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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송촌리 평촌마을 광산김씨 유천재(柳川齋), 형제송(兄弟松)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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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30  10:0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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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관산읍 송촌리 2구 평촌마을은  관산읍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3.5km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40여가구 중, 20호가 광산김씨, 장흥위씨 12호, 나주나씨 5호, 김해김씨 2호, 기타 4호 등 이다. 이곳 마을의 광산김씨는 원래 1515(乙亥)년에 지암(止菴) 김 훤(金 暄, 1475~ ?)

   
 

선생이 함평군 학교면 도화동에서 방촌리 새터(新基)마을의 남동쪽 방향으로 300미터에 위치한 비래嶝 아래 돌정지에 입향(入鄕)하여 터를 잡고 살다가 현 장소로 350여년 前에 이주함이 전한다. 이후 1932~1935년 제3대 고읍면장 계은(桂隱) 위대량(1884~1951)이 주도한 마을 앞 유천농장 간척사업으로 300두락의 농토가 조성되고, 1972년 대평마을은 송촌3구로 분구되어 오늘에 이른다. 2000년 후손들은 돌정지 비래嶝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광산金氏 유허비(遺虛碑)를 근수(謹竪)하였다.

마을 입구 건너편 외동리 75-1번지, 23번국도(장흥대로 1433)변에 정남진농협쌀공동사업소(RPC)가 위치한다.

   
 

마을 앞에는 수령 250년이 된 정자수 느티나무가 자리를 잡아 마을의 수호신 마냥 버티고 서 있으며, 마을 뒤 밭에는 수령 250여년 된 형제송의 자태에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서쪽은 방촌리, 북쪽은 대평마을, 동쪽은 외동리 어은마을과 각각 경계된다.

● 유천재(柳川齋)는 관산읍 송촌리 575번지(평촌길 32-35)에 위치한다. 방촌리 산저마을 뒤 천관산 성조골에서 흘러내려온 물줄기가 보전등산(일명 보밭등)아래 허세비골 개천을 통과한 끝 산자락 아래 복곡(福谷)에 자리하고 있다.
 

   
 

하천(河川)이 있어 유천재라고 함이 전해진다. 이곳은 입향조 지암(止菴)의 8세손 김광흡(金光洽, 1684~1752)이 1735년 세운 서실(書室)이다. 아들 초은(樵隱) 김진필(金震弼 1716~ ?)은 父 김광흡을 유천재 좌측에 안장(安葬)하고 삼년상(三年喪)을 묘전숙거(墓前宿居) 하였다. 호야당(乎也堂) 김최열(金?烈 1816~ ?)은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 문하에서, 소석(小石) 김노현(金魯鉉)은 연암거사(蓮庵居士) 위영경(1797~1871)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널리 알려져 뜻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여 여러 문장가들을 배출하였다. 이후 방촌마을 태생 계사(桂史) 위혁기(1858~1940),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9)은 1958년까지 이곳에서 유교 경전을 강학하였다.
건축물은 초옥(草屋)으로 내려오던 것을 1960년 4칸, 관리사동, 외문 춘일문을 신축 및 재중수(再重修)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陰 10월 15일 지암(김 훤) 등 40位의 제향을 봉행한다.
 

   
 

유천단(柳川壇)은 1946년 소석 김노현 선생의 덕의문장(德義文章)을 추모하고자 오헌(梧軒) 위계룡 선생 등 14인의 향의가 제발하여 장흥향교의 답통을 받아 재실 뒤에 유천단을 설단하였다. 소석(小石) 김노현과 호남의사 치재(痴齋) 김영엽(1869~1910)을 배향하여 매년 陰 2월 18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

○ 김노현(金魯鉉) : 1841~1915, 자는 공범(孔範), 호는 소석(小石)이다. 대사성(大司成) 김성옥(聲玉)의 후손으로 화오 김최엽의 아들로 1841년(헌종 7년)에 평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연암거사공 위영경(1797~1871)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연재(淵齋) 송병준에 집찬(執贊)하여 성취하였다. 사서(四書) 오경(五經)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고 특히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지은 책을 힘써 익히고 이를 늙어서도 강독하였다. 칠순(七旬)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였으며 오직 영민(英敏)하고 빼어난 제자를 길러 내는데 즐거움을 삼으니 公의 문하에서 위계룡(魏啓龍),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크게 대성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다산재(茶山齋)에서 거처하면서 항상 존재 선생을 우러러 그리워한 나머지 단(壇)을 쌓고 2월 보름이면 창주(滄州) 고사(故事)에 따라 제사를 모시면서 부시(賦詩) 윤강(輪講)하는 규례(規例)를 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 김영엽(金泳燁) : 1869∼1908, 자는 여회(汝晦), 호는 치재(痴齋)로 김의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호용(好勇)이 있었다. 족숙 소석 김노현 선생에게 수학하고 이후 송사 기우만 선생에게 배웠다. 을사, 정미변란 뒤에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남에 이르러 전남지역의 각 의병진에 출입하여 계책을 세워 협조하였다. 1907년에 호남창의 맹소를 세움에 있어 기삼연, 김준등 의병장과 합세하였으며 같은 해 의병 50명(총기 40정)과 더불어 장성, 순창에서 일어났다. 1908년에 남평 거성동 접전에서 능주, 나주, 영암의 세 곳에서 공격해오는 왜병과 싸워 70여명을 사살하였다. 10년 전열 정비를 위해서 장성, 백양사에 유진(留陣)하던 중 내부에 숨어든 반적에게 살해당했다. 공이 돌아가신 뒤 부인 수원백씨는 삼년상을 마치고 공을 따라 자결하였다. 1985년 정부의 도움으로 의사의 묘역정화사업이 진행되고 묘비를 제막함에 이르렀다. 장성군민은 의사를 추모하여 장성읍 남산공원에 의적비를 세워 추모하고 있으며 정부에서는 1980년에 대통령표창장을 추서하였다. 그때 향리에서는 직계자손이 살 수 없어 타지로 분산되어 살고 있으니 후예들이 받은 박해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광주광역시 포충사에 배향되었다.

   
 

경내의 액호 편액은 극암 이기윤(李基允 성산人, 1891~1971)이 썼다.

   
 

유천재기는 1960년(庚子), 1961년(己丑) 불초손 永洪이 근술하다.

유천재 중수기 김준식(金駿植 영광人, 1888~1969) 謹記하다.

   
 

유천재 중수기는 1897년(丁酉) 행주 기우만 謹記하다.

   
 

유천재팔경 김준식(金駿植 영광人, 1888~1974)선생이 撰하다.

◆ 유천재 팔경(柳川齋 八景)
-제일(第一)  관산모종(冠山暮鍾) : 천관산의 저녁 종소리
-제이(第二) 근포귀범(金浦歸帆) : 금당도로 돌아가는 돛단배
-제삼(第三) 소산제월(蘇山霽月) : 소산봉에 떠오르는 비갠 뒤의 달
-제사(第四) 금산낙조(錦山落照) : 금산에 비친 저녁 노을
-제오(第五) 한천목적(寒泉牧笛) : 참새꼴 목동의 피리 소리
-제육(弟六) 우산조연(牛山朝烟) : 우산의 아침 연기
-제칠(弟七) 덕호낙하(德湖落霞) : 덕도 앞 바다의 저녁 노을
-제팔(第八) : 석정모우(石亭暮雨) : 돌정지의 저녁 때 내리는 비

   
 

유천재 술회 1904년(甲辰) 소석 김노현 稿하다.

유천재에는 액포 편액 2점, 유천재기 2점, 유천재 중수기 2점,  유천재팔경 1점, 유천재 술회 1점 등 총 8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유천재는 재실 강당 1동, 유천단,  관리사 1동, 외문(春日門) 1동, 유천재 유래비 1기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논 25두락, 임야 40정 가량으로 평촌종중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평촌마을 광산김씨 후손 중, 현대의 인물로는 김천두(화가), 김용선(서화가), 김길중(법무부 서기관), 김현중(초등학교장), 김찬중(조달청 서기관), 김선두(화가, 중앙대교수), 김선일(화가, 건양대교수), 김선동(법무부 서기관), 김선국(예비역 중령), 김동욱(변호사) 등 이다.

방촌의 장흥위문과 평촌의 광산김씨는 깊은 인연(因緣)이 있다. 연암거사공(28세 榮璟 1797~1871, 장흥향교 齋長)으로부터 다산재(茶山齋)에서 강학 받은 제자는 소석(小石) 김노현 선생으로 죽천사(竹川祠)의 강당 양춘재 액호 편액을 써서 남겼다.
또한 선생은 다산재와 유천재에서 칠순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여 오헌 위계룡(魏啓龍), 송포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이중 수제자(首弟子)는 방촌리 출신 오헌 위계룡(1870~1948)이다. 1946(丙戌)년 장흥향교 직원(현 典校) 단강(丹江) 위경규(1887~1947, 유치면 단산 태생)선생과 오헌(梧軒) 위계룡 선생의 주도로 14명의 유림들이 각 고을 향교의 답통(答通)을 받아 유천재 내에 유천단(壇)을 세우고 예(禮)를 갖춰 오늘날까지 유림들이 향사하고 있다.

   
▲故 소천 김천두선생

한국문인화의 거장 소천(小天) 김천두(1928~2017)선생은 다산재(茶山齋)에서 다초(茶樵) 위복량 선생에게 서예를 익히는 등  지난 날 장흥위문과 광산김씨 간 인연이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형제송은 관산읍 송촌리 720-2번지 평촌마을 뒤 정자등(嶝) 밭 가운데 해송 소나무 2그루가 있다.

-나무의 수령(樹齡) : 270여년 -보호수 고유번호 : 15-12-2-6 -지정년도 및 관청 : 1982년 전라남도
-유형 : 정자목 -수종 : 해송 -수고(樹高) : 23m -나무둘레 : 3.8m

   
   
 

평촌마을 광산김씨는 1515년(乙亥) 지암(止菴) 김훤(1475~ ?)이 함평군 학교면 도화동에서 방촌리 새터마을 남동쪽 방향 300여미터에 위치한 돌정지에 입향하여 터를 잡고 살았다. 이후 8세손 괴정(槐亭) 김광흡(1684~1752)의 2세손 때 화재로 마을이 소실되자 마을의 평온과 수호를 기원하면서 나무를 심었다고 傳한다. 해송 2그루가 의롭게 하늘을 향해 우뚝 서 있어 "형제송"이라고 불리고 있다. 나무 아래에는 지석묘群(54평)을 이루고 있어 인근 방촌리 새터마을의 삼괴정(三槐亭) 내 느티나무 보호수와 유사한 정자목 유형을 이루고 있다.<전라남도>
 

- 형제송 소천(小天) 김천두-

村後老松(고향 마을 뒤에 있는 소나무)
落落長松閱機(낙낙장송열기)
靑靑銳葉貴蒼天(청청예엽귀창천)
鬱鬱繁枝能弊日(울울번지능폐일)
堂堂高節鎭村(당당고절진촌)

落落長松(낙낙장송) 몇 年(년)이나 되었는고
靑靑(청청)한 銳葉(예엽)이 蒼天(창천)을 관통했네
울창히 뻗은 가지 능히 해를 가리고
당당한 高節(고절)은 마을을 편안케 하는 구나

자문 : 남정(南亭) 김이중(1936년생, 평촌마을 거주), 김선일(화가 1961년생, 서울시 송파구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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