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용산면과 관산읍의 경계인 솔치재 23번 국도를 넘으면 옴팍한 분지에 관산읍 소재지에 해당된 옥당리 5개 마을, 죽교리 3개 마을이 아담히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는 관산읍사무소, 관산초·중·고학교, 파출소, 119안전센터, 우체국, 농협, 새마을금고, 천관산시장, 각종 상가 등 행정기관과 상권이 집약되어 있는 관산읍의 중심가이다. 이중 죽교리 3구 학교(鶴橋)마을은 80여호 중, 40호 이상 압해丁氏가 거주하는 집성촌으로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충효(忠孝)를 실천하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학교마을은 상잠산(觴岑山)을 등에 업고 송(松)·백(柏)·죽(竹)이 있는 곳에 화곡촌(華谷村)이라 이름하였다. 1693(癸酉)년 공조참의 익겸(益謙) 정건일(丁乾一 32세, 1615~1694)이 장흥위문의 연봉(蓮峯) 위동규(1600~?)에게 시집온 누님을 뒤따라 보성군 회천면 평장촌에서 현재의 학명재(鶴鳴齋) 아래에 입향(入鄕)하여 터를 잡아 압해丁氏의 300여년 역사가 시작되었다. 풍수설에 의하면 鶴이 북쪽을 향해 날개를 펴고 긴 목을 늘어 뜨려 황태수(송정 모퉁이) 들에 우렁을 파먹고 있는 형국(形局)이다. 鶴의 입이라 할 수 있는 동산에 수백년 된 적송이 어우러져 그곳에 鶴이 운집하여 살고 있었으며, 건너 마을인 죽교리 죽곡(남창) 마을로 고읍천을 건너가는 돌다리가 있어 학교(鶴橋)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傳한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 좋은 산이나 명당은 큰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하여 미리 막기 위하여 그 주맥(主脈)이나 길목을 모두 끊고 정상에 쇠말둑을 박는 일을 할 때 이곳 鶴山의 鶴머리를 끊기 위해 관산읍 신동리로 가는 도로를 개설한다는 명목으로 鶴부리를 잘라 도로 개설을 하였다고 한다.

마을 형국이 鶴이라 하여 동산에 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마을에는 기와집을 짓지 않았다고 전해오나 세속의 변화로 鶴山 등에 비석도 세우고 기와집도 짓는 현대의 풍속을 따르고 있다. 청학귀소(靑鶴歸巢)로 불리던 동산은 1995년 천관산 도립공원 지정을 앞두고 관산읍 우회도로 개설에 따라 장흥대로(23번 국도)에 편입되어 그 형체도 찾아볼 수 없다. 2006년(丙戌)에

세운 화곡정(華谷亭) 주위에 노송 10여 그루가 외롭게 서 있고 주변에 압해丁氏 영광파 세거 흔적을 알 수 있게 표석이 세워져 있다.
또한 마을 앞에 정산아파트(24호)가 들어서서 신구(新舊)의 촌락이 공존하고 있다. 독립운동 국가유공자 명원(明元) 정종철의 아들이자 11대 종손(宗孫)으로 재경 관산읍민회 제3,4대 회장을 지낸 정봉태(1935~ 2002)가 학교마을 태생이다.

◆ 영호정(暎湖亭)은 1782년 영호(暎湖) 정재옥(35세 1722~1810)이 회갑을 기념하여 건물을 지어 문중에 헌납했다. 그 후 문중에서 건물을 관리하여 압해丁氏  큰 사랑으로 불리면서 화수정(花樹亭)이라 쌍액(雙額)하였다. 문중의 회의 장소로 운영하여 오다가 세월의 변화로 현대식 건물로 재건축하여 학교마을 회관과 경노당으로 변모되었다. 또한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과 면암(勉菴) 최익현 선생이 영호정을 다녀가는 등 시인묵객( 詩人墨客)들의 교류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본래는 초가집이었으나 1965년(乙巳) 정부지원사업으로 기와를 얹어 보수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목조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이후 세속의 변화로 30년이 지난 1995년 정부 지원금 20,000,000원과 마을 주민들의 헌성금 등 45,000,000원을 들여 벽돌스라브 36평 건물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호정 팔경>         
- 弟一 상잠효월(觴岑曉月) : 상잠등의 새벽달
- 弟二 영호청풍(暎湖晴風) : 영호정의 맑은 바람
- 弟三 관악청운(冠岳晴雲) :  천관산의 비개인 뒤 구름
- 弟四 소산모운(蘇山暮雲) : 소산봉의 저문 구름
- 弟五 죽포귀범(竹浦歸帆) : 죽청포구에 돌아오는 배
- 弟六 송령초가(松嶺樵歌) : 솔치재 초군의 노래소리
- 弟七 죽천만조(竹川晩釣) : 대냇강의 늙은 낚시꾼
- 弟八 장천폭류(長川瀑流) : 장천계곡 폭포의 흐름
영호(暎湖) 정재옥(丁載沃 1722~1810)

<영호정 팔경>
- 弟一 관악청람(冠岳晴嵐) : 천관산의 맑게 갠 날씨
- 弟二 상봉효월(觴岑曉月) : 상잠산의 새벽달
- 弟三 학포만조(鶴浦晩潮) : 학포의 저녁 조수
- 弟四 마도조하(馬島朝霞) : 고마도의 아침 놀
- 弟五 죽천어적(竹川漁笛) : 죽천의 어부 피리소리
- 弟六 송령초가(松嶺樵歌) : 솔치재 초부의 노래
- 弟七 동차귀범(東   歸帆) : 동쪽으로 돌아오는 돛단배
- 弟八 서암현폭(西巖懸瀑) : 서쪽 바위에 내리꽂는 폭포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발췌

◆ 사성당(思成堂)과 학명재(鶴鳴齋)
관산읍 죽교리 65번지(정남진로 44-69) 상잠산 아래에는 압해丁氏의 제실(祭室) 사성당(思成堂)과 강당 학명재(鶴鳴齋)가 위치한다. 사성당(思成堂)은 공조참의 정건일(丁乾一)의 제실로 1943년(癸未) 창건하여 원래는 관산읍 용전리 만련(柏洞) 마을에 위치했었다.

세월의 변화에 따른 건물 보수가 제기되어 2005년(乙酉) 문중 재원(財源) 일금 150,000,000원을 들여 현재의 학명재 좌측에 옮겨 지었다. 공조참의 정건일 등 이하의 선조 98位 위폐를 봉안(奉安)하고 매년 陰 10월 10일 합제를 모신다.

사성당 백동 중건상량문(思成堂 柏洞 重建上樑文)은 송포(松浦) 정노수(41세 1877~1964) 선생이 찬(撰)하였다.

액호 편액은 경북 성주 태생 극암(克菴) 이기윤(성산人 1891~1971) 선생이 썼다.

학명재(鶴鳴齋)는 교육의 전당으로 1846년(丙午) 창건하였으며, 찬연한 조상들의 학덕(學德)과 인격(人格)을 수양하는 산실(産室)이다. 1926년(丙寅) 문답(門畓) 100여두락의 자산으로 우람한 4칸 와가(瓦家)를 중건하였다.

특히 이곳은 강헌(剛軒) 정병서(40세 1856~1890) 선생을 이어서 송포(松浦) 정노수 선생이 강학하여 유학(儒學), 예학(禮學)의 맥(脈)을 계승하여 왔다. 1990년(庚午) 조상을 숭배하고 후손을 위한 재각과 학당의 공간인 외문, 관리사옥 등 부속 건물을 후손들의 헌성으로 중건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9대 종손 정의(正誼) 정민수(41세 1870~1932) 선생이 찬(撰)하였다.

액호(額號) 편액은 일몽(一夢) 정창한(1882~1953) 선생이 썼다.

외문(外門)은 승유문(承裕門)이라 명명하였다.

<학명 팔경>
- 弟一  증암신월(甑岩新月) : 시루바위 너머에서 떠오르는 달    
- 弟二  금성낙조(錦城落照) : 옥산 뒷산으로 지는 저녘노을
- 弟三  송호매선(松湖賣船) : 송호에서 고기 파는 배                 
- 弟四  죽포조간(竹浦釣竿) : 죽청 포구의 낚시대
- 弟五 상잠월견(觴岑月鵑) : 달 밝은 상잠등의 두견새들
- 弟六 세평상안(細坪霜雁) : 서리 덮힌 가는 들의 기러기 떼
- 弟七 관악모운(冠岳暮雲) : 천관산의 저녁 구름
- 弟八 필봉조하(筆峯朝霞) : 소산봉의 아침 놀

<학명재운 팔경>
- 弟一 사인욕학석인유(詞人慾學昔人遊) : 글 하는 사람들이 옛 사람의 학문의 도(道)를 배우고자
- 弟二 차지기신일학루(此地起新一鶴樓) : 이곳에 학루(학명재) 하나를 새로이 세웠으니
- 弟三 한사의기행조조(寒士宜其行        ) : 청빈한 선비라면 마땅히 그 행실을 독실하게 하여야 하고
- 弟四 제군하하낭유유(諸君何何浪悠悠) : 여기 여러 선비들이야 어찌 세월만 허송하며 한가로이 지내리오.
- 弟五 석양귀객휴송령(夕陽歸客休松嶺) : 석양에 돌아가는 나그네가 송령(솔치재)에 올라 쉬는데
- 弟六 세우어인하작주(細雨漁人下作洲) : 가랑비 내리는 물가에 어부는 고기를 잡는구나
- 弟七 설월풍화운수취(雪月風花雲水趣) : 사철의 뛰어난 경치도 구름가고 물 흐르듯 재촉하고
- 弟八 주옹무사일일한수(主翁無事日閑愁) : 할 일 없는 노옹은 종일토록 한가로이 시름에 젖네.

학명재 차운(次韻)은 물암(勿庵) 백회수 선생이 남겼다.
송포(松浦) 산인(散人) 정노수(41세 1877~1964) 선생이 남겼다.

사성당은 제실 1동, 강당 1동, 외문 1동, 관리사옥 1동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관산읍 용전리 만련마을 임야 15정, 논(畓) 40두락, 밭(田) 5두락으로 학교문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후손 중, 현대의 대표적 인물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앞장선 국가유공자 동화(東華) 정종배(42세 1913~1942)와 10대 종손 명원(明元) 정종철(42세   1916~1948)이다. 정부에서 1990년 8월 15일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밖에 정환수(41세 제2대 관산면장), 정병일(40세 제11대 장흥향교 전교), 정봉태(재경 관산읍민회 3~4대 회장, 대흥정밀 대표), 정영율(의학박사), 정옥태(법학박사), 정완태(농학박사), 정준용(치의학박사), 정선용(문학박사), 정상철(이학박사), 정용문(의학박사), 정인호(의학박사), 정금호(건축공학박사), 정권태(문학박사), 정경은(문학박사), 정민호(철학박사), 정우태(전남도의회 의원), 정현채(육군 중령), 정승영(법학박사) 등 이다
 

              - 환갑 철부지의 꿈 -
                                         泮溪 정종발
     멀리 떠나오고
     잊었는가 했더니
     늦은 봄 아지랑이 처럼
     스멀스멀 아스라히 떠오르네.

     누님 손잡고
     깡총대며 거너던 징검다리
     그 개울가 고향언덕
     보드라운 잔디위로
     꿈의 나래가 펼쳐지네.

     연보라 자색 빛
     넘실대는 자운영 물결에
     노랑나비 흰나비 펼치는
     춤사위는
     환갑의 철부지를 반겨주는
     손짓이라네.

문 : 장암(長菴) 정길태(43세 1938년생 죽교리 학교마을 거주), 반계(泮溪) 정종발(42세 1946년생 학교마을 태생, 서울시 관악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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