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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방촌리 다산사(茶山祠)와 정조대왕 비답(批答)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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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27  11: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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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다산사(茶山祠)는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2번지(방촌길 111-103) 다산嶝에 위치한다.

   
 

존재 위백규(1727~1798)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1902년(壬寅) 소석(小石) 김노현(광산人 1845~1915)선생 등 장흥지역 사림(士林)들의 주도로

   
 

다산재 위에 설단(設壇)하고 단비(壇碑)를 세워 향사해왔다. 이후 1984년(甲子) 안항공파 웅천종중에서 사당을 창건하여 존재선생을 배향하였다. 2003년(癸未) 서계(書溪) 위백순(1737~1815 )선생, 죽오(竹塢) 위도한(1763~1830)선생, 다암(茶嵒) 위영복(1832~ 1884) 선생을 추배하여 4위 위패(位牌)를 봉안하고 매년 陰 3월 15일 지역 유림이 주관한 향사우(鄕祠宇) 제향을 하였다.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부득이 2018년부터 후손들이 주관하는 문사우(門祠宇) 제향으로 전환하였다. 배향된 네분의 행장을 간략히 살편본다.

■ 존재 위백규(26세 1727~1798) 선생 :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으로 영이재공(文德)과 평해吳氏의 장자이다.

   
 

천문(天文)ㆍ지리ㆍ율력(律曆)ㆍ복서(卜筮)ㆍ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96년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대왕에게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1년4개월 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配는 영인(令人) 김해김씨이며 묘소는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 합조이다. 1806년 죽천사, 1929년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 1965년 곡성군 영귀서원(詠歸書院), 1984년 다산사 주벽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존재집(存齋集), 저서에 지제지(支提誌), 환영지, 정현신보(政弦新報),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 총 100여권의 저서(著書)를 남겼다.
■ 서계 위백순 선생(26세 1737~1815) : 자는 자건(子健), 호는 서계(書溪)로 영이재공(文德)과 의인(宜人) 평해吳氏의 사자(四子)이다. 1798년(정조 23)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伯兄 존재선생의 행장을 찬술하고 장려후학 하였다. 配는 수원白氏이며, 묘소는 송현촌 後壬坐原으로 합조이다. 1936년 4권 2책으로 서계유고집이 간행되고 2012년 국역(國譯)으로 간출하였다. 교지 1매가 현존한다.
■ 죽오 위도한 선생(27세 1763~1830) : 자는 슬혜(瑟兮), 호는 죽오(竹塢)이며, 동산공(伯紳)과 장흥任氏의 차자이다. 병계 윤병구 선생이 근찬(謹撰)한 청금공(廷勳) 묘갈명 비문을 종중에서 70여년 소장해오다가 1824년 농안리 화운동 묘소에 선생의 주도로 세웠다. 1825년 장흥위씨 족보 의문에 대해 근지(謹識)하였다. 配는 영광金氏이며, 묘소는 송현촌 后丙向 考塋下 합조이다.
■ 다암 위영복 선생(28세 1832~1884) : 자는 방서(芳瑞), 호는 다암(茶嵒)이며, 도천(道天)과 인천李氏의 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다산재에서 족형 연암거사공(榮璟 1799~1871)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73년 장천재(長川齋) 중수에 농포공(松 1832~1875)과 문중 유사를 맡아 1만여명을 동원하여 4차 중수에 공헌하였다. 1875년 존재집(存齋集)을 간행하여 오늘날의 존재선생이 있게 하였다. 配는 청풍金氏며, 묘소는 冠山 下栢亭洞丁坐이다.

   
 

다산사(茶山祠) 액호와 내삼문 존상문(尊尙門) 편액은 후손 덕운(德雲) 위황량(1927년생)이 썼다. 1984년(甲子) 3월 30일 사당을 창건하면서 내삼문을 세움이 상량문을 통해 확인된다.

다산재(茶山齋)는 삼족당 위세보(1669~1707)선생 묘 아래 아들 영이재 위문덕(1704~1784)선생이 시묘(侍墓)하면서 초건(初建)하고 현판을 석류헌(錫類軒)이라 하였다. 이는 효자는 효자를 낳아 계속 좋은 일을 내려준다는 뜻으로 효자석류(孝子錫類)를 몸소 실천하였다. 이후 1767년(丁亥) 존재(伯珪)선생께서 네분의 동생과 같이 묘우(墓右)에 간곤(艮坤)의 자리를 정하여 재당을 짓고 지명을 따라 다산재(茶山齋)라 하고 후학을 강학하였다. 그후 선생의 증손 경곤(1812~1864)이 종원들과 의논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1902년(壬寅) 장흥의 사림들은 존재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재 위쪽에 단비(壇碑)를 세워 향사하였다. 1950년(庚寅) 3월 상순 선생의 6대손 담헌(淡軒) 필량(1895~1964)이 중건하여 서재를 재실로 변경하고 묘각으로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1970초년까지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5)선생 등이 후손 강학 장소로 사용해왔다. 2002년(壬午) 관리사의 과실로 재당(齋堂)이 전소(全燒)된 후 후손들의 헌성 참여와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년(癸未) 상산(觴山) 위성탁(1926년생)의 주도로 신축하였다.

1)상량문(上樑文)은 1784년(甲辰) 존재 위백규 선생이 찬(撰)하다.
2)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50년(庚寅) 3월 상순 선생의 6대손 담헌(淡軒) 위필량이 존재선생 상량문을 경서(敬書)하고 후기(後記)하다.
3)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51년(辛卯) 산음(山陰) 위 근(1883~1971) 기지(記識)하다.
4)다산팔경(茶山八景)은 1959년(己亥) 10월 김준식(영광人 1888~1969) 선생 찬(撰)하다.
 -제일(第一) 관사모종(冠寺暮鍾) : 천관사의 저녁 종소리
- 제이(第二) 소산제월(蘇山霽月) : 소산봉의 비갠 뒤 뜨는 달
- 제삼(第三) 상잠초적(觴岑樵笛) : 상잠산 나무꾼의 피리 소리
- 제사(第四) 덕호귀범(德湖歸帆) : 덕도로 돌아오는 돛단배
- 제오(第五) 석실숙운(石室宿雲) : 석실에서 자고가는 구름
- 제육(第六) : 석정모연(石亭暮煙) : 석정의 저녁밥 지은 연기 
- 제칠(第七) 연화청풍(蓮花淸風) : 연화대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
- 제팔(第八) 우산반조(雨山返照) : 우산도의 저녁 햇빛
5)화증(和贈) 위사문(魏斯文)자화(子華)귀천관산(歸天冠山)은 1938년(戊寅) 경해(絅海) 송상휘가 근고(謹稿)하다.
6)봉화(奉和) 위사문(魏斯文) 행헌(行軒)은 1938년(戊寅) 홍장해 찬(撰)하다. 부화(附和)는 1947년(丁亥) 산음 위 근 재배근서(再拜謹書)하다. 위 편액 기록물은 2002년 화재로 전소되어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2003년 재당 신축시 7)상량문(上樑文)은 운사(雲史) 위성모(1933~2013) 근서(謹書)하다.
8)외삼문인 계연문(桂蓮門) 상량문(上樑文)은 유헌(裕軒) 위계현(1929년생)이 근서(謹書)하다.

23세 음통덕랑공(동식, 1640~1708), 음통덕랑공(동헌, 1645~1706), 24세 삼족당(세보, 1669~1707)선생, 춘담공(세린, 1673~1741), 25세 영이재(문덕, 1704~   1784)선생, 26세 존재(백규, 1727~1798)선생, 상암공(백호, 1734~1810), 동산공(백신, 1736~1820), 서계(백순, 1737~1815)선생, 죽서재공(백헌, 1742~1783),

   
 

27세 송오공(도립, 1748~1808), 양천공(도급, 1754 ~1821), 호산공(도운, 1759~1815), 도전공(1759~1861), 수재공(도흡 1760~1815), 죽오(도한, 1763~1830)선생, 도영공(1767~1840) 등 17位 가을 시제를 매년 陰 10월 2일 모신다.

   
 

묘소가 대부분 근거리에 위치하여 2002년 화재 前에는 묘역에서 시제를 모셨으나, 2003년 재당 신축후부터 실내에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다산재 액호 편액은 극암(克菴) 이기윤(성산人  1891~ 1971) 선생이 썼다. 첨추헌(瞻楸軒), 외문 계연문(桂蓮門) 편액이 있다. 이중 화재 전(前) 첨추헌, 계연문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다. 현재의 외문 계연문 편액은 2002년 화재시 피해를 입지 않아 기존 건물에서 옮겨 걸었으며, 다산재 액호와 첨추헌 편액 글씨는 2003년 중건하면서 전(前) 편액의 사진을 재현하였다.

   
 

석류헌(錫類軒) 편액은 학정(鶴亭) 이돈흥(영천人, 1946년생)이 썼다.

강당 앞 마당에 위치한 다산사 묘정비(廟庭碑)는 산암(汕巖) 변시연(황주人 1922~2006) 선생 근찬(謹撰)하다. 2003년(癸未) 4월(淸和節) 장흥향중, 안항공파 웅천종중에서 근수(謹竪)하였다.
다산사(茶山祠)는  3칸 사당 1동, 5칸 강당 1동, 내삼문 1동, 단소, 외문 1동, 묘정비 1기, 관리사옥 1동, 의연비 3기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논 45두락, 임야 9정으로 안항공파 웅천종중 소유로 관리 되고 있다.

후손들 중, 현대의 대표적 인물은 위계본(성균관유도회 장흥군지회장), 위계형(장흥 유림), 위용철(1999년 기묘보 편찬 도유사), 위계현(장흥 유림), 위계방(한학자), 위백량(법학박사 일본 오사카대학교 교수), 위추량(물리학박사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 위영희(광주시청 서기관), 위근량(그린내장건설 대표), 위평량(중앙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위상배(경영관광학박사 서정대 교수), 위 등 장흥군의회 의장, 위평환 삼성전자 상무 등 이다.

■ 선공감부봉사 위백규 만언봉사(萬言奉事) 비답(批答)의 원소장처는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존재고택(8대종손 위재현)이며, 현재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 전시되고 있다.

만언봉사(萬言奉事)는 1796년(정조 20) 3월 존재 위백규선생이 정조대왕에게 올린 것으로 입성지명성학(立聖志明聖學)·간보필거현능(簡輔弼擧賢能)·여염치진기강(勵廉恥振紀綱)·정사습억분경(正士習抑奔競)·율탐장금사치(律貪贓禁奢侈)·유구장혁폐정(由舊章革弊政) 등 6개 항목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성학(聖學)을 밝힘으로써 사도(邪道)를 물리치는 것을 근본 사상으로 하여 폐정을 광정(匡正)하고 정치 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며, 저자의 경세적인 면모를 볼 수 있는 자료이다.「대황사간봉사(代黃司諫封事)」는 학교ㆍ문체(文體)·용인(用人)ㆍ군현ㆍ노비ㆍ무선(武選)ㆍ관직 등의 폐단을 들어 시정을 확립할 것을 주장한 내용의 상소문(上疏文)이다.
 

   
   
 

존재 위백규 선생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대한 정조대왕의 비답(批答) ①비답

<해석>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살펴보니 이미 原稿에 考徵한데로 다 갖추어져 그 存한바를 얻었다. 또 對面을 내리어 그 포부를 두드렸다. 들으니 十年동안 硏究하여 만언봉사를 만들었다. 참으로 또한 ②大農에 命하여 紙筆을 支給케 하였노라. 이제 그 文章을 보니 진실로 풍부하고 넉넉하다. 初章의 뜻을 세워 학문을 밝힌다는 아룀은 내가 가상히 여기노라. 내 뜻이 세워지지 않았으므로 백성의 뜻이 능히 한결같이 아니하고 올바른 학문이 밝혀지지 아니한지라 그러므로 邪學이 능히 없어지지 아니하니 내가 反省할 곳이 아닌데가 없으니 마땅히 깊이 體念하리라. 그 二章 보필(輔弼)할 자를 가리되 어진 이를 登用하라는 아룀을 내가 가상하게 여기노라. 사람이 임금을 섬김은 大臣의 責任이다. 가리고 띠처럼 얽힌 것을 발라내고 뽑아 버리듯 林泉에 숨어 있는 어진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나 혼자 생각할 때 오늘의 朝廷大臣들에게 희망이 있다. 三章과 四章과 六章은 말마다 ③개절( 剴切)하여 시폐(時弊)에 절실히 맞으며 ④사유(四維)의 펴지 못함도 近日과 같은 때가 없었고 ⑤국강(國綱)의 不振도 오직 지금일 것이다. ⑥조경(躁競)이 심하여 선비가 날마다 빨리 달려가고 사치가 너무 심하면 ⑦탐풍(貪風)이 날로 성하여 옛날의 떳떳한 法을 회복할 수가 없으니 政治를 비보(裨補)하고 法律을 비호(庇護)함이 손가락을 구부려도 다 헤아릴 수 없어 매양 밤중이면 생각하고 탑(榻)을 돌며 잠을 못자니 스스로 初志를 돌아보건데 얼굴이 붉어짐을 깨닫지 못하였다. 너는 먼 시골 왕래도 드문 곳에서 능히 이같이 理論을 다하니 들음을 구한 것은 利益됨을 求하는 것이다. 삼년동안에 方伯節度使 首領들의 천인(薦人)과 科擧文體가 法則과 같지 아니하면 그 榜目을 삭제하는 일을 朝廷大臣에게 자세하게 復命케 하여 실효성이 있는 말을 계도하게 하였다. 네 나이 七十歲로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단지 환향(還鄕)하기를 허락해 주기 願하니 그 이른바 가고 오면서 듣고 보는바가 무엇이며 천천히 기다려 벼슬을 하라고 한다면 ⑧풍로(馮老)의 부장 벼슬을 끝으로 숨어버린 것 보다 심하므로 一邑의 원으로 任命할 것이니 축적(蓄積)된 經綸을 施行하도록 하라.

①비답(批答) : 왕이 대신의 상주문에 의견을 써서 회답한 것임. ②대농(大農) : 관부의 명칭으로 장관을 말함. 당대 호조판서로 지금의 재무장관을 말함. ③개절( 剴切) : 아주 알맞고 적절함. ④사유(四維) : 나라를 유지함에 필요한 네가지 수칙 즉 예의염치(禮義廉恥). ⑤국강(國綱) : 나라의 기강. ⑥조경(躁競) : 마음이 거칠어 양보를 하지 않음. ⑦탐풍(貪風) : 욕심을 내는 풍속. ⑧풍로(馮老) : 이름은 풍당(馮唐)으로 한나라 안능人, 관(官)은 文帝 때 중랑서장 이었는데 武帝 때 賢良에 천거되었으나 나이가 九十歲로 벼슬하지 못하고 그 아들에게 낭(郎)을 임명(任命)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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