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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3) - ‘龍泉’인가, ‘龍泉寺’인가?예강칼럼(83)/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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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16  10: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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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랑시인 김삿갓(1807~1863)이 남긴 詩, "과(過) 보림寺"가 있는데, 그 특유의 풍자 해학詩는 아니고, 이른바 인생詩이다. 시비(詩碑)도 세워졌는데, 그 詩에 나온 "보림간진 용천우(寶林看盡 龍泉又)"의 '龍泉'을 두고 '함평 용천寺'로 받아들이고 만다. 예컨대 "보림寺를 다 보고 용천寺에 다시 오니", 또는 "보림寺와 용천寺를 두루 돌아보니"라고 옮겨 버린다. 김삿갓이 ‘강진’에서  출발하여 '함평 용천寺'를 거쳐 '보림寺'에 왔다거나, 또는 그 반대로 갔다는 식으로 주장한다. 과연 그러한가?  의문이 계속 생긴다. 그 시제(詩題)가 "過보림사"인데도, 그렇게 찾아 하룻밤은 묵었을 ‘보림寺’에서 굳이 '함평 용천寺'를 언급한단 말인가? 그럴 필요가 있다면 그 시제(詩題)를 달리 하거나, 그 '용천寺'에 가서 '용천寺' 詩를 따로 쓰면 족한 것 아닌가? '강진, 함평(해보), 장흥(유치)'을 잇는 행로에 비추어 보림寺와 용천寺를 연결함은 꽤나 비효율적 여정이다. 그렇게 여행했음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정황도 없기에 그가 실제 '함평 용천寺'로 갔는지 여부도 알 길 없다. 작시(作詩) 배경기록도 없으며, 그는 앞의 詩,"과(過) 보림寺"에서도 단지 '龍泉'이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필자 의견이다. 그 龍泉은 '함평 용천寺'가 아니고 '보림寺 龍泉'에 해당한다. 보림寺의 ‘약수 고정(藥水 古井)’ ‘藥泉’을 '龍泉'이라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살펴본다. 보림寺 창건은 애초 ‘龍’에 연관되었다. 창건 연기설화 또는 전설에도 '용연(龍淵), 용소(龍沼), 용담(龍潭), 용녀(龍女)'가 등장한다. 그 龍女가 스스로 걸어 나온 '龍淵, 龍沼, 龍潭' 등과 김삿갓이 지칭한 龍泉은 상호의미적 맥락이 닿는다. 그런 ‘용(龍)’ 연관성은 다른 문인들의 보림사 詩文에도 등장한다. "용거유허(龍去遺虛), 구룡연(九龍淵), 노룡(老龍), 신룡연(神龍淵), 용리구굴(龍離舊窟)"등이 언급된다. 그 창건설화와 전설은 이러하다. "九龍이 살고 있던 ‘龍池 연못’을 메꾸어 조성한 寺地에 사찰을 세웠다, 당시 쫒겨난 九龍 중에 白龍은 적대세력이었고, 靑龍과 龍女는 우호세력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 사찰 마당에 남아있는 '용천(湧泉) 약수터'가 그 龍池 흔적이다”는 것. 또한 ‘물(水)’과 ‘못(淵, 池, 潭, 洑)’ 연관성을 보더라도 그렇다. "용연(龍淵), 용소(龍沼), 구룡淵, 구룡洑, 신룡淵, 담굴(潭窟), 방지(方池), 사지 구위담(寺址 舊爲潭)"과 "고정(古井)"등이 보림사 詩語로 반복되었다. ‘옥봉 백광훈’의 詩에 등장한 '수각(水閣)'에 '보림사 약수터(藥泉, 古井)'가 있었으니, 훗날의 방문객 김삿갓은 그때 보림寺에서 드디어 ‘藥泉 古井’을 마주쳤을 것. 그 古井은 비자나무와 茶나무 숲에서 시작된, 내내 마르지 않는 샘으로 ‘용천(湧泉) 약수’라 불려졌다. 요컨대 지친 방락객 김삿갓은 절 주변의 '비자나무 숲 寶林'을 눈으로 보고, '절 마당 약수터 藥泉 古井'을 입으로 겪었을 것. 그 병든 몸에 藥水 한 사발로 갈증을 달래고서 드디어 “龍泉”이라 말했을 법하다. 그래서 "보림간진 용천우(寶林看盡 龍泉又)" 문구를 통하여 "보림寺 寶林과 보림寺 龍泉도 다 보았다"고 말한 것 아닐까? 여기서 '보림(寶林)'은  '보산림(寶山林), 보수림(寶樹林)'으로 지칭되며 그 명성이 높았던, 보림寺의 비자나무 숲을 가리킨다. '간진(看盡)'은 "이제 다 보았다, 이제 다 맛보았다"는 의미이다. 그럼에도 그 보림寺에서의 ‘寶林看盡’과 '龍泉看盡'에 얽힌 역사적 현장성을 간과하고서 만연히 '함평 용천寺'로 비약 오해하게 된 것.

- 기왕에 ‘용녀(龍女)설화’를 보자. 용녀는 ‘선아(仙峨), 매화(梅花)보살, 괴화(槐花)보살, 신녀(神女)’라고도 불렀다. 이는 영주 부석사(浮石寺) 의 '선묘(善妙)' 설화와 언뜻 유사해 보이나, 일부 차이도 있다. '부석사 선묘(善妙)'는 '해수(海水)관음신앙' 화신으로 의상대사(625~702)가 당나라 유학시절에 만난 주인집 딸이었다. 그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바닷길을 뒤따라와 내내 ‘의상대사’를 수호했다. 浮石寺 창건 시에도 善妙가 도와주었으며, 浮石寺에는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보림사 龍女' 선아보살은 선종(禪宗)을 체득하여 귀국한 ‘보조선사(804~880)’를 가지산 현지에서 도와준다. <보림寺 寺記>에 의하면, 아홉 마리 九龍이 살고 있는 연못에 신부(神符)를 던져 쫓아냈는데, 거기에서 걸어 나온 龍女가 '보조선사'에게 절을 하며 살 곳을 마련해 달라한데서 사찰을 지었다는 것. 나중에 따로 사당(祠堂)을 만들어 龍女 화상(畵像)을 모셨다. 훗날 1722년경에 보림寺를 방문한 '담헌 이하곤(1677~1724)'은 그 방문당시에 보게 된 畵像에 대해 "근일에 엉성한 장인이 그린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그 화상을 모신 사당을 '괴화당(梅花堂)' 또는 '신녀사(神女祠)'라고도 했다. 보림寺 대웅전을 복원하고 그 마당을 정리하던, 현광(1935 ~2007) 스님의 중창불사 이전에는 '외호문, 사천문'을 지나서 옛 ‘대적광전’에 이르는 길옆 우측 숲속에 다 쓰러져가던 오두막, 작은 한 칸 건물로 있었음을 나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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