟) : 관지 저문 연기
-제사(第四) : 관산석봉(冠山夕烽) : 천관산 저녁봉화
-제오(第五) : 진천낙안(眞泉落雁) : 참 샘에 내려앉는 기러기
-제육(第六) : 휴암제월(휴巖霽月) : 수리부엉이 바위 갠달
-제칠(第七) : 면암초가(免岩樵歌) : 토끼바위 나무꾼 노래
-제팔(第八) : 동대목적(東坮牧笛) : 동대등 목동 피리소리

여곡재중수기는 原記文後五十午年己未冬(1919년 겨울) 不肖子 화산(華山) 이교석(1874~1945) 근서(謹書)하다.

용산면 금곡마을에 위치한 여곡재(餘谷齋) 서재는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금곡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현재 연혁(沿革) 등 안내 시설물이 없이 종중 산 자락에 방치되어 훼손이 심각하다. 마을내에 위치한 영광김씨 금곡파종중 소유의 관수재(觀修齋) 서재와 연계한 당국의 문화재 지정 추진 등 관리 대책마련이 필요하다 사료된다.

자문 : 인천이씨 장흥남면파 장등종중 16대손 춘사(春史) 이영숙(1932년생, 용산면 접정리 새터 거주)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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