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향(義鄕)을 유행가처럼 쉽게 말하는데, 義鄕을 내세우지 못할 고장이 어디 있으랴? 보성 義鄕과 장흥 義鄕의 실상은 어떠한가? 역사적 상황이 엇비슷한 처지임에도 그 특색이 분별될 수 있을까? 마침 정유재란 때 '장흥府 회령포 향선10척'을 두고 일부 보성사람들 오해가 깊은 것 같아, 다시 살펴본다. 1598년경 백의종군 도중에 삼도수군통제사 직첩을 받은 李충무공의 재기는 鄕船 10척이 모인, ‘장흥 회령포’에서 시작되었다. 1598년 7월 중순경 ‘원균’의 칠천량 대패로 시작된, 서쪽 피난선 쓰나미 물결이 장흥 바다에 밀려들 때, 8월 중순경 ‘장흥 회령포’에서 운명의 대반전(大反戰)이 시작되었다. 모두들 쥐떼처럼 西쪽으로 몰리던 피난 와중에 장흥선비들이 뱃머리를 돌렸다. 더 이상 쫒길 수 없다, 李충무공을 중심으로 뭉치자는 자발적 회항이었다. 李충무공이 통제사로 취임하던, ‘장흥 회령포’에서 장군과 의병들은 서로 격려하고 대오와 전선을 정비하며 마침내 일어섰다. 10척 해상의병들은 다시 전선에 승선한 충무공을 따라 9월 중순경 명량해전에 참전하였고, 일부는 순사하였다. ‘장흥 회령포’ 회합은 칠천량패전 후 한 달 째이고, 명량대첩 시점의 한 달 전 무렵으로, 그 ‘장흥 회령포’는 대반전의 디딤돌이요, 변곡점이었다. 그런 회령포가 있었기에 나중 명량 승전도 있었을 일. ‘장흥부 회령포’에서 시작된 명량 승첩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를 재확인하였다. ‘장흥 회령포’에 모였던 의병들 명단은 <마씨가장(家狀)> <연경재 독부충의전(督府忠義傳)>에 나오며, 그들
존재는 <장흥읍지 정묘지(1747)>와 <장흥향교 사마재 제명록>에서 확인된다.

1) 주촌 마하수(馬河秀,1538~1597) 장흥마씨, 1564년 무과출신 은퇴자, 전직 선공감주부, 그 아들이 마성룡, 마위룡(초계 변홍원의 사위)이다. <정묘지 안양방>에 나오며 ‘안양 학송’ 출신이다. 명량해전에 참전 순사.
2) 송호 백진남(白振南,1564~1618) 수원백씨, 善鳴, 1590년 진사, 그 부친 ‘백광훈’은 1564년 진사로 장흥 안양방 출생, ‘백광훈, 백진남’ 父子는 <정묘지, 장흥 사마재 제명록>에 나오며, ‘백진남’에 대해 ‘영암 이거’라 기록했다. 명량해전에 李충무공 참모로 참전했다. (일부 보성기록은 ‘백진남’과 ‘백선명’을 서로 다른 사람인양 오해하였다)
3) 달문 김성원(金聲遠, 1567~ ) 광산김씨 시중공파, 秀巖, 그 부친 김극수, <정묘지 부서방>, <사마재 제명록>에서 확인된다. 1603년 진사, <변국간 행장>에도 나온다. 명량 참전
4) 해은 문영개(文英凱,1565~1620) 남평문씨, 휴암, <정묘지 천포방>에서 확인된다. ‘읍청정 문위지(1532~1610)’ 아들들로 ‘3남문형개,4남문홍개,5남문여개’등도 참여했다. 명량 참전
5) 월계 변홍원(卞弘源) 초계변씨, 장흥 안양방 출신, 명량 참전, 그 후 지포해전에 형제들(변홍제, 변홍량)들과 순사하였다, <정묘지 안양방>에 나오는 초계변씨 일문은 대부분 ‘변국형,변국간,변국경’ 3형제의 자손들이다.
6) 태형 김택남(金澤南) 광산김씨. <정묘지 웅치방>에서 확인된다. 그 부친 ‘김정’은 1555년 진사로, <사마재 제명록>에서 확인된다. 명량 참전
7) 동강 임영개(任永凱) 장흥임씨, 사화, 그 부친 ‘임주(任‘水+頭’,1558~ )‘는 1591년 생원, ‘보성 이거’로 <사마재 제명록>에서 확인된다. 명량 참전
8) 제암 정명열(丁鳴說,1566~1627) 영광정씨, 그 부친은 ‘반곡 정경달’, <정묘지 장동방> <사마재 제명록>에서 확인된다. 명량 참전. 1606년 문과, <마씨가장>에 없으나, <연경재 독부충의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들 해상의병 특색은 장흥의 향촌사족(士族) 일문이 참여했다는 것. 빠져있는 장흥위씨와 영광김씨 등은 당시 육전(陸戰)에 참여하고 있었다. 가칭 ‘족보자료관’이라도 있으면 당시 참여자 파악이 쉬울 터인데, 장흥사람 조선감 ‘김해김씨 김세호(金世浩)’도 궁금하다. 여기서 유념할 몇 사정이 있다. ‘義鄕 장흥’이라 해도 그 ‘義鄕 장흥’이 역사적 별호(別號)는 아니었다, 1982년경 신계우 군수 시절에 작명되었는데, 그도 그때는 ‘동학혁명’을 ‘동학난’ 국난으로 대했다. 나아가 당시 묵묵히 노를 저었던 무명(無名) 해상의병들을 기리는 ‘해상 의병 백비(白碑)’도 ‘장흥 회령포’에 세워봄직하다.

이하, 일부 보성 쪽 사람들의 무모한 주장을 반박한다. 그들은 오직 ‘관광 보성’에 매몰된 채 ‘의향 보성’을 종속적 수단 가치로 취급하는 것 같다.

1) 그들은 “현 보성 군학리(군영구미)에 ‘회령포 10척 향선’이 모였다”고 고집한다. 그들은 ‘회령폐현의 구(舊) 회령포’와 ‘임진난 훨씬 전에 옮겨 신설된 장흥부 회령포’를 부러 혼동하며, <조선왕조실록>을 외면한다. 또한 ‘현 보성 군학리 해변’과 ‘장흥 안양 해창 포구’를 분별 못하는 수준이다.
2) 그들은 “보성사람 ‘김명립’이 그 리더로서 향선10척 집결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1571년생 김명립은 그 참여한 기록조차 없다. 정작 그 집안에서도 내세우지 아니한 사정인데, ‘노(魯)모 창작해설사’가 함부로 비약 유포하고 있다. 그 보성 군학리에 가서 ‘김명립 비석’을 한번 읽어보라. ?
3) 그들은 ‘당대지명’과 ‘현재 지명’을 혼동한다. 조선시대 내내 장흥 땅이었던 ‘회천, 웅치, 천포’가 1914년경에야 보성에 이속되었음에도 마치 정유재란 당시에 벌써 ‘보성 땅 보성사람’인 양 분식(粉飾)한다. 현재의 회천(회령, 천포)에 의 일부 성씨의 지손(支孫)들이 남아 있을지언정 그 당대는 물론이고 현재도 본가 본향은 장흥에 속함에도 그런 엉뚱한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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