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가 있었던 장흥 하천에 이제는 ‘연어’ 치어를 방류한 소식도 들려온다. 좋은 결과를 바라지만, ‘맑고 안정적인 물길’이 먼저 필요한 것 아닐까?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정묘지> 등에 장흥의 '토공(土貢),토산(土産),진공(進貢)' 목록이 있다. 시대차(差)는 있으나, 주로 장흥의 '어패류, 해초류'가 특산물이었다. 이에 흑산도를 중심으로 편제된 <자산어보(慈山魚譜),정약전> 와 비교하면서 몇 사정을 언급해본다. (이하, <魚譜,어보>라 지칭한다)

- 은어(銀魚, 銀口魚)는 <세종실록지리지>에 '土産', <정묘지>에 ‘進貢’ 품목이다. 장흥 방문객 시문에 나온 '은회(銀膾), 은사(銀絲)'는 예양강 은어를 말한다. 회유성 어류인 ‘銀魚’는 모천회귀를 하는 연어와 황어처럼 상류에 산란하고 죽는 것은 아니다. 하류 쪽에서 산란 부화된 어린 새끼는 바다로 내려갔다가 다시 맑은 자갈밭 상류로 올라오며 성장한다. '장흥 銀魚'만 유명했던 것은 아니고, 남해안과 동해안의 여러 하천에 더 알려진 銀魚가 많았다.

- 황어(黃魚)는  장흥 특산물은 아니나, 예양강 독곡에 왔던,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조대記>에 등장한다. <어보>에는 속명 '부사어'라 했다. 영광김씨 ‘천곡 김급(1661~1711)’의 詩 "청은정"에도 黃魚가 나왔다. 黃魚는 예양강 하구의 강진 토산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시절에 ‘연어’는 물론 없었다.
- 오적어(烏賊魚)는 <어보>에 '갑(甲)오적어'로 풀이됐다. 조선시대 烏賊魚는 바로 '甲오징어, 묵어(墨魚)'를 가리키며, 동해의 울릉도 오징어와 무관하다. 필자 어린 시절에 그 많던 장흥 甲오징어, 진짜 '참오징어'는 어디로 갔을까
- 낙제(絡蹄,낙지)는 <어보>엔 '석거(石거), 낙제어'로 나온다. '준어(竹今魚,주꾸미)'와 '문어(文魚, 章魚)'는 장흥 특산물로 기록되지 않았다.
- 수어(秀魚,숭어)는  '건(乾)수어, 수어卵'이 ‘진공’ 품목이었다.  <어보>는 '치어(?魚)'라 부르면서 '가(假)치어‘와 구별했다. 숭어는 '가숭어(참숭어)'와 '숭어(개숭어)'로 구별되는데, 지방에 따라 구별기준에 혼선을 빚는다. 까만 눈에 몸이 두툼한 쪽을  '假치어,개숭어,보리숭어'로 통칭했다. 노란 눈에 몸이 가는 쪽을 '치어,가숭어,참숭어'라 부르고, 가장 어린 치어는 '모치'라 했다.
- 청어(靑魚)는 李충무공의  <난중일기>에 남해안에서 잡히는 군량 식품으로 자주 등장하지만, 장흥 쪽에는 그 靑魚 특산물 기록은 없다.
- 노어(농어)는 장흥 ‘토산’이고, 용산 '노(농)어두(頭)'에서 많이 났다고 전한다.
- 복(鰒)은 ‘복어(鰒魚),전복(全鰒)’이다. '생(生)복,건숙(乾熟)복,장인(長引)복' 형태로 ‘진공(進貢)’되었다. 지금의 '완도 전복'은 그때 '장흥 전복'이었을 것.
- 반합(斑蛤,바지락)은 장흥 ‘토산’으로 예전에는 '반지락'이라 불렀다. <어보>에 '포문합(布紋蛤, 속명 반질악, 盤質岳)'이라 표기했으니, ‘바지락’ 표기 이전에 장흥에서 불렀던 '반지락' 호칭이 그 나름 옳았을 일.
- 감합(甘蛤,감합)은 장흥 ‘토산’이고, <어보>엔 '고막합(庫莫蛤)'이다. 간혹 '감합'을 '맛(竹蛤)'과 혼동하고 있으나, 甘蛤은 ‘꼬막, 괴합(魁蛤)’을 가리킨다. 홍합(紅蛤)은 장흥 ‘진공’품목이고, <어보>엔 '담채(淡菜)'로, 석화(石花,굴)는 장흥 ‘토산’품목이고, <어보>엔 '모려(굴掘), 石華'로 나온다. 반면에 '키조개(箕홍합), 피조개, 새조개'는 오늘날 양식 품종에 해당한다. 
- 해삼(海蔘)은 <정묘지>에 ‘진공(進貢)’ 품목이었다. 장흥군은 지난 2007년경부터 매년 ‘해삼 종묘’를 ‘대덕 내저’ 등에 뿌려오고 있다한다.
- 감곽(甘藿,미역)은  <어보>엔 '해대(海帶)'이다. '조곽(早藿,) 분곽(粉藿)'은  장흥의 ‘진공(進貢)’ 특산이었다.
- 해의(海衣), 감태(甘苔,가시파래), 매산(每山,매생이)는 <정묘지>에 장흥 ‘토산’이다. 또한 '해의(海衣)'는 ‘진공’ 품목인데, '조자채(早紫菜)'를 네모진 나무틀에 부어 마치 낱장 종이를 뜨듯 海衣 가공품을 만들게 된다. <어보>는 ‘자채(紫菜), 속명 짐(朕)이라는 물김 채취물’과 '海衣 가공품 마른 김'을 구별했던 것 같다. <어보>는 '파래'를 '해태(海苔),靑해태'로 지칭하지만, 장흥에서는 '海苔'가 곧 '김, 海衣'인 것이니, '海衣, 海苔, 紫菜, 紫衣' 등으로 통칭했을 것. 장흥 '김' 특산지 ’옹암 자지포(紫芝浦)‘는 이윽고 '新里 자지포'로 거듭 태어났다. 1938년에 장흥의 ’김‘ 생산량은 전국 1위였다.
- 우모(牛毛,우뭇가사리), 세모(細毛,참가사리), 황각(黃角)도 장흥 ‘토산’ 품목 이었으나, '톳, 토의채(土衣菜)' 기록은 없었다.
- 표고버섯(향고,香고)은 <세종지리지>에 '토공(土貢)'이었지만, <정묘지,1747>에 이르러 "토산(土産). ‘송고(松고)-금무(今無)’ /진공(進貢), 표고"라 기록되고 있다. 존재 위백규(1727~1798)는 1776년경 '정조'의 즉위시점에, '황간 장흥부사(재직 1776~1778)'를 대신한 <봉사(封事)>에서 "표고가 끊긴 지 이미 100년이 되는데도, 공안(貢案)에 여전히 상공(常貢) 품목이어서 금전 방납(防納)과 뇌물(정채,情債)의 폐단이 크다"며 그 철폐를 호소하였다.
- 대모갑(玳瑁甲/피皮)은 <어보>에 ‘해구(海龜)’이며, 바다거북 껍질은 고급장식재로 아주 고가품이었다. 장흥의 ‘토공,진공’ 품목은 아니었으나, 현금 방납(防納) 폐해가 컸다. <청금유고>에 언급된, 1618년 장흥부사 ‘박상’에 얽힌 대모갑사건은 “영물 바다거북을 함부로 취급하여 죽게 하면, 결국에 다잉(dying) 파국이 온다.”는 경고성 설화일 것. 1862년경 '장흥 민요(민란)'도 그 대모갑 대납(代納) 폐해로 발단되었다. 요즘에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먹고 죽어가는 바다거북(玳瑁)이 “과연 장흥 바다는 청정한가?”라고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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