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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징검다리호담칼럼
관리자  |  ch230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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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9.06  1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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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반양반”댁과는 유난히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었다.그 댁의 “아짐”이 용반리가 친정이어서인지 택호가 용반양반인 그 댁은 감나무가 참 많았다.
단감나무, 봉옥시, 꾸리감 등 20여그루의 감나무는 해거리도 없이 열매가 많이 열었다. 그 시절 감은 푸르고 떫을때도 목젖을 오르 내리게 하는 먹거리였다.
간식이라고는 없는 시절이어서 떫은 감도 우려서 먹으면 그렇게 맛 있을수가 없었다. 용반양반의 감나무중 단감나무와 봉옥시는 가지들이 무성해서 우리집 뒤뜰까지 가지가 뻗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뒷뜰로 달려가 간밤에 떨어진 감을 줍는 재미를 누리기도 했다. 여름이 저물어 갈 무렵이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단감이 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 감들을 주으면 어찌나 신이 나든지 형과 나는 늦잠을 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달랐다. 우리보다 아침 잠이 없으신 아버지는 떨어진 감들을 주어서 흙 담장의 이엉에 나란히 올려 놓는 것이었다 그렇게 올려 놓은 감은 우리 형제가 손을 댈수가 없었다.
“우리 집으로 떨어졌다고 우리 감이라냐. 놈의 것은 꿈에라도 손대서는 안되는  것이어야” 우리는 그 맛있어 보이는 감들을 올려다 보면서도 손을 댈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바른 처신만큼이나 이웃인 용반양반도 경우 있는 이웃이었다.
아침밥을 먹고 나면 어김없다 싶게 용반양반이 우리 형제를 부르기 때문이었다.
“아그들아 감 가져 가그라” 그 때는 아버지도 말이 없으셨다. 그리고 말씀하시었다. “놈의것 몰래 주어서 묵는 것보다는 맛있재 ..”

어느 해에는 아버지와 용반양반 두분이 마을 앞의 개울에 징검다리를 보수 하시었다. 그 징검 다리는 홍수만 나면 유실 되어서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다니기에 불편한 곳이었다. 특히 겨울에는 발을 벗어야 하고 누구에게나 어려웠다.
우리 형제는 가끔 동원 되어서 작은 돌멩이를 나르는 일을 도와야 했다.
“아부지 왜 우리하고 용반양반만 일을 한다요?” “울력 부치기에는 하챦은 일이고 느그 아부지가 기운이 좋은께 해노먼 안 좋것냐”
감나무로 해서 더욱 다정한 이웃인 아버지와 용반양반의 처신과 삶의 방식은 나의 내면에 지워지지 않은 철학으로 새겨져 있었을까.

성인이 되어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근무하게 된 곳이 고향의 면사무소였다.
그래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민원인들은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었다.
그 당시는 공무원들이 제법 대접받는 시절이기도 했다. 적당히 군림하고 과시해도 민원인들의 묵시적인 양해가 형성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알만한 어른들이 “김주사”라고 호칭 하면서 살뜰하게 대하는 것이 기분 좋기도 했다. 점심때가 되면 누군가가 다가와서 괜챦은 식당으로 끌고 가는 것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책상 서랍에 넣어 주는 담배 보루를 챙기는 것도 재미였다. 퇴근 무렵이 되면 술자리도 많아 졌다. 술, 밥을 얻어 먹는 일이 마치 공무의 연속인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출퇴근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만나는 어른들이 알은체를 하면 자전거 위에서 인사를 하고 지나 치는 것이 당연한 일인 듯 몸에 베어 가고 있었다.
때로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저녁에 곡식이나 과일 잡곡을 싸들고 집으로 찾아오는 이웃들도 있었다.
어찌 보면 소소하게 관청에  얽혀 있는 일들이 그들에게는 부담스럽고 성가신 일일 수 도 있었다. 그 과정을 챙겨줄 수도 있는 “김주사”에게 빈 손으로 오지 않는 소박한 인심이 은연중 우쭐함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으셨다.
이윽한 세월이 지난 후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김주사”대접을 하면서 민원을 도움 받은 이웃들... 과분한 술, 밥을 대접한 이들에게 “찹쌀” 한 말씩을 자전거에 싣고 갚으러 다녔다는 것이었다.
유난히 “차나락”농사를 많이 지으면서도 찰밥이나 찰떡을 하지 않았던 연유, 공무원인 아들의 처신이 행여라도 빌미가 될까 싶어 찹쌀로 갚음을 대신 하신 우리 아버지. 언젠가  아버지에게 궂이 그러실 필요가 있었느냐고 여쭈어 보았다.
“아야 너 용반양반댁 감을 주어 묵을때 어짤때가 더 맛있고 속이 편하드냐?
   일생을 놈의것 얻어 묵고 신세 짐스로 사는것이 편하것냐. 베풀고 사는것이 잠자리고 밥자리고 다리 뻗고 살것냐. 니가 담배 한 보루 얻어 피운다 치자. 그 담배 한 보루가 무슨 짐이 될지 누가 알것냐. 그 때 가서 이이쿠야 해도 늦은 것이어야. 그라니 으짜것냐 내가 살었을때 만이라도 아들 앞 뒤 처신에 걸린것이 없이 해야재.
마치 유훈처럼 당부하던 아버지의 말씀은  공무원 생활의 지표로 남아 있다.

 민감한 업무와 민원을 처리해야 하는 경우에 문득 한 호흡을 하면서 생각하는 것은 용반양반의 담장 이엉에 가지런히 주워 놓은 아버지의 감들이었다.
우리집 뒤뜰에 떨어진 감일지라도 일단은 주인에게 보이고 이웃의 정리로 받아서 먹어야 옳다는 아버지의 처신. 그 유년 시절의 생활 철학은 심연에 잠재해 있는 지워지지 않은 힘이었다. 그리고 치기어린 아들이 공무원이 되어서 받은 대접을 “찹쌀”로 갚음 하신 아버지의 단호함을 한치도 어길 수는 없다는 은연중의 각심, 그것이 지금까지 명예로운 공직자로 처신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에게는 연고가 있다. 개개인의 삶의 영역을 형성하는 사회, 친인척 그리고 가족들이다. 그들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곧 우리와 나의 영역을 파괴하는 일이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공직자이거나 사회인인  “우리”를 부패로부터 지키는 일은 가족, 친인척 사회가 “나”에게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당연하고 상식적인 처신인 것이다.
공직자로써 우리에게 “힘”이 있다면 궂이 울력을 하지 않고도 징검다리를 보수 하는 용반양반과 아버지의 “힘 씀”의 일화를  기억해 보자.
그래서 우리들이 가진 힘으로 이 땅의 처처에 징검다리를 보수하는 아름다운 사례를 만들어 갔으면 하는 소망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행복과 더불어  살만한 세상을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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