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관산(고읍)의 '죽청(竹靑), 고마(叩馬,庫馬,固馬)'를 여몽(麗蒙)연합군의 일본 동정(東征)을 위한 조선소(造船所)로만 여겼을 뿐 그 일대에 대해 조선(造船)과 병참(兵站)의 복합단지 개념으로 넓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전라도 '변산'과 '장흥'에서 각 군선(軍船)을 건조 발진하여, '마산 합포(合浦)'에서 최종적으로 합류 발진하였다. 900척 중에 대선(大船) 300척은 '변산'에서 건조했다니, 나머지 중선. 소선(中船,小船) 등은 '장흥' 등에서 만들었던 셈. 그리하여 '장흥'에 거대한 조선(造船) 병참(兵站) 단지가 생겼을 것. 그렇다면 그 주변 일대는 어떻게 변모했을까?  애초 ‘변산’과 ‘장흥’이 선정된 것은 해안지대에 소나무가 많고, 그릇(瓷器,옹기) 산지릍 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재(船材)용 소나무와 군수용 그릇이 먼저 중요했을 것. 고려청자 전성기에 '탐진현'은 장흥府 관할이었다. '강진'은 조선 초에야 신생된 고을에 불과하다. '부안(변산)' 역시 소나무와 청자산지로 그 명성이 높았다. 그리하여 지금의 용산(上鉢, 남포)과 관산(下鉢, 죽청) 해안, 천관산 주변, 즉 장흥반도 동안(東岸) 일대에 군수병참 복합단지가 마치 신도시 타운처럼 들어섰을 것. 그 東征 전역(戰役)에 따른 조선과 군수물자의 조달장소를 다음과 같이 추론해본다.

<단지 사례> 
군사적 주거지마을 동촌(洞村) - 골몰, 당산 /군마(軍馬) - 고마도(叩馬島,庫馬島), 군마등(嶝) /화살(箭),시누대 ?죽청(竹靑,靑竹) /그릇 가마 - 발(鉢)리, 불당곡, 도작(陶作)골, 용산 풍길 /굽는 소금가마 - 염(鹽)밭등 /쇠가마 - 용산 上鉢 쇠점골, 관산 水洞 수철(水鐵)店 /숯가마 -관산 하발 양촌(陽村) 숯굽지, 따순굽터 /선목(船木), 梨木(배나무) - 梨山谷(배나무 골창), 용산 상발 梨木洞, 용산 松田, 천관산 /조선소- 관산 죽청 배무이(배뭇기), 장환곶(串) 배난끝, 용산 上鉢 배짠골 / 관음방(觀音方)浦 - 관음 기도도량 사찰 포구, 식은(殖恩)포, 수금(水金)포.

장흥에서는 "배를 만들다"를  "배를 묻다"라고 말하며, 기타 '고마, 가마소, 가학, 고막' 등은 ‘부안 鎭西’의 '검모포, 곰소'와도 통할 수 있겠다. 돌이켜, 1270년에 '삼별초 난'이 있었고, 마침내 1271년에 '개경 환도'가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차 東征軍이 1274년에 출발하기 훨씬 전부터 내밀한 준비를 했을 터. 즉 원종(재위1260~1274)때에 '회주(懷州)목' 승격(1265)을 계기로 삼고, 새로 등장한 충렬왕(재위1274~1308)이 본격적인 東征착수를 하였다. (바꾸어 충렬왕 즉위조건은 東征착수였을 것)  한편, 관산(古邑)에 있는 석장승 '진서(鎭西)대장군'을 두고 그 견해가 엇갈리지만, '진서(鎭西)'는 '동정(東征)'에 상관된 개념으로 본다.

일본 東方 征伐을 위하여 西方 고려에 머물던 '대장군(大將軍)' 위치를 표상하는 상징역할을 했다. 마침 그 '鎭西大將軍' 표석은 당시 造船 발진지 또는 주둔지 부근의 전라도 ‘남원’과 ‘장흥’에만 남아있다. 大將軍은 고려 장군 직책이었고, ‘태안 마도(馬島)’에서 발견된, 고려청자를 실은 ‘해저 보물선’에서도 ‘대장군’ 죽간(竹竿)이 나왔었다. 1차 동정 당시 고려군 총사령관 '홍다구'는 '소용대장군', 1273년 탐라정벌과 1274년 1차 東征에 참여한  '나유(羅裕)'는 '대장군'이고, 그 상관 '김방경'은 '상장군'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장군' 대신에 '대호군'이었다.) 당시는 언필칭 ‘征東시대’로 '征東병(兵), 征東선(船), 征東행성(行省)' 등으로 온통 ‘征東’을 말했고, 장흥출신 ‘원감국사 충지(1226~1293)’도 “동정송(東征頌)”을 노래했다.( 당시 ’충지‘ 스님은 한쪽으로 한탄하고, 한쪽으로 칭송하였다) 개인적 의견으로, '鎭西'는 '征東'과 한짝 대비어가 될 수 있다. (또는 '鎭西’의 鎭을 “제압한다.”로 보면, ‘鎭西 삼별초', '征東 일본'의 대응 구도일 수도 있다.) 그 무렵 '오집비(烏集飛)'는 외지인의 대거유입을 가리키는 표현일 수 있는데, 그들로 인하여 장흥 땅은 꽤 시끌벅적했을 것. 그렇게 형성된 東征 특화단지의 인구밀집으로 인하여 장흥 고을에 '13개 다소(茶所)'가 군집하게 되었을 것, 필자 추론이다. 물론 '군수용 곶차(串茶)'도 조달했을 것. 아직 미상이지만, 그 시절 외지에서 유입된 주류(酒類) 제조도 하였을 것이고, 그 주막(酒幕) 단지도 있었을 것.

덧붙인다. 후일 '대파리, 대포리'로 불려진 竹靑(靑竹)은 화살재료 '시누대(신우대, 신호대, 고려 조리대, 설대, 식대, 해장죽)'의 수집과 제작 장소이었을 것. 장흥지역의 '시누대' 산지는 '장흥읍 남산, 평화리 竹峰, 관산 竹靑, 대덕 연지리 관죽전(官竹田, 竹靑)'등이었다. 완도, 능주, 익산, 보령 등에도 竹靑 명칭이 남았는데, 해변 쪽 시누대의 질이 훨씬 더 좋았을 것.  장흥지방을 변모시킨 1274년 1차 東征은 갑작스런 ‘가미카제’ 태풍으로 허망하게 실패했고, 1281년 2차 東征도 다시 실패했는데, 그 2차 東征을 위한 造船 준비는 장흥에서 계속되지 아니하였다. 장작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던 東征의 열기가 너무 쉽게 식고 말았기에 장흥 竹靑에 있던 포구 '관음방浦'가 혹 '식은浦'로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 장흥반도 東岸의 여러 가마터 단지지역은 왜구의 집중적인 노략질 대상이 되었고, 1차 東征(1274)의 백년 후인 1379년경에 급기야 장흥府 치소(治所)는 '나주 철야현' 내지(內地)등으로 110여년 동안 피난살이를 가야했다. 이제는 간척 사업으로 그 해안선 원형이 사라져 버렸으며, 드문드문 ‘날근터’ 지명을 남기고 있지만, 장흥반도의 동안(東岸) 지역에, 예컨대 관산 竹靑 등에 ‘여몽연합군 1차 東征의 출발지’를 알려주는 기념표석이라도 세웠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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