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달리 총명했기에 여섯살부터 스승을 찾아다녔다는 옥봉 백광훈(1537~1582). 그 詩題에 ‘예양강’ 관련 7수, ‘보림사’ 관련 9수를 <옥봉집>에 남겼다.

-예상로취후(汭上路醉後), 自예양취행(醉行), 예양동교(東橋), 예상취별(汭上醉別)유정보, 예양贈금승(琴僧), 봉명정(鳳鳴亭)하次韻, 예강別.
-過보림사, 보림사증별(贈別), 自보림下서계(西溪), 보림사, 보림사, 보림사次서상사, 보림사贈연상인, 보림사수각(水閣)次유심보, 出보림사.
‘예양강, 보림사’ 말고도 장흥 관련詩는 물론 더 있다. 남도(南道)의 연조비가사(燕趙悲歌士)로 불리던 백광훈, 그는 왜 장흥 汭陽江에서 그리 醉했을까?
汭江의 송별, 그 애잔한 슬픔은 어디에서 왔으며, ‘예강別, 보림사 贈別’의 그대는 누구였을까?

-詩, 예강별(汭江別, 장흥의 송별)
寒食江南路   한식(寒食)에 가는 장흥 길
烟花雨後山   비 내린 산에 핀 연화(烟花)
一春多少思   한 봄이면 얼마쯤 생각하랴
落日送君還   지는 해, 그대를 돌려보내네.

- 詩, 보림사 증별(贈別)
握手寺樓春   봄날 절 다락, 손 맞잡고
相送無言裏   말없이 서로를 보내누나.
白日在靑天   푸른 하늘에 뜬 밝은 해
平生寸心是   평생에 속마음 이러할 터 

 한참 어린 동생을 이끌어주던 15세 차이의 큰 형, ‘기봉 백광홍(1522~1556)’이 35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마양시(1549),대과(1552)에 홍문관(玉堂)에 진출했던 큰 기둥이 그만 무너졌다. 둘째 형 풍잠 백광안(1527~1567)도 41세에 가버렸다. 옥봉은 장형의 사후 8년째 28세에 진사(1564)입격은 했지만, 이제 공부에만 진력할 형편이 못되었다.
친구들, 정철(1536~1593)은 1562년 대과장원이고, 최경창(1539~1583)은 1568년 대과급제였다. 혼자 남은 아들 옥봉이 고향에 홀로 계신 부친 백세인(1500~1573)을 보살펴야 했기에 해남-장흥길을 부지런히 오갔다.
장흥 汭陽江 東橋를 건너 장흥부사를 만나고, 큰 형님과의 추억이 어린 '汭上 보림사'를 찾았으며, 그 형님의 옛 자취 앞에서 또 서러웠다. 詩 “보림사次서상사(徐上舍)”의 ‘서눌’과도 함께 울었다. 나주사람 ‘서눌’은 ‘기봉’의 사마시 동방이었다. 마침 그 무렵 장흥부사에 옥봉과 인연이 닿는 동류문객들이 있었다. 기봉을 아꼈던 ‘하서 김인후(1510~1560)’의 제자들이다. 그들과 자리에서 詩文주악(酒樂)에 흠뻑 취(醉)할 때도 회한을 떨치기는 어려웠을 것. 그렇게 醉해 오가던 汭陽東橋는 꿈과 현실을 넘나들던, 비몽사몽(非夢似夢)의 다리였을 것.
이하, 그때 장흥부사들과의 교류 내역이다.
-1566년 장흥부사, 월계 조희문(趙希文,1527~1578),  1553년 대과, ‘하서 김인후’의 수제자요 맏사위. ‘기봉’은 생전에 ‘하서’의 아낌을 받았고, 옥봉은 ‘하서’의 아들(김계의)과 친했으며, <하서집>의 교정도 보았다. 옥봉이 텃밭(基田)을 살 때 장흥부사 조희문이 금전적 지원을 해주었던 일도 있었다.
-詩, 장흥지매기전득 지주조전가(長興地買基田得 地主助田價)
離親遠寓爲寒飢   부친 떠나 먼 곳에서 춥고 배고파
狐兎情深計莫施   호토 情 깊어도 뜻대로 못했다네

試買墻根數묘土 시험 삼아 城下 땅을 조금 샀는데
百年園屋荷恩私 백년 원옥에 사은(私恩)을 졌다네
<주> 부사(府使)를 ‘지주(地主),명부(明府), 성주(城主)’로도 불렀다.(‘趙부사’와는 '謝월계趙明府/ 和趙明府완월지운’이 있다)

-1569년 장흥부사, 유충정(柳忠貞,1509~1574), 1534년 무과, 고흥柳氏, 나주 죽산 출신. 아들들, 유발(정보), 유은(1540~1590,심보)과도 ‘汭上 보림사’에서 만났다.
(‘柳부사’와는 ‘예상취별(醉別)유정보/ 보림사수각次유심보’가 있다)
-1571년 장흥부사, 정인관(鄭仁寬,1493~), 1543년 진사에 1552년 대과. ‘기봉’과 대과 동방, 나주 정씨, ‘하서’의 제자.
(‘鄭부사’와는 ‘爲정明府정인(情人)희제 / 代금아(琴峨)別정明府’가 있다)
그러다가 1573년. 옥봉은 부친喪을 겪는데, 그 이후 장흥부사들은 보이지 않는다. 1582년에 해남에서 55세 옥봉의 본인喪이 있었다. 한편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미암일기>에는 장흥부사들이 ‘미암’에게 선물을 보내는 장면들이 있다. 그 장흥부사 趙希文은 유희춘의 큰 사위였다. 유희춘의 외아들은 '하서'의 세째 사위였고, 그 외손녀는 옥봉의 며느리가 된다. 즉 아들 백진남(1564~1618)의 아내는 해남윤씨 윤관중의 딸로 미암 유희춘의 외손녀였다.  <옥봉집>에 등장한 인물들의 인맥(人脈)을 알면, 옥봉이 남긴 詩意에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옥봉집>의 ‘장흥판 번역사업’을 제안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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