臣說送李府令歸國(신설송리부령귀국)[2]/가정 이곡
임금에게 잘 보여 명예는 있더라도
훗날에 사람에게 명예롭지 못하다면
공적이 조롱거리로 비웃음을 당하리.
雖譽於今    不譽於後
수예어금    불예어후
功業之多則有之  不能不取譏於後矣
공업지다즉유지  불능불취기어후의

임금이 효행이 앞장선 백성에게 상을 내리고 선행에 앞선 백성들도 죽백竹帛에 글을 남겨 귀감이 되게 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임금이 친히 기우제를 지냈고, 임금이 친히 농사일을 했다는 선농단도 전한다. 삼국시대에도 그랬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백성들의 안위를 제일 먼저 생각하는 흔적을 많이 찾는다. 임금을 우선으로 하면 그 공이나 업적이 지금 있을 수는 있으나, 훗날 조롱거리 취하지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훗날 조롱거리 취하지 아니 할 수가 없으리(臣說送李府令歸國[2])로 율(律)의 후구인 고풍 배율(排律)이겠다. 작가는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으로 고려 말의 학자이다. 교육에 이바지한 이후 1335년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 휘정원관구,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본국에서 밀직부사,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 도첨의찬성사가 되고 뒤에 한산군에 봉해졌던 인물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비록 임금에서 잘 보여 명예는 있을지라도 / 훗날 기리는 사람이 없어 명예롭지 못한다면 // 그 공이나 업적이 지금 있을 수는 있으나 / 훗날 조롱거리 취하지 아니 할 수가 없으리]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신하 노릇 제대로 하려면2 : 직역문-신하의 말로 이부령의 귀국에 붙여 보내다]로 번역된다. 전구에서는 [비록 임금에게 잘 보였을지라도 / 백성에게 잘 보이지 못한다면 // 높은 지위와 많은 봉급은 가질 수 있겠으나 / 백성에게서 오는 원망은 면하지 못할 것이다]고 했다. 천추의 역사는 후진들에게 늘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직유적인 표현에 문학성은 결여되고 있지만, 교훈성이 높은 점을 감안하여 가르침 또한 적지 않으리.
시인은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미래지향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바르게 처신하라는 가르침 한마디를 던져 주고 있다. 비록 임금에서 잘 보여 명예는 찬연히 있을지라도 훗날 기리는 사람이 없어 명예롭지 못한다면 다음과 같은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는 가르침이다.
화자는 깊은 마음을 담아 두 번째의 가르침을 내보이고 있다. 그 공이나 업적이 지금 있을 수는 있겠으나, 훗날 조롱거리를 취하지 아니 할 수가 없다고 가르친다. 흔히 후대에 지탄의 대상이 되었던 자의 미래 모습으로 부관참시剖棺斬屍란 말을 한다. 후대 사람들에서 비난의 대상은 오히려 부관참시의 경우리라.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임금에게 명예 얻어 훗날 기림 없다면야, 공과 업적 있다하나 훗날 조롱거리 될 것이니’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한자와 어구】
雖: 비록. 譽於今: 명예가 지금은 있다. 不譽於後: 이후에는 명예가 없다. // 功業之多: 공이나 업적이 많다. 則: ~하면. 有之: 있다. [之]는 지시대명사로 앞의 명예를 받고 있음. 不能不取: 취하지 아니 할 수 없다. 강한 긍정이 됨. 譏於後矣: 후에 조롱거리를 받다. 조롱거리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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