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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2), 대적광전, 대웅전’예강칼럼(82)/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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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8.08  16:5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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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山에 보림寺가 있어 ‘가지山 보림사(寶林寺)’이기에, '가지寺'라 병칭(倂稱)할 법도 하지만, 되짚어볼 사정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정묘지(1747)>는 "보조선사비(碑)를 언급한 보림寺"와 "김극기(金克己) 詩를 언급한 가지寺"를 마치 서로 다른 사찰처럼 따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 시절 '태고 보우, 이색'은 '가지寺'를  말했고, 조선 시대에 조계종 자복(資福)寺로 '장흥 가지寺'가 지정되었다. '박상(1474~1530)'은 '보림寺, 가지寺'를 함께 말했고, 백광훈(1537~1582)은 '보림寺'로 불렀는데, '임제(1549~1587)'는 '삼보전(殿), 구룡연(淵)'이 있는 '제일총림 가지寺'를, '안유신(1580~1687)'은 '비액(碑額),영불(靈佛),신룡연(淵)'이 있는 '장흥 가지寺'를 말하였다. 1722년 방문객 '이하곤(1677~1724)'은 '보림寺'로 불렀다. 이에 의문이 남는다. 혹 '가지寺'와 '보림寺'는 한때 따로 있었던가? 아니면, 구분해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었을까? (‘古가지寺’가 계곡 안쪽에 있었다는 주장도 물론 있다) 기록에 남은 첫 방문객, 고려 명종 때 '김극기(金克己)'가 쓴 “가지寺” 7언詩에도 의문이 있긴 하다. 현(現) 보림寺 표징인 '보조선사비(碑), 비로자나철불(鐵佛), 3층 쌍탑'에는 침묵하고, 주변 풍광과 용당(龍堂)만 언급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現 보림寺 도량(道場)의 대전(大殿) 배치를 보더라도 그 의문이 커진다. 즉 '대웅전'과 '대적광전'이 나란한, 이원적 大殿 형식이기 때문이다. <보림寺사적기(記), 중수중창記>에도 '古법당(古불전), 新법당(新불전)'과 '東, 西 법당'이 이원적으로 등장하고, 1722년 방문객 이하곤(李夏坤)은 “층각으로 된, ‘古법당, 新법당'과 철불 비로상이 있는, ‘구전(舊殿)’을 목격했다”고 했다. 또한 現 보림寺의 동선(動線)은 '대웅전'이 아닌 '대적광전' 쪽으로만 집중되었다. 해탈문과 사천왕문은 '대적광전'에 닿는 길이고, 그 끝에서야 우측으로 꽤 떨어진 '대웅전'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대적광전'과 '대웅전'이라는 병립체제로 경합(競合)되었을까? 돌이켜 장흥 보림寺는 종파(宗派)적으로 중첩된 전통을 계승했다. 애초 화엄승 '원표' 대덕(大德)이 759년에 창건했던 ‘가지寺’를 859년에 헌안王(재위 857~860)이 선종 선사(禪師) '체징(804~880)'을 초빙하면서 개창(改創)한 것. 100년 된 화엄사찰이 갑자기 선종사찰로 바뀌어졌고,  883년에는 선종 법맥의 정통성을 부여해주는 '보림寺' 사호(寺號)를 하사받았다. 그런데 '체징'을 초빙하기 전에 이미 착수하였다가 '체징'의 이거 후에 완성한 '화엄본존 비로자나 鐵佛'을 그 자리에 계속 모셨던 것이니, 원래 가지寺의 화엄전통에 나중 보림寺의 선풍(禪風)이 포개졌던 것. '비로자나佛'은 화엄종의 본존불이며, '용연(龍淵), 선아(梅花), 구룡(九龍)' 전설과 '장생표주(759)'는 화엄사찰 가지寺 창건에서 연원한 사정들이다. 반면에 '체징 禪師‘는 870년에 헌안왕 명복을 비는 원탑(願塔) 삼층쌍탑을 세웠고, 그 입적(880년) 이후에 '보조선사 창성탑(883), 보조선사 창성탑비(884)'가 세워졌으며, 아울러 꿩이 날아든 ‘치래(稚來)전설과 龍女(神女)설화’를 남겼다. 한편 선종(禪宗) 종지에 투철한 입장이면 '불상이 있는 佛殿'을 배격하고 '불상이 없는 法堂' 체제라야 하는데, 한국 禪宗은 석가佛을 '대웅전'에 수용하고, 비로佛도 '법신 증명불'로 수용했다. 이에 그 ‘비로나자 鐵佛’ 역시 '체징'의 시대에도 여전히 존숭되었을 것. (그런데 現 3층 쌍탑과 석등에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 위치와 간격이 꽤 옹색한데서 '대적광전' 건물과의 조형적 균형성이 깨뜨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풍수론자는 "수구막이용 비보塔이라 조밀하게 배치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조밀한 쌍석탑 + 작은 대적광전 + 큰 비로자나 鐵佛'은 서로 엇나간 3박자라 할 것. 그 雙塔은 그 작은 건물 앞쪽에서, 그 鐵佛은 그 작은 건물 안쪽에서 옹색해졌다.) 여기서 필자 의견을 보태본다. '화엄종, 선종' 전통이 혼재된, 現 보림寺는 크게 보면 '보림寺'이나, 좁게 보아 한때 '가지寺 대적광전’과 ‘보림寺 대웅전'의 이원체제로 병립했던 것은 아닐까? 現 보림寺처럼 '대적광전'과 '대웅(보)전'이 대전(大殿)으로 양립(兩立)함은 아주 특이한 사례다. '하나의 사찰에 는 하나의 大殿이 통례적 원칙’이기에 한국 사찰에서 '비로자나佛'을 모시는 방법은 다양하다. 합천 해인寺는 ’비로나자불‘을 '대적광전' 주불(主佛)로 모시며 '대웅전' 자체를 따로 두지 않았다. '대웅전‘에 ’석가佛'을 먼저 모신 사찰이면 '비로佛'을 '비로전'에 배치한다. 또한 구례 화엄사와 나주 불회사는 '비로佛'이 오히려 '대웅전'을 차지했다. 이에 화엄사의 ‘석가佛’은 ‘대웅전’이 아닌 '각황전'에 따로 모셔졌다. 요컨대, '대웅전 석가佛'과 '대적광전 비로佛'이 각 대전(大殿) 주존으로 양립한, 現 보림寺 사례는 이례적이다. 종합해보면, 장흥 보림寺는 883년의 보림寺 사액(賜額)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전통의 이중적 혼재로 인하여 부득불 이원적 大殿체제로 전승된 것 아닐까? 그리하여 조선 초에도 '가지寺 대적광전'과 '보림寺 대웅전'으로 병립하다가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점차 “가지산 보림寺”로 수렴된 것 아닐까? <정묘지,1747>에 ‘보림寺 /가지寺’가 따로 기록됨은 그런 이원적 전통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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