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면 기산리 521-2번지(남부관광로 329-130), 사자산 아래 효경동(孝經洞)에는 광산노씨(盧氏)의 사우 효성사(孝星祠)가 위치한다.

이곳은 1972년(壬子) 상촌(桑村) 노숭을 비롯하여 백마장군(白馬將軍) 노의, 운암(雲菴) 노자원, 긍재(肯齋) 노자형, 송와(松窩) 노자정, 소재(蘇齋) 노수신 등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기정(岐亭) 노기재(1925~2014, 기산파종중 14대 종손)를 중심으로 후손들의 정성어린 모선으로 향의가 제발하였다. 3칸 맛배집 사당과 내삼문을 창건하고 6위를 배향하였다. 제 13대 장흥향교 전교 계암(桂菴) 위성재(장흥人 1905~1980, 용산면 계산리 태생)와 제 21대 성균관 유도회 장흥군지부장 신농(新農) 김화식(영광人 1907~1983, 용산면 인암리 태생)의 주관으로 장의(掌議) 등 유림의 뜻을 모아 향사하였다.

이후 1978년(戊午) 지역 유림의 천거로 오당(梧堂) 노관을 추배하였다. 주벽 상촌 노숭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이하의 분을 좌우로 모시는 소목식(昭穆式) 형태의 7현(顯)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매년 陰 3월 11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

배향된 인물의 행장을 살펴본다.

◆ 노숭(盧嵩 1337~1414) : 초명은 노숭(盧崇), 자는 중보(中甫), 호는 상촌(桑村)이다.

父는 감찰지평(監察持平) 노준경으로 1357년(공민왕 6)에 진사가 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지신사(知申事), 대사헌(大司憲), 지밀직(知密直)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389년(공양왕 1) 전라도관찰사가 되어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과 영산(榮山 지금의 나주)에 각각 득성창(得成倉)과 영산창(榮山倉)을 세우고 성을 쌓아 조운을 편리하게 하고, 왜구로부터의 피해를 막았다. 또한 조세를 3년 동안 면제시켜주도록 조정에 건의했으며, 의창(義倉)이 없는 주군(州郡)에 이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조선 개국 후 한양윤(漢陽尹)으로서 개국원종공신에 추가로 녹훈되었고 공신전 30결을 받았다. 1395년(태조 4) 개성유후(開城留後)를 거쳐 1397년 경기좌도도관찰사(京畿左道都觀察使)가 되어서 청렴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태종이 즉위하자 삼사좌사(三司左使),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발탁되었으나 노모의 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다음 해에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기복(起復)되었고, 그 뒤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를 거쳐 1414년 검교우의정(檢校右議政)에 이르렀다.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하였다. 상주시 옥연사(玉淵祠)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경평(敬平)이다.

◆ 노의(盧毅 1459~1528) : 자는 군직(君直), 호는 백마장군(白馬將軍)이다.
1477년(丁酉 성종 8) 무과에 등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훈련부정을 지냈다. 중중반정 후 1507년(丁卯) 국적을 토주하고 종사를 복안하는데 功을 세웠다. 중종의 은택으로 정국공신에 훈록되어 가선대부에 초배되고 光原君에 봉해져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시호는 충의(忠毅) 이다.

◆ 노자원(盧自元 1489~1556) : 자는 대숙(大叔), 호는 운암(雲菴)이다.
父는 노의이며, 일찍이 정여창과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신고당 노우명과 더불어 도학을 창명하였으며 1510년(庚午 중종 5) 문과에 급제하고 괴원(槐院)에 들어가 저작을 배하고 정언(正言), 좌랑(佐郞)), 교리(校理), 승지(承旨) 등 관직을 지냈다. 이후 노부를 봉양을 위해 귀양하고자 하였으나, 부제학에 제수되고 1555년(乙卯 명종 10) 대사헌(大司憲)으로 치사(致仕)하였다.

◆ 노자형(盧自亨 1495~1567) : 자는 통숙(通叔), 호는 긍재(肯齋)이다.
1511년(辛未 중종 6) 진사·생원시에 입격하고 1514년(甲戌 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가 되었다. 이후 거창군수, 화순군수를 지냈다. 1527년(丁亥 중종 22) 이조참의를 이어 大司成兼 世子左賓客 侍講院習讀官을 지내고 이후 함경도감사, 대사헌에 이르렀다. 公의 학행과 도덕은 당대 사표(師表)가 되고 이언적, 서경덕, 성수침, 윤탁 등과 도의교(道義交)를 맺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

◆ 노자정(盧自貞 1498~1566) : 자는 도숙(道叔), 호는 송와(松窩)이다.
1530년(庚寅 중종 25) 천거로 교위(校尉)가 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러 병환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 노수신(盧守愼 1515~1590) :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이다.
1543년 식년시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1544년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小尹) 윤원형이 이기와 함께 을사사화를 일으켜 公은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1547년(명종 2) 순천(順天)에 유배되었다.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가중처벌 되어 진도(珍島)로 이배되어 19년 동안 귀양살이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槐山)으로 옮겼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서 교리(校理)에 기용되어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을 지낸 후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戊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었으나, 다음해 기축옥사 때 과거 정여립(鄭汝立)을 천거했다 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능하였고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의 공격을 받기도했다. 충주시 팔봉서원, 상주시 도남서원·봉산서원, 괴산군 화암서원, 진도군 봉암사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의(文懿)·문간(文簡)이다. 유고문집 <蘇齋集>이 있다.
 
◆ 노관(盧瓘 1797~1882) : 자는 방윤(方潤), 호는 오당(梧堂)이다.
통덕랑 노응채의 아들로 기산마을 태생이다. 품자가 엄중하고 행실이 천민하고 1816년(丙子 순조 16)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천거로 절충장군 첨중추오위장에 올라 사후 嘉善大夫工曹參判겸 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되었다.

강당은 영효재(永孝齋)이며, 정자 개념으로는 화수정(花樹亭)이다.

4칸의 팔작집으로 1925년(乙丑)  음 10월 건축하였다. 영효재상량문은 그해 소춘(小春 10월) 후손

연곡(蓮谷) 노민식(1874~1943) 근서(謹書)하다. 1958년(戊戌) 중수(重修)하여 지금에 이른다.

영효재와 화수정 액호 편액은 보성강 물을 먹물로 물 드렸다는 일화를 남긴 설주(雪舟) 송운회(여산人 1874~1965,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 선생이 썼다.

● 영효재십경(永孝齋十景)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도림목적(桃林牧笛) : 도림에서 목동이 피리부는 소리
▶성전초가(星田樵歌) : 빌밭등에서 나무꾼이 부르는 노래 소리
▶계산초월(鷄山初月) : 계산등에 넘어가는 초승달
▶석대모연(石臺暮煙) : 석대에서 해질무렵 나는 연기
▶예강어화(汭江漁火) : 예양강에서 고기잡이 불빛

▶관성전등(冠城電燈) : 장흥읍성의 밝은 불빛
▶산태비폭(山汰飛瀑) : 산태골에서 떨어지는 폭포
▶한천포빙(寒泉鋪빙) : 한천에 펼쳐진 얼음 빙판
▶옥봉청풍(玉峯淸風) : 옥녀봉에서 부드럽게 부는 바람
▶어병낙하(御屛落霞) : 어병(사자)산 허리에 낮게 드리운 저녁 노을

강당에서는 매년 陰 10월 20일 17세조 연수당(延壽堂) 노덕빈(1675~1766) 등 선조 5위 시제를 모신다.

외문 앞 우측에는 효성사사적비(孝星祠事蹟碑)가 위치한다.

이 비(碑)는 죽산人 겸산(兼山) 안병탁(1903~1994, 장흥읍 건산리 태생, 구례군 문척면 토금리 거주) 찬(撰)하다. 영광人 송천(松泉) 김태경(1918~2001, 부산면 내안리 출신) 서(書)하다. 1988년(戊辰) 3월 참의공파문중에서 세웠(竪)다.

좌측에는 오운(梧雲) 노병수(1901~1963) 기행비(紀行碑)가 위치한다.
족질(族姪) 석계(石溪) 노인규(1911~?) 근찬병서(謹撰병書)하다.
1988년(戊辰) 3월 참의공파문중에서 세웠(竪)다.

효성사는 3칸 강당 1동, 4칸 강당 1동, 내삼문, 외문, 직사 1동, 기타 건물 2동, 사적비 1기, 기행비 1기 등으로 조성되어 광산노씨 참의공문중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재원(財源)은 임야 30정, 논(畓) 25두락 이다.

기산리에 세거한 광산노씨는 1627년(丁卯) 야은(野隱) 노정일(盧精一, 1587~1652)이 부산면 고개리에서 입촌하여 현재 20호 거주하고 있다. 1880년경 광산노씨 문계(門契)를 조직하여 자손의 화합과 친목을 바탕으로 위선사를 위해 조직되었다. 매년 陰 1월 1일 설날 오전 후손들은 효성사 영효재 강당에 150여명이 참석하여 합동 拜禮를 행하여 후손간의 연대와 화목을 다지고 있다. 이 행사는 50여전부터 내려온 미풍양속으로 후손들은 자긍심을 갖고 자랑을 아끼지 않고 있다.

현대의 인물로는 노종인(1946년생) 前 서울시청 서기관, 노재기 세무사(1953년생), 노철재(1954년생) 시인, 노양재(1957년생) 광주시청 사무관, 노종민(1958년생) 前 국민은행 지점장, 노종오(1963년생) 前 제일은행 지점장, 노종욱(1966년생) 서울시 교육청 연수강사, 노현욱(1967년생) 보해양조 지점장, 노현진(변호사) 등이다.

이 밖의 장흥군 내 광산노씨 세거지로는 장평면 청룡, 부산면 금장마을 등이다. 이중에는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필리핀대사와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장 등을 지낸 산남(山南) 노정기(1932년생)와 순천시장을 지낸 노관규(1960년생)가 금장마을 출신이다.

찾아가는 길은 안양면 기산마을 사거리에서 장흥읍 방향으로 630여미터 오다보면 우측 도로변에

청헌(淸軒) 노병선(1913~1982) 효행비(孝行碑)가 위치한다. 이 비(碑)는 유헌(裕軒) 위계현(1929년생, 안양면 비동리 동촌 거주) 근지(謹識)하여 2005년 1월 불소자 노생기, 노평기가 세웠(竪)다.
바로 옆에는 효성사 입구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여기서 우회전 하여 농노길 650여미터를 들어가면 효성사가 위치한다.

본 사우는 사자산 아래 기산리(岐山里) 본마을과 외기(外岐) 사이에 위치하여 민가와 떨어져 있고, 숲속이라 일조가 덜해 한적함을 더하고 있었다.

자문 : 양원(良遠) 노현기(1941년생, 기산마을 거주), 오헌(梧軒) 노종건(1952년생 기산마을 거주, 광산노씨 참의공문중 기산파종중 15대 종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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