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때 장흥부(府) 승격으로 長興과 長興사람이 다시 태어났다. 비로소 사람과 땅의 정체성(正體性)이 부여된 것. 그런데 “공예태후 임씨지향이라는 이유로 부사 고을로 승격되었다”는 사정에는 별다른 이설이 없지만, 구체적 승격시점을 두고 여러 의견이 분분했다.

그간에는 <1124년(주1)> 등으로 보다가, 요즘에는 그냥 <인종朝(주2)>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승격시점에 관련한 유일한 문헌이라 할, <고려사지리지>에도 구체적 승격시점(年記) 언급이 없다. 단지 “인종조 이(以)공예태후임씨지향 승(陞)지장흥부사 (仁宗朝 以恭睿太后任氏之鄕 陞知長興府使)”이라고만 되어있다.

이에 필자는 오래 전부터 ‘1124년설, 1126년설’의 폐기를 비롯하여 승격년도에 관한 의견을 수차 제시했었다.(주3) 생각해보시라. ‘任氏가 궁궐에 단지 입궁했다는 사정’, ‘왕후도 아닌, 궁비(연택궁주)로 간택되었다는 사정’만으로 “속현 정안현(縣)에서 군(郡)을 뛰어넘어 장흥부(府)로 2단계 승격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 전례도 없을 뿐더러 당시 정치적 상황에도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 1124년, 1126년은 ‘권신 이자겸’의 위세가 여전한 시점이고, 그 두 딸이 인종 왕후로 있던 시절이었다. 이때는 ‘장흥(정안)任氏’ 집안의 힘이 중앙정계에서 아직 미약했다. ‘이자겸’의 축출에 任氏 집안이 무슨 공을 세운 바도 없었다.

다시 정리해본다. 우선 <고려사지리지>는 고려 당대가 아닌, 조선 초에 만든 후대 기록이며, 오기와 누락이 종종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仁宗朝 以恭睿太后任氏之鄕 陞知長興府使” 문구에 있어 “인종조(仁宗朝)”부분과 “공예태후(恭睿太后)”부분은 상호 충돌적 표현에 해당한다. 이름이 ‘왕해’이고 묘호 ‘인종’을 부여받은 그 남자의 재위기간은 1122년~1146년인 반면에, 그 여자 임씨(任氏)의 생몰연대는 1109년~1183년으로, ‘인종에 대한 王后시절’과 ‘그 아들 의종에 대한 太后시절’로 그 신분이 구별된 두 세상을 살았다. 그러니 ‘인종 당대’를 기준하면 그 任氏는 ‘王后’지위일 뿐 결코 ‘太后’라 지칭될 수 없는 것. ‘太后’라 함은 ‘황제(現王)의 살아있는 어머니’로 ‘의종’ 이후에 가능한 신분이며, 任氏 타계 이후 ‘공예’라는 ‘추증시호’가 올려졌다. 그러므로 “仁宗朝 以恭睿太后任氏之鄕 陞知長興府使”는 그 자체로 일부 모순적 내용이다. 장흥府 승격시점은 ‘인종 때 王后시절’ 아니면 ‘의종 이후 太后시절’, 즉 어느 둘 중의 한 시점이 되어야 하지 달리 ‘인종조 때 + 공예태후 시절’로 중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종朝’가 아닌, ‘공예태후 시절’에 장흥府로 승격되었다고 한다면 과연 언제이며, 어떤 사정인지가 다시 문제된다.
지난 2008년경에 위성호 선생이 주장한, ‘한문준 부사(副使) 부임시점, 또는 임원후(임씨 부친) 사망시점인 1156년’설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의견이었다. 어느 시절이든 이미 죽은 권력을 존숭할 이유는 없는 것이고, 설령 그런 ‘임원후’를 기준삼는다면 오히려 그가 ‘정안공(公) 봉작’과 ‘수녕부(府) 식읍’을 받던 시점, 즉 1148년으로 보는 게 합당하다고 비판했었다. 왜냐하면 이제 막 1146년에 등극한 ‘의종’ 입장에서는 권력초기의 취약성을 보완하고자 ‘長子(의종)를 반대하고 次子(대령후)를 밀었던 任氏 모친’을 비롯하여 任氏 집안외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필자로서는 그 구체적 승격시점을 확정할 수 없다면 차라리 ‘仁宗朝’라는 역사적 기록에 맞추어 ‘1129년, 왕후책봉 시점’으로 일응 받아들이되, 장차 학계의 성과를 기다리자는 유보적 주장을 했었다. 그런데 그 승격시점 논쟁을 마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승격년도를 ‘의종3년,1149년’으로 파악한 ‘윤경진 교수’의 논문이 나왔다(주4). 尹교수의 논지는 이러하다. 인종의 타계년도 1146년의 사후 3년째, 즉 3년상 부묘(부廟)를 마친 1149년에 아들 ‘의종’이 母后 任氏에게 금보 옥책을 올리면서 太后로 모시는 행사를 거행했는데, 그러한 太后 존숭의 방법으로 읍호 승격을 시킨 전례도 있다는 것. 즉 정치적 특례(特例)로서 그때 任氏 모후의 내향(內鄕) ‘정안현’에 대한 ‘장흥부’ 승격이, 任氏 모후의 외향(外鄕), 즉 ‘부평/수주(樹州)’에 대한 ‘안남도호부’ 승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 (기실 ‘장흥任氏’의 입궁은 그 외가 집안 ‘수주 이씨’의 영향에 크게 힘입은 것이다.  외조부 ‘이위(李瑋)’는 ‘이자겸’ 숙청에 기여한 공로로 진정공신이 되었으며, 외손녀 任氏에 관련하여 꾼 태몽(胎夢)이 널리 알려져 있다.) 尹교수 주장은 요컨대 “<고려사지리지>에 나온 ‘인종朝’는 ‘의종朝’의 오기에 해당한다”는 것. ‘선왕(先王) 부묘(부廟)의 이듬해에 있다는 太后존숭 행사규례’를 몰랐던 필자에게 尹교수 입론은 설득력이 컸었기에, 그 이후부터 ‘1149년 太后기준설’을 지지하여 왔다. 만약 ‘1149년 太后설’의 모순점이 따로 논파된다면 다시 ‘1129년 王后기준설’로 돌아갈 수도 있겠으나, 현재까지 ‘1149년 太后기준설’을 뛰어넘는 반론은 없는 것 같다.

(“장흥부 승격의 의미와 중요성/ 장흥 지명의 유래”는 다음 기회에 별도 지면으로 미룬다.)
<주1> 장흥군 연혁표, <장흥읍지 지리지 모음집>, 장흥문화원,1992
<주2> 장흥군청 사이트 장흥군 연혁. <장흥읍지(2018)>
<주3> 졸고 내역, 장흥신문,2002,12,10,“공예태후와 장흥부 승격논란 지켜보며”/2008,2,4,“계사소고집을 읽고- 장흥부 승격논란”/장흥향토사회,2009,8,8,“장흥부 승격논란”/ 2011,6,24, 재경장흥향우회 카페, “고려 장흥부 승격시점”/ 장흥신문, 2018,1,12, “징흥 부사고을 언제 승격시켰나.”
<주4> 윤경진, 2008,12, ‘고려 숙종 의종 대 太后 관향 승격의 의미’, 고려사지리지 연혁의 보정을 위하여, 국학연구13/ 윤경진, <고려사지리지의 분석과 보정, 여유당,2012,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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