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방 오방이 장흥 지명에 어떻게 나타날까? 순우리말, 이두어, 한자훈(訓) 음(音)을 혼성하는 사례가 많다. 방향 지시어는 우리 생활에 밀접하다. ‘앞(前)은 南쪽’, ‘뒤(後)는 北쪽’, ‘왼쪽(左)은 東쪽’, ‘오른쪽(右)은 西쪽’이 됨은 우리말이 북방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사정을 말해준다. 동서남북은 바람 방향에도 있다 '새,東', '하(하늬),西', '마,南', '노(높),北'이다. '샛마파람'은 동남풍, '높새바람'은 북동풍이다. "샛바람 불면 어로를 중단하고, 갈바람 불면 준비한다."고 한다. 또한 고대 장흥을 지칭한다는 "고마미지"의 '고마'를 ‘곰(熊),감(神)’이 아닌, '北,後'로 보는 소수의견도 있다. 훗날 장흥지방을 "南北 百里"로 불렀는데, 옛 기록에는 ‘西41리 아서鄕', ’東32리 회령廢縣', ‘東北 41리 장택廢縣', ’東60리 장릉院', ‘北45리 비자枝院'이 있다했다. 예양강을 기준한 汭東 汭南이란 말도 있었다. 방촌 사람 위백규'에게 천관산은 '西山'이며, 충청도 덕산에서 '北學'을 배웠다. 상금 사람 '백진항'은 월출산 원주 이씨村에 '서유(西遊)'를 했다. 요즘의 '정남(正南)진' 역시 정남쪽에 착안한 홍보용 지명이다. 한편 보림사 3층 쌍탑(雙塔)을 ’南北搭‘ 또는 ’東西塔‘으로 부르는 혼선도 이제는 정리해야할 부분이다.

1) 南쪽 방향(前,앞,아래) - 고유어 '마파람'은 南風으로, '마'는 '남(南)'에 대응한다. 서울 南山은 우리말 '마뫼'이고, '南'은 "앞(前)쪽, 아래, 밑쪽"을 가리키며, "남다(남餘),나무(남木)"등 한자訓의 소리값과  통한다. 동물 마(馬)는 일곱째 간지 오(午)와도 통한다. 그리하여 南쪽을 표기함에 있어 '南, 馬, 午, 木, 餘' 등이 조합된다. 넷째 천간 丁도 南쪽 방향이니, '丁火所'도 혹 그런 南쪽 방향에서 왔을지 모른다. /馬ㆍ오(午)< 용산 오도치(午,梧道峙) 남쪽으로 난 가마길 고개 / 馬, 南, 맞(마주)< 馬梁(良)ㆍ馬島/ 南 <나무木 <강진 木里ㆍ, 木浦ㆍ/ 南끝 <안양면 목단(木端) / 남, 남을 餘 < 안양면 여암(餘巖)은 <조선지지>에 “南岩, 南바위”로 나온다. / 아래(앞)가야 <아라 가야 (한편 장흥선비들이 南字를 취한 號로 ’南계,南파,南호,南곡,南치,南강,오南,학南,초南' 등이 있다)?

2) 東쪽 방향(새, 사이, 서, 쇠) - 고유어 '샛바람'은 東風으로 '새'는 '동(東)'에 대응한다. '날이 새다'의 '새'도 된다. 그 '새'를 한자어 '새(new) 新' 또는 '새(bird)鳥, 새鳳, 새鶴' 등으로도 받았다. '해가 돋다'에서 온 '돋, 돈, 東'도 있다./ 한자어東 <안양 東계,東촌 / 새 <새(東)구미, 쇠끄미 <용산 金谷, 관산 新동(동쪽 마을) / 돋(돈) <東?돈두(豚頭 <東頭) 마을 (용산 금곡 출신의 진사 '이복연'의 호 東谷 역시 그 출신지 '금곡, 쇠끼미'에서 왔을 것.)

3) 西쪽 방향(하늬, 갈) - 고유어 '하늬바람'과 ‘갈바람, 가을바람’은 西風을 말한다.(봄바람은 東風이다)/ 西쪽 재 <하늬 재 <한재< 하늘재(天峙) <회진 신상리 한재(하늘 재) / 장흥 지방에서 西쪽을 뜻하는 지명사례는 드물다. 장흥 향토사에 부평방(장평) '갈령(葛嶺), 갈고개'는, ‘갈라지는 고개’도 되지만, 혹 '보성 쪽에서 보아 西쪽에 있는 고개'일지 모르겠다.

4) 北쪽 방향(後, 뒤) - 고유어 '된바람, 쎈바람, 뒷바람, 높바람'은 北風을 말한다. '뒤'는 북쪽을 뜻하며, 한자어 '後, 北'으로 받았다. /높새바람(北東풍) <높새바람(高鳥풍,<정약용,탐진어가>) /뒷골(後洞), 뒷들(後坪), 뒷재(後嶺) / 뒷잣 <北잣 <장동 北子리 / 뒷잣<용산 계산 동백(된북,돈북) / 갓뒤 <가지 뒤 <관산 枝北 / 뒷골 <관산 농소 '뒷골,後谷' (北은 ‘북鍾’과 통하여 장평 북교리 北洞은 한때는 ‘鍾洞’이었다)

5) 가운데, 중간(사이 中, 가운데) - 한자어 中은 '중간 중심'을 뜻하며, 이두식 훈독으로 '해(가운데 해)'이다.  그 中을 같은 소리값의 한자어 '중(仲),승(僧), 시루 증(甑)'으로 받기도 한다. 中은 또 '내(안內), 속(솝,속裏,裡), 안쪽'과 상통한다. 전북 익산(이리)의 옛 이름 '솜리'도 <솝리<속리(內,中,裏,裡)에서 유래할 수 있다. / 가운데中 <관산 남송 中沙(중새, 중간 사이, 또는 店사)/ 관산 성산 中山, 안양 지천 中山, 안양 비동리 中골, 장평 제산리 中구(仲區)/ 中촌(村) < 가운데뜸/ 中곡(谷)< '중실, 중골' / 어떤  '중골(谷),중산골'은 '점(店)골< 즘골'에서 변이한 경우도 있다. 예컨대 '가마店,옹기店,사기店,독店,솥店,쇠店,놋店' 등의 점(店)이 중(中)으로 변하는 것./ 中보(洑) <중간에 있는 洑/ 中<승(僧)? 중뫼,중山 <승(僧)山/ 中<시루 증(甑)? 증산(甑山, 甑沙)

6) 상하(上,下)표시 - <장흥읍지 정묘지,1747>를 보면, 각 면(面)방(坊)이 '상도(上道), 하도(下道)'로 구분되어 있고(예컨대, 고읍(古邑)방의 반촌 '방촌'도 '下道'에 속하고 있다.), 또한 '상촌(上村), 하촌(下村)'으로 구별된 마을이 있다. '上금곡, 下금곡/上대야, 下대야 /上운계, 下운계 /上금장, 下금장/上도청,下도청'등이다.  이때 '上下' 구별은 邑面坊 소재지와의 상대적 거리 또는 성촌(成村)시점의 선후에 따른 편의적 구별로 여겨진다. 일각에서 오해하듯, 그 지명에 “下”가 따른다하여 일부러 ‘비칭(卑稱) 하대(下待)’ 취급은 아니었고, 이미 <정묘지>에 그런 호칭이 있었던 것이지 달리 일제 당국이 의도적 차별을 한 것은 아니다. 일제기 또는 후대에 이르러 ‘上,下’ 구별 호칭이 등장한 사례도 있으나 그 경우도 의도적 비칭(卑稱) 또는 민촌(民村) 취급은 아니었다. (마을지명에서 ‘내,외(內,外)’는 다음 기회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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