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Episode 2
 일본인 ‘안중근 의사 연구가’ 츠르게 사토시(津留今朝壽)
2016년 일본 구마모토현에 발생한 지진은 그 지역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재일민단 구마모토현 본부의 회관도 무너져 내렸다. 구마모토 지역에 거주하는 재일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민단 본부 회관의 피해는 교민들에게는 큰 아픔이었다.
재일 민단 조직이 동원되어 회관 신축이 논의 되었고 한국정부의 지원과 일본 전역의 교민들이 성금을 모아 회관을 신축 하였다. 그렇게 신축된 회관은 ‘한일문화교류쎈터-구마모토로 명명하였고 교민들의 친목과 연대의 공간으로 한,일간의 민간 교류와 한류문화 보급의 공간으로 그 기능과 역할을 확대하여 운영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2018년 9월10일 ‘한일문화교류쎈터-구마모토’ 신축 준공식이 예정되어 있었고 필자가 대표로 있는 ‘한일문화친선교류시민모임’이 주관하는 준공 축하 공연이 9월11일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 전날인 9월10일 저녁에는 구마모토 시내에 소재한 호텔에서  현지 교민 관계자, 현지 ‘일한친선협회’회원, 구마모토  시(市) 현(縣)의 고위 공무원 정치인‘문화 시민단체 대표 등 300여명이 모인 ‘전야 리셉션’이 있었다.
리셉션의 식전 행사에 ‘특강’의 순서가 있었고 강사는 ‘츠르게 사토시’라는 일본인이었다.
특강의 주제는 ‘한국의 풍운 남아 안중근’이었다. 이런 연유로 필자는 ‘츠르게 사토시’를 만날 수 있었다.
‘츠르게 사토시’ 그이는 전형적인 일본인이다. 1944년 구마모토현 아소군 다카모리에서 출생 하였다.
1968년 일본 문부성 지원의 일본청년해외협력대원으로 선발되어 아프리카 케냐에서 2년간 활동하며 해외 문물에 관심을 갖기 시작 했다. 그 후 시민단체,지방정치 참여 등 활발한 활동을 하던 츠르게 사토시는 1975년 일본 외무성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대일(對日)의식 조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 하여 많은 이들과 접촉 하고 개인적인 교류 관계를 만들어 간다.
그 당시 설문중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항목이 있었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이순신, 안중근, 김구를 꼽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윽히 놀라게 된다.
거명된 위인들이 전부 일본의 대동아공영과 식민사관 조선을 침탈한 군국주의에 항거 하는  역사와 연관된  인물들이어서였다.
그 중에서도 안중근은 일본에서는 ‘테러분자’, ‘바보 안중근’, ‘국수 우익분자 안중근’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인이 가장 존경한다는 대답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츠르게 사토시’는 안중근에 대한 자료를 찾아 읽고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 했다. 특히 안중근이 자신과 같은 천주교 신자였다는 사실에 끌렸고 연구 할수록 안중근의 용기와 철학과 역사관과 평화이념의 진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현재 ‘츠르게 사토시’는 일본 큐슈 지역에서 가장 열렬한 안중근 전도사로 활동 하고 있다. 한일문화 교류쎈터-구마모토 회관에서 매월 1회의 안중근 관련 강의를 시작으로 하여 매월 둘째 토요일은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안중근 깊이 알기 강의를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OB메스컴과, 재일 한국 교육원, 로타리, 라이온스 클럽, 대학교 시민단체의 초청을 받아 안중근 강의를 하고 있다. 심지어는 일본의 우익단체에 초청 되어서도 야유를 들어가며 안중근 강의를 하는 용기를 보여 주고 있다.
안중근을 좀 더 깊이 알기 위해서 ‘공판 속기록’을 100여번 넘게 읽었고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체포된 안중근이 수감된 중국의 감옥에도 거의 100여회 이상 찾아가 그 현장에서 관찰하고 묵상하며 옥중의 안중근의 심정을 읽고 싶었다는 ‘츠르게 사토시’ 그이는‘천주교도 안중근’ ‘시야카 기행’(임진오랜 당기 조선에 귀순한 일본 무사 ‘김충선’의 후손들이 사는 곳 ‘난민 문제와 일본의 역할’등의 저서를 집필 간행 하였다.
‘츠르게 사토시’의 안중근 전도의 열정은 오는 11월6일 구마모토에서 주목 받을만한 행사로 준비 되고 있다. 김황식(안중근의사숭모회장, 전 국무총리)와 교토 지역 등에서 안중근 연구를 하는 일본인 학자들과 안중근을 주제로 하는 대담 학술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재일한국민단구마모토현본부가 지원을 하고 있다.
이 행사는 최근의 한,일 관관계를 상관 하지 않고 예정데로 개최될 예정이라고 한다.
현재 한일간의 시국을 상관하지 않고 일본에서 안중근을 조명하는 당찬 학술행사를 진행하려는 이들의 노고와 역사관이 돋보인다.
동아시아와 세계 전역에 한국인의 항일 정신과 기개를 확실하게 각인시킨 안중근의사가 순국하고 그의 혼령은 중음신처럼 떠돌아야 했으나, 1955년 장흥의 죽산안씨 가문과 의인들이 의사의 위패를 모셔 제사를 모신 것은 오래 계승 되어야 할 사안이다.
‘안중근 의사의 항일 구국 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국내최초 유일의 사당 행동사, 그 특별한 주제에는 특별한 Episode들과의 연계가 이루어 져야 주목을 받을 것이다.

Episode 3

중국 대륙을 진동시킨 안중근의사의 의거
-중국 지도자들의 찬사와 추모

전기한바와 같이 필자는 2018년 11.14-19일간 중국과 러시아의 안중근루트 조사단으로 참여 하였다. 그 일정 중 11월17일 오후3시경에는 중국의 도시 ‘하얼빈’에 소재한 안중근의 기념관을 견학 하였다. 1950년대 건립 개관된 ‘조선족예술관은 하얼빈을 포함한 이 지역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는 문화 역사관이라고 했다. 근무하는 이들은 조선족의 2-3세였으며 박춘희 관장을 비롯한 직원들의 자부심이 언행에서 보여지고 있었다.  2006년 이 조선족 예술관의 1층을 안중근의사 기념관으로 개관한 이후 현지의 중국인들은 물론 한국의 관광객들이 필수 코스로 포함 되어 많은 이들에게 민족적 자긍시믈 갖게 하는 장소라고 했다.
우리 일행들이 박춘희관장과의 대담 시간을 갖고  전시물과 추모 기념 공간을 견학한 후에 짧은 자유 시간이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서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간행한 ‘안중근 연구’라는 제목의 도서를 팔고 있어서 한권을 구입 하면서 조선족 여직원과 대화을 할 수 있었다.
“이 기념관에 중국인들도 많이 오는가요” “그러믄요. 굉장히 많이 옵네다. 학생들도 단체로 견학 하구요. 글고 우리들은 하얼빈시 공무원입네다. 이 기념관은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흑룡강성과 하얼빈시에서 경제적으로 지원 하기 때문에 운영은 끄떡 업슴네다. 글고요. 안중근 의사는 중국의 유명한 지도자들이 위인으로 평가 하고 있어서 자랑 스럽습니다”. 여직원의 아주 빠른 설명을 대강 메모 하면서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존경과 찬사를 하였던 중국 지도급 인사들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다.

원세개의 애도시
청(淸)나라의 북양대신으로 유명한 이홍장(李鴻章)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전할 당시의 권력자였다. 그는 일본에게 패전한 이후 “섬나라 후배인 이등박문”으로부터 갖은 조롱을 받은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는다고 한탄 하였다고 한다.
원세개는 젊은 나이에 이홍장의 눈에 들어 조선땅에 파견 와서는 갖은 행패를 부려 우리 역사에서는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한 원세개도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순국을 찬양 애도하는 시를 한편 남겼다.
“평생에 할 일을 단숨에 끝냈네/죽을 곳에서 살기를 도모하면 장부가 아니지/삼한 사람으로 태어나 만방에 명성을 드높였네/백년을 사는 이 누가 있을까 죽어 천년을 살리라/(平生營事只今畢/死地圖生 非丈夫/身在三韓名萬國/生無百世死千秋.)

중국의 국부(國父) 손문(孫文)의 송축시
손문, 그이는 중국 근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지도자이다. 손문 역시 안중근 의사의 순국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송축시 한 편을 남겼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쳤나니/백년을 살 사람 누가 있을까 죽어서 천추에 드높이리/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그래도 처지를 바꿔 놓으니 이토도 죄인일세/(功蓋三韓名萬國/生無百歲死千秋/弱國罪人强國相/繼然易地亦藤候

당대의 중국지성이던   양계초(梁啓超)의  흠모시
양계초는 당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던 문필가로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었다.
양계초가 안중근 의사를 흠모하여 지은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폭풍이 야수마냥 울부짖고/싯누런 흙 모래 대지를 휩쓸 때/흑룡강 연안에 눈보라 휘날리고/북극의 엄동설한 살을 에는데/그 사나이 지척에서 발포하니/정계의 거물이 피를 쏟았네/대사(大事) 끝내고 웃음소리 터지니/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마냥 빛나네/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사마천이 안자(晏子)를 추모하듯 그대를 공경하고/내가이 세상을 떠나면/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게 되리.”

주은래(周恩來)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 의 흠모의 언행
주은래는 중국 공산혁명의 가장 탁월한 지도자로 인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주은래는 “중.일 갑오전쟁 후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중·조(中朝)인민의공동투쟁은 본세기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를 격살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천명하였다.
특히 재미있는 일화는 주은래와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남긴 그의 부인  덩잉차오(鄧潁超)는 어린 나이인 1910년에 공연된 ”안중근과 이토“라는 창작극에서 굳이 안중근 역을 자청 하였고 남장(男裝)으로 분장 하여 안중근 역을 훌륭하게 소화 하였다고 한다. 이 연극은 주은래가 지시하여  무한과 장사에서 순회 공연을 하였다. 어쩌면 안중근 의사를 존경한 주은래는 연극의 주인공 안중근역을 맡은 여배우에게 반했고 그래서 결혼까지 이르지 않았을가 하는 추측이 되기도 한다.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휘호
장렬천추(壯烈千秋)는 오래도록 중국인들에게 회자 되었다.

청말(淸末)의 사상가였던 장태염(章太炎)의 휘호

장태염은 “아시아 제일의 의협남아(亞細亞第一義俠)”라는 휘호를 썼다. 그러면서 그는 이토의 죽음을 비아냥거리는“조 이등박문(弔 伊藤博文)“이라는 시 한편도 남겼다.

이등박문은 백정과 같은 인물로 제아무리 세도를 부려본들 도랑을 떠난 미꾸라지 신세가 제격이 아니겠는가 하는 내용이라고 한다.

▪ 중국의 군벌 장학량(張學良)의 안중근 의사 선양
 중국의 군벌 장학량은  1927년 동북에 36개소의 모범소학교를 세우고  각 학교에 매일 수업 전  교가와 안중근 노래를 합창 하라고 지시 하여 안중근 의사를 선양 하였다.

메모 하기가 조급 하도록 빠른 설명으로 안중근 의사와 중국의 지도자들 과의 일화를 들려준 기념관의 여직원은
“ 그 뿐이 아닙네다. 당시 중국에서 펴내는 신문마다 안중근 의사를 찬양 하고 흠모 했지요‘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대답 하였다.
“아 그랬군요. 굉장 합니다. 자랑스럽구요. 그 안중근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이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장흥군에 있습니다. 한번 오셔요. 안내해 드릴게요.”
 필자 또한 당당하게 그녀와 안중근의사를 논하는 반열에 설 수 있었다.

 Episode 4
부산광역시 남구와 공유하는 안중근의사 스토리

민주평통장흥군협의회와 민주평통부산광역시남구협의회는 오래전부터 자매의 결연을 하고 상호 교차 왕래 하면서 통일의 주제,산업,역사,문화,축제를 공유 하는 교류를 하여 왔다. 2019년에는 3월29일-30일간 1박2일 일정으로 부산 남구 협의회 박종건 회장을 비롯한 자문위원 24명이 장흥을 방문 하였다.
장흥군 협의회에서 마련한 일정중에 해동사 참배가 포함되어 있었다.  해동사 참배는 부산 남구의 자문위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남녁의 한 농촌에서 일찍부터(1955년) 안의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는 의로운 행위가 우러러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정을 마치고 돌아간 남구 협의회에서 아래 내용의 자료를 보내 왔다.

-부산광역시 남구 지역신문 기사 인용-
“지난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9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국권이 회복되는 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안 의사의 유해는 행방을 알지 못해 그의 묘는 남과 북 어디에도 없는 실정이다.
 이에 반해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 안성녀(安性女) 여사의 묘가 백운포 천주교공동묘지에 방치된 지 45년이 되었다. 독립운동의 `객관적 물증'이 없어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현충원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어서다.
 1881년 태어난 안성녀는 오빠 안중근보다 두 살 아래로 안 의사가 하얼빈 의거을 일으키자 일제의 보복을 피해 중국으로 도피했다. 1921년 함께 망명길에 오른 남편 권승복 선생이 숨지면서 타국 생활은 더욱 힘겨워졌고 일제의 눈을 피해 어린 외아들 권헌을 데리고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新民府)의 본부가 있던 중국 길림성 인근 석두하자(石頭河子)로 피신해 오래 시간 머물렀다.
 아들 딸린 어머니이자 미망인으로 안 여사는 군복 수선이나 독립자금 모금, 문서 전달 같은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펼쳤다고 한다. 일본 헌병에 끌려가 독립군의 은신처를 대라며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유랑생활 도중 중국 북경에 도착했을 때 "안중근 의사의 여동생이 왔다"는 소식을 접한 중국 관료가 가족이 정착해 생활할 수 있도록 인쇄소와 양재점을 무상으로 차려주기도 했다. 인쇄소를 운영하며 생활하던 중 우연히 라디오를 통해 해방소식을 접한 안 여사는 그 즉시 모든 것을 뒤로하고 가족을 데리고 부산행 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아들 내외와 손자 권혁우(75·현 광복회 부산남부연합지회장)를 데리고 35년 만에 조국 땅을 밟았다.

 흩어졌던 가족을 만나기 위해 부산을 거쳐 서울로 간 안 여사는 김구 선생의 도움으로 서울 쌍림동에 거처를 마련했지만 6·25가 터져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 왔다. 부산시의 도움으로 영도구 신선동에 거처를 마련해 생활하다 1954년 4월 8일 지병과 노환으로 숨을 거둔다. 유족들은 인근 청학동에 여사의 묘를 세웠는데 그 자리에 부산체육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1974년 이곳 용호동 천주교공동묘지로 옮겨 왔다.

 여사가 세상을 뜬지 65년, 용호동 천주교묘지에 묻힌 지 45년이 흘렀다. 지금에 와서 그의 독립운동을 밝혀줄 자료가 새삼 나올 리 만무하다. 안 여사의 독립운동은 2006년 숨진 며느리 오항선 여사(1910.10∼2006.8)가 했던 일부 증언이 전부인 실정이다. 오항선 역시 일제강점기 김좌진 장군 밑에서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이름 높은 애국지사다. 여성으로 드물게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돼 현충원에 안장됐다.

 안 여사의 항일운동 여부를 떠나, 가녀린 여성의 몸으로 일제의 보복을 피해 일평생 낭인처럼 타국을 유랑하며 고된 삶을 살아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총칼로 항거하는 것만이 독립운동이라 단정할 수 없다.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개념을 좀 더 넓게 보는 국가보훈처의 전향적인 자세가 대단히 아쉽다.“

우연 하게도 장흥군의 ‘ 안중근의사 위패를 봉안한 해동사’의 스토리는 지역적인 연고와 연계 되면서 그 외연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 그리고 궁금한 사안이 대두 되었다. 안중근의사의 가족들. 부모 형제 자녀들의 행적은 어찌 되었을까. 작고한 가족들의 무덤은 조성되어 있을까. 기제사는 봉양되고 있을까. 해동사는 이러한 궁금증과 혹은 안타까운 사연의 중심 공간의 역할로 그 정체성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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