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방치되어 자라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슬픈 문제점 중 하나는 공감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공감능력, 즉 상대방의 감정을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 같이 느낄 수 있는 능력이지요. 

공감은 단순히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까지 포함됩니다. 공감능력이 부족하다는 건 남의 감정을 읽을 줄도 모르고 느낄 줄도 모르는 것, 더 나아가서는 남의 처지나 고통을 도무지 느낄 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남이 아파도 그 아픔이 그 크기만큼 느껴지지 않고 슬퍼도 슬픔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남이 처한 형편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구요. 그러니 상대방의 감정에 맞는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고, 그러니 눈치없고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엉뚱한 사람이 되거나, 인정머리 없고 야속한 사람, 원망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지요.  정작 본인은 상대방이 왜 그렇게 자기를 답답해하고 때론 화까지 내는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화를 내지요. 본의 아니게 적반하장 꼴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무슨 의사소통이 되겠으며 속깊은 대화인들 이루어 지겠습니까. 그저 겨우 일상적인 이야기만 주고 받거나 허공에 날아가는 것 같은, 속 빈 대화만 오갈 뿐입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벽에 대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이 결혼을 하면 배우자와의 소통이 막히고, 부모가 되면 아이들, 특히 사춘기 자녀들의 마음을 읽어 줄 수 없어  가족 간에 소통이 부재하게 됩니다.  피차 불행한 거지요. 공감이 되지 않는 사람의 사회생활은 마치, 여러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혼자 이어 폰을 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폰 때문에 남의 말이 들리지 않듯, 공감능력이 없어 남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으니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말을 하기도 해 엉뚱한 사람이 되곤 하는 겁니다. 때로는 삶이 답답하고 발전이 막히고 승진이 더딜 수도 있습니다. 어디 남의 감정뿐입니까. 실은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도 잘 모릅니다. 공감능력의 부족은 자신 뿐 아니라  남도 불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이 공감능력의 부족은 왜,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부터 일어난 일일까요? 왜 삶에 필수적인 그 능력이 그토록 부족해지게 된 걸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공감이라는 것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 즉 두 사람 이상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교류, 감정의 주고받음 현상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최초로 이 ‘주고받음’현상이 만들어지는 곳이 어디이지요? 당연히 가정입니다. 아기와 부모, 특히 엄마와의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이때 아기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방치되면 감정을 주고받을 대상이 없이 혼자 놓여지게 되므로 결국 소통이 막히거나 끊기게 되는 겁니다.

곁에 감정을 공유하고 반응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어떻게  혼자서 공감능력을 기를 수 있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부모와의 정서적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나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뇌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은 겁니다. 공감능력의 부족은 방치된 환경이 만들어 낸 슬픈 정서적 장애입니다. 당연히 그를 양육한 부모의 책임이지요. 이전의 우리나라의 처지에서는 이런 부모가 많았습니다. 나라는 가난하고 먹을 것은 없고, 고만고만한 어린 것들은 조랑조랑한데, 입에 풀칠하랴 먹고살기 급급하니 한가하게 아이들 곁에 있을 짬이 없없던 거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선..무턱대고 화만 낼 것이 아니라 이해의 눈으로 바라봐 주어야겠지요. 제대로 돌봄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자랐기 때문에 그리 된 거니까요. 당사자인 본인은 자신이 공감능력이 부족해 상대방의 삶을 힘들게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가운데 서로 끊임없이 부단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나 이 노력의 열매는 남만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먼저 행복하게 할 겁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될까요? 우선.. 듣는 일을 많이 하십시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이 매우 부족합니다. 어려서부터 들어야 할 것을 들려주는 사람이 없이 홀로 방치되었으니 듣는 것이 서툴고 들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요. 그러니 이제부터 부단히 듣는 훈련을 하십시오. 가만히 집중력을 다 하여 듣고 상대방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를, 그 뜻만 이 아니라 그 말 안에 담긴 감정이 무엇일까를 읽어내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십시오. 반면에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은 마치 앞을 못 보는 사람에게 더듬어 만지고 설명을 해주듯, 일일히 자신의 감정을, 또는 처지를 말해 주어야 합니다. 슬프면 슬프다고, 기쁘면 기쁘다고,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자신의 감정을 알려 주십시오.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당연히 알아 차리리라고 기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서에는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쓴 맛을 견디는 사람에게 인내는 반드시 열매를 낳고, 축복과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