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해 전 어느 봄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집 안에 왠 낯 선 강아지가 한 마리 와 있겠죠? 어리둥절 난감해 하는 저와는 달리 두 딸은 떠들썩하니 흥분해서 강아지가 넘 귀엽게 생겼다는 둥 하는 짓도 예쁘다는 둥,성격이 워낙 밝고 좋은 것 같다는 둥.. 온갖 장점을 늘어 놓으며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아뭇 소리하지 말고 우리가 키우자는 무언의 메시지였지요. 누군가 집 앞에 버려 두고 간 애완견이었던 겁니다. 문 앞이 시끄러워서 나가보니 강아지와 함께 밥그릇, 사료, 그리고 애견용 화장실과 패드까지 얌전히 놓여 있더랍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언젠가 만났던 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식구 수에 비해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한, 찢어 질 듯이 가난한 집안에 또 딸로 태어나 결국.. 남의 집 앞에 버려졌던 슬픈 인생이었지요. 아들이라면 모를까 ‘또 딸’은..더더군다나 양식이 부족한 집에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탄생부터 달가울 수 없는 존재였던 겁니다.

 남존 여비, 남아 선호 사상..우리 나라의 성차별 역사는 정말 한도 끝도 없이 길고  뿌리 깊기도 합니다. 원치 않은 자식이라고, 환영하고 싶지 않은 ‘또 딸’이라고 낳자마자 윗목에 밀쳐 졌던 건 차라리 약과이지요. 어떤 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현재 우리 나라 중년의 가족사를 몇 대 정도만 위로 거슬러 올라가 보라고, 그 가문의 역사 중에 핏덩어리를 겨우 면한 갓난아이일 때 남의 집 앞에 버려졌던 딸, 아직 어린 아이 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남의 집 부엌데기로 보내졌던 딸, 심지어 태어나자마자 그대로 죽으라고 엎어 놓았던 딸은 없는가? ...왜 없겠습니까,왜 없겠습니까... 그들의 삶은 탄생부터가 비극이었습니다.

 운동 역학이라는 학문에 의하면 모든 생물체에는 에너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낮은 레벨은 20이고요  ‘수치심’을 가진 사람의 레벨이 20입니다. 운동 역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30년 넘게 임상적으로 측정된 숫자 중 가장 낮은, 최저 치이지요. 인간이 현상 유지를 하며 일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쓰이는 에너지 레벨이 200 이라고 하니 20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시겠지요? 어렸을 때 심하게 모욕을 당한 사람, 심한 학대와 무시를 당하고 자란 사람, 심지어 성폭행을 당했던 사람, 늘 ‘네까짓 게 뭐라고..’, ‘네까짓 게 뭘 안다고..썩 저리 가지 못해’라는 말을 밥 먹듯이 들으며 자란 사람, 그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것은 ‘너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참 끔찍한 말이지요. 말을 한 사람도 들은 사람도, 그 말이 어떻게 한 인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 지, 그리고 그 상처가 어떻게 대를 이어 끊임없이 계속 될 지 꿈에도 몰랐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의 잔인함이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한 인생을 파괴시키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나와야만 말이겠습니까. 낳자마자 윗목에 밀쳐 졌던 처지, 남의 집 앞에 버려진 인생, 죽기를 바라고 엎어 놓았던 무정한 부모의 손길, 이것이 다 같은 거지요..‘너는 필요없는 존재’라는 무언의, 그러나 평생을 지워지지 않는 강하고 무정한 ‘거절’인 겁니다. 부모로부터 거절당한 아이..마치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물을 뒤집어 쓰듯, 수치심을 뒤집어 쓴 사람이지요. 이런 사람은 자기의 존재 자체가 실수라고 여깁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 나는 출생 자체가 민폐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심을 가지고 일생을 에너지 없이 허덕이며 살아 갑니다. 마치 연료없이 덜컹이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 자동차처럼 말입니다.‘

 수치심’,이 것은 생의 에너지를 그렇게 흡혈귀처럼 빨아 냅니다. 당연히 세상살이가 어려울 수밖에요. 남들은 잘만 살아가는 데 도무지 인생이 펴지지를 않습니다. 서있을 기운도 없는데 무거운 짐을 실은 리어카를 끌고 언덕을 올라가야 하는 사람, 그의 일생은 늘 그렇게 힘들고 고달픕니다.

 이런 사람은  결단을 잘 내리지 못합니다. 중대한 결정이면 더더욱 그렇지요. 혹 배우자로부터 상습적으로 가혹한 폭행을 당하고 살아도, 평생을 그 마의 그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합니다. 그리고 ‘자식 때문에 참고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내면세계로 들어가 보면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부당한 폭력과 혼인관계를 떨치고 나올만한 용기와 힘, 즉 ‘에너지’가 없는 겁니다. 수치심이 이미 그 모든 것을 삼키고, 소진시켰으니까요. 여러분은 어떤 수치심을 안은 채 살아 가고 계십니까? 혹시, 원치 않는 ‘또 딸’로 태어 나지는 않으셨습니까?..
 성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너는 핏덩이로라도 살아 있으라’제발 포기하지  말고 살아만 있으라는 부탁입니다.
 여러분은 수치스러운 실수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탄생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 가치를 다시 찾으셔야만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어디서 찾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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