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오지에 선교사로  나갔던 어떤 젊은 목사님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 나라는 가난하고 따라서 문명도 뒤떨어져 있었고 주로 남루한 옷차림에 늘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부부는 언제나 분주하고 헌신적이었습니다.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무엇이든지 생기면, 그들이 돌보는 그 나라의 토속민들이 언제나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느라 아이는 늘 뒷전이었죠. 가지고 싶어도 말할 수 없었고 먹고 싶어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한 마디, 투정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선교사의 자녀는 절대로 선교 사업에 관한 것에 투정을 해서는 안되는 거죠..모든 걸 양보해야 하는 겁니다. 그 것이 그들 세계의 무언의 법칙이거든요. 아이지만, 일찌감치 어른이 되어 모든 욕구를 눌러 참으며 살아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말을 하지 않고 살기로 마음먹습니다. 선교사의  집답게 늘 기도와 찬송 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아이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 배가 고파 돌아 온 아이에게 변변한 먹을 것이 없더랍니다. 겨우 밥만 몇 덩이 있을 뿐이어서 부모는 그 밥을 데워 초라한 찬과 함께 내어 주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아이는 그 밥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었지요. 채 절반도 먹기 전에, 문이 열리며 그 나라의 토속민들이 몰려들어 왔습니다. 물론 배고픈 사람들이었지요. 그러자 부모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기가 먹고 있던 밥그릇을 빼앗아 그들에게 주더랍니다. 그 때 아이는 부모로부터 힘껏 밀쳐져 저 멀리 구석자리로 굴러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거절감인 거죠. 먹고 있던 밥그릇까지 빼앗겨 양보해야 할 만큼 크나 큰 거절감 말입니다. 그 때는 표현할 수 없었지만 부모로부터 토속민보다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버려졌던 당시의 충격은 평생을 따라 다니며 삶의 곳곳에서 불행의 그늘을 만들어 냈습니다. 아이의 무의식 속에 자신을 늘 남보다 천한 자리에 놓는 사고방식이 생겨난 건 당연하지요. 그 것뿐이겠습니까. 역시 무의식 속에 심겨진 물질에 대한, 이유도 근거도 없는 죄의식, 자기는 어쩐지 가지면 안될 것만 같은 이상한 죄책감에 사로 잡혀 마치 소유가 죄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김없이 남에게 내주어 버리는 성격, 행여나 여럿 속에서 선물이라도 분배받을 라 치면 자기는 제일 나중에 제일 못한 것으로, 그 것도 남으면 받고 모자라면 당연히 받지 않는 사람은 자기인, 그런 존재로 살아갑니다. 평생을 받는 것이 불편한 사람, 받는 것이 기쁘지 않고 오히려 불안하고 무감동인 사람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교회의 어린이 반 교사로 일하셨던 분이 계신가요? 혹시 아이들에게 나눠줄 선물이 부족하면 여러분의 자녀의 것을 내놓으라고 한 적은 없으신가요? 여름 성경학교의 간식, 학용품, 심지어 엄연히 자격이 있어 받게 된 상품까지, 모자라면 언제나 여러분 자녀의 것이 당연한 듯 내놓아지지는 않았나요? 그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리 설명해도 어린 아이들은 부모의 상황을 이해할 만큼 성숙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에게 자기는 다른 아이들보다 덜 중요한 사람이라는 서글픈 거절감, 늘 뒷전으로 밀려나야 했던 그 비애만이 남아 있을 뿐이죠.
 혹 이 글을 읽으시면서 그 때는 몰랐던 아이의 슬픔이 느껴지신다면 지금 가만히 미안하다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이가 다 커서 이미 성년이 되었더라도 손을 꼬옥 잡고 진정성을 담아, 눈을 맞추는 따뜻한 사과와 함께 말입니다. 위로는 언제해도 늦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부모의 인정이 세상 전부이듯, 부모의 사과와 위로도 그쯤의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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