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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죽교리 장흥위씨 죽천사(竹川祠)문화탐방/栢江 위성록 이야기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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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29  10:4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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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본 사우는 관산읍 죽교리 418번지에 위치한다. 원래 1688년(戊辰) 지역유림 100명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달량진사변(達梁津事變) 때 순절한 장흥부사 한 온(청주人, 1511~1555)과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선조를 90일간 걸어서 의주(義州)로 찾아가 배알한 호성공신 청계(聽溪) 위덕의 선생을 배향한 사우이었다.

   
 

당시에는 솔치재 아래에 세웠고 명칭도 충렬사였다. 1689(己巳)년 후손들과 장흥의 유림들이 장흥읍 충렬리에 충렬사를 건립한 후 한 온의 신위를 옮겨감에 따라 청계 선생만 독향(獨享)하게 되면서 "竹川祠" 라고 했다. 그 후 1797(丁巳)년 관암처사공 위상정(26세 1732~1799, 청계선생 5대손)의 헌성과 희사로 대대적인 중수(重修)를 하였다.

이후 1806(丙寅)년 임진왜란 때 功을 세운 선무공신 공조참의공 위덕원, 호성ㆍ선무공신 호조판서공 위덕화, 갑자ㆍ정묘ㆍ병자호란 때 功을 세운 청금(聽禽) 위정훈, 병조참판공 위정철, 반계(磻溪) 위정명, 실학자 존재(存齋) 위백규 등 6위를 추배하였다. 1868(戊辰)년 사원 훼철령으로 철거된 후 1898(戊戌)년 옛터에 설단(設壇)하여 제향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관산과 용산 간의 솔치재 도로가 나게 되자, 1929년(己巳) 7월 22일 춘헌 위계반(31세 1848~1939, 청계선생 10대손) 선생의 주도와 7현조(顯祖) 각 종중(宗中)에서 기금을 마련하여 죽교리 상잠산 아래 현 위치로 옮겨 3칸 건물로 신축하였다. 주벽 청계 위덕의 선생을 중앙에 이하의 선조분들을 좌·우측에 모시는 소목식(昭穆式)의 7현조(顯祖) 위폐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陰 9월 상정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

배향된 인물의 행장을 살펴본다.

■ 청계 위덕의(21세 1540~1613년) 선생 : 자는  而遠, 호는 聽溪로 성균진사공(鯤

   
 

1515~1582)과 의인(宜人)광주李氏 사이에서 차자로 태어났다.
1573년(癸酉)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장흥(長興)에서 선조(宣祖) 임금이 계신 의주(義州)까지 90일간 걸어와 배알(拜謁)하였다. 선조가 귀경한 후 公에게 영남(嶺南) 운향관(運餉官)을 제수하여 소임을 다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605년 호성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사후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 안동권씨, 진원박씨이다. 묘소는 관산읍 죽교리 양춘재 옆 상잠산 자락이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으며, 1974년 광주시 대촌동 황산사(黃山祠)에 배향되었다. 교지 1매가 현존한다.

■ 공조참의공 위덕원(21세 1549~1616) : 자는 善長이다. 참의 전(?)의 아들, 통선랑 진수(晉秀)의 손자이다.
왜란(倭亂)이 발발하자 公은 권율(權慄)의 진영에 들어가 功을 세웠다. 훈련부정(訓練副正) 등을 지내고 1605년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사후 공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배는 숙부인 김해김씨이며, 묘소는 장동면 율곡 호암동 계좌 고영하건좌 합조이다. 1806년 죽천사에 배향되었다.

■ 호조판서공 위덕화(21세 1551~1598) : 자는 화지(和之)이다. 성균진사공(鯤 1515~1582)과 의인(宜人) 광주李氏 사이에서 사자로 태어났다.
1585년(선조18)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다. 1593년 언양현감(彦陽縣監)과 1594년 군자감정(軍資監正)겸 언양현감에 제수 부임하여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596년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있을 때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병을 얻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1598년 公께서 타계하자 조정(朝廷)에서는 1605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따라 1609년 증통정대부형조참의(贈通政大夫刑曹參議), 1605년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에 따라 1612년 증가선대부형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에 추증하였다.
1626년 아들 병조참판공(정철)의 정사일등훈(靖社一等勳, 인조반정 功)을 감안 증자헌대부한성판윤겸의금부사(贈資憲大夫漢城判尹兼義禁府使)에, 1631년 8월 아들 병조참판공 정철의 진무일등훈(振武一等勳, 이괄의 난 功)과 후금(後金) 심양 회답사(回答使) 사행(使行) 등의 功을 감안하여 증자헌대부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使)에 추증되었다. 배(配)는 정부인 죽산안씨이며, 묘소는 회진면 대리로 합조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와 2015년 울산광역시 충의사(忠義祠)에 배향되었다. 公의 교지 11매가 현존한다.

■ 청금 위정훈(22세 1578~1662) 선생 : 자는 可謙, 호는 聽禽으로 안항공 덕후(德厚)와 공인(恭人) 청주김씨의 장자이다.
1612년(壬子) 진사에 입격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을 개탄하며 출사를 단념했다. 그후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군량미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도 호소사(號召使)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격문에 응해 아우 정명(廷鳴)과 종형 정망(廷望), 정헌(廷獻) 등과 의병ㆍ의곡을 모집, 지원했다. 호란(胡亂)으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때 안방준(安邦俊)의 격문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충청도 청주까지 올라가다 5일 만에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그는 청금(聽禽)이라 자호(自號)하고 4촌 아우 병조참판 정철(廷喆)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은 1659년 국난에 참여한 公에게 의금부 도사(義禁府 都事)를 제수하였다. 배는 공인 영광김씨, 진원박씨이며, 묘소는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 고영하이다. 1806년 죽천사에 배향되었다.교지 2매가 현존하고 청금유고집이 있다.

■ 병조참판공 위정철(22세 1583~1657) : 자는 자길(子吉), 호(號)는 만회재(晩悔齋)이다. 호조판서공(德和)과 정부인(貞夫人) 죽산安氏의 장자이다.
1603년 무과급제하였다. 1610년 효력부위, 1612년 宣傳官, 1614년 사헌부감찰, 통훈대부행함평현감, 1619년 통정대부, 절충장군행용양위부사직, 1621년 절충장군행충좌위부사과겸오위장, 통정대부행곤양군수, 1623년 인조반정 참여 정사원종일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 1624년 이괄의 난 참여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 1628년 영유현령, 1631년 병조참판 청나라 회답사 심양 사행, 1632년 절충장군행충무위사과겸오위장, 1633년 가리포첨사, 1636년 영흥대도호부사겸함경남도 방어사, 1638년 숙천도호부사, 1642년 갑산도호부사ㆍ갑산진병마첨절제사, 1643년 절충장군행만포진병마첨절제사 등 중요 관직 역임 후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방촌)후 1657년에 별세하였다. 배(配)는 정부인 창녕조씨, 정부인 진원박씨, 정부인 맹씨이다. 묘소(墓所)는 천관산 감시봉(500m 고지)이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公의 교지 28매, 인조 유서 3매와 후금 심양 회답사 사행시 태종(皇太極)으로부터 하사 받은 옥퉁소, 철피리, 반지 등 유품 다수가 현존한다. 특히 1631년 3월 19일~4월 30일간 심양 회답사를 사행하면서 당대 후금(後金)과 조선(朝鮮)간의 조공(朝貢) 등 외교 현안 임무를 완수하면서 장계 형식의「심양왕환일기(瀋陽往還日記)」를 남겼다. 이를 통해 1627년 정묘호란 후~1636년 병조호란 前간 동북아 정세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 반계 위정명(22세 1589~1640) 선생 : 자는 叔謙, 호는 磻溪로 안항공 덕후(德厚)과 공인 청주김씨의 삼자이다.
향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폭정에 항의하면서 과거(科擧)의 뜻을 접고 출사하지 않았다. 갑자(甲子)ㆍ정묘(丁卯) 두 난리에 형제들과 의병과 의곡을 모아 창의에 응했다. 1627年(丁卯)에는 의병을 이끌고 청주(淸州)까지 갔다가 화평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의병모집의 격문을 보고 응했다. 그러나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 갔다가 얼마 후에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皇太極)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형제들과 함께 땅에 자리를 깔고 사죄하는 신민(臣民)의 도리를 다했다. 배는 인천이씨이며 묘소는 산서마을 서록해좌로 쌍봉이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 배향되고 반계유고가 간행되었다.

■ 존재 위백규(26세 1727~1798) 선생 : 자는 子華, 호는 存齋ㆍ桂巷으로 영이재공(文德)과 평해吳氏의 장자이다.
천문(天文)ㆍ지리ㆍ율력(律曆)ㆍ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796년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1년4개월 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배는 영인(令人) 김해김씨이며 묘소는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 합조이다. 1806년 죽천사, 1929년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 1965년 곡성군 영귀서원(詠歸書院), 1984년 다산사 주벽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존재집(存齋集), 저서에 지제지(支提誌), 환영지(?瀛誌), 정현신보(政弦新報),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 총 90여권의 저서(著書)를 남겼다. 교지 7매가 현존한다

   
 

죽천사 경내에는 액호 편액 4점, 시운 편액 8점 총 12점이 소장되어 있다.
죽천사(竹川祠) 액호 글씨는 역수헌(亦垂軒) 윤용구(해평人, 1853~1939) 선생이 썼다.

   
 

내삼문 경의문(景義門) 편액 글씨는 낙관을 남기지 않아 글쓴이를 알 수 없다.

1)죽천서원중수기(竹川書院重修記)는 1797(丁巳)년 5대 족손 존재(存齋) 위백규 선생 근서(謹書)하다. 1974(甲寅)년 의재(毅齋) 위석한(1900~1982, 청계 선생 9대손) 근지(謹識)하다.
2)양춘재중수상량문(陽春齋重修上樑文)은 1917(丁巳)년 춘헌(春軒) 위계반 선생 근서(謹書)하다.
3)양춘재중수기(陽春齋重修記)는 1917(丁巳)년 죽헌(竹軒) 위계창(1861~1943, 청계 선생 10대손) 선생 근서(謹書)하다.
4)증 위진사정헌호국천(贈 魏進士廷獻號菊泉)은 1630(庚午)년 8월 김우급(金友伋 광산人, 호 秋潭,
1574~1643, 병조참판 추증)이 찬(撰)한 것을 추게(追揭)하였다.
5)대명참군(大明參軍) 여응종(呂應鍾) 동정기략(東征記略)은 1930(庚午)년 추게(追揭)하였다.
6)죽천사연혁실기(竹川祠沿革實記)는 1964(甲辰)년 관초(冠樵) 위정량(1895~1968, 청계 선생 11대손)이 기술(記述)하다.
죽천원지(竹川院誌)는 1984(甲子)년 무송공(위계호 1905~1987, 청계공 10대손)이 간행했다.

   
 

죽천사 묘정비(廟庭碑)는 2009년(己丑) 6월 만취(晩翠) 위계도 선생의 문하생 현재(弦齋) 김영웅(광산人 1947년생, 한학자 광주시 거주) 근찬(謹撰)하다. 청계공 11대손 덕운 황량 근서(謹書)하다. 황량, 경량이 삼가(謹竪)세웠다.

   
 

강당 양춘재(陽春齋)1917(丁巳)년 춘헌공(위계반)의 주도로 5칸 건물로 신축하였다. 주로 청계공의 묘각으로 사용되면서 별도로 춘헌공, 중와공(위홍량) 부자의 서재로 이용되었다.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송촌리 평촌마을 태생 소석(小石) 김노현(광산人, 1841~1915)선생이 썼다.

   
 

외삼문 요월문(邀月門)은 석촌(石邨) 윤용구 선생이 썼다.
주변에 청계 선생의 묘소(中位)가 위치한다. 가을 시제는 매년 陰 10. 5일 묘전에서 모신다.

   
 

1614년 병조참의 추증 교지 1매가 현존하며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전시 되고 있다.

청계선생 묘역 아래 죽천사 입구에는 1797년 사우 대중수시 거금 200냥을 헌성하고 문중에 논 69두락을 희사한 관암(冠菴)처사공(위상정) 기적비가 위치한다.

   
 

1987(丁卯) 6월 6일(芒種之節) 성재(誠齋) 나갑주(나주人 ~?) 근지(謹識)하다. 6대손 덕운 위황량 근서(謹書), 청계종중에서 근수(謹竪)하였다. 비문을 지은  誠齋(나갑주) 선생은 만취(晩翠) 위계도(관암공 5대손) 선생과 같은 효당(曉黨) 김문옥(1901~1960) 선생의 문하생이다.

죽천사는 사당 1동, 강당 1동, 내삼문 1동, 관리사옥 1동, 외삼문 1동, 묘정비 1기, 기적비 1기 등으로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은 논 45두락, 임야 9정 가량으로 청계공파종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배향된 7顯祖의 사적, 사우 건축물의 연륜 등을 고려하여 현재 당국의 문화재 지정을 추진중에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청계 위덕의 선생 후손들의 주요 세거지는 장흥읍 월평, 관산읍 방촌리, 당동, 옥산, 옥동,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이다.
후손중, 20세기 현대 대표적 인물은 위석한(성균관 고문), 위욱량(장흥향교 전교), 위동렬(의학박사), 위황량(장흥향교 전교), 위재환(초등학교장), 위 흡(임학박사, 전북대 농대학장), 위성용(경제기획원 이사관), 위기량(중등학교장), 위무량(중등학교장), 위 욱(경제학박사), 위선환(시인), 위성태(장흥향교 전교), 위일현(문학박사), 위용환(화가), 위성민(의학박사 병원장), 위승렬(법원 부이사관), 위창복(14대 종손, 성균관 석전교육원 교수), 위홍환(중등학교장, 문학박사), 위옥환(문화관광부차관보 정책실장), 위성락(한반도 평화교섭본부장, 러시아 대사), 위성갑(초등학교장), 위길환(광주시청 부이사관), 위승철(경기도의회 의원), 위구연(미국 스텐버드대학원 전자공학박사) 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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