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神道碑)란 종2품 이상의 품계 또는 관직에 해당된 벼슬아치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 큰길가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임진왜란 때 호성ㆍ선무원종공신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된 위덕화의 신도비는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650-3번지 방촌유물전시관 앞에 위치한다.

비신석 상단 두전(頭篆)은 扈聖宣武功臣贈資憲大夫戶曹判書魏公神道碑銘이라 새겼다. 전면 양서(陽書)는 扈聖宣武功臣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行通訓大夫軍資監正魏公神道碑銘 ?序라 새겼다.

懷州의 魏氏는 대대로 忠義를 崇尙하여 왔는데 宣祖 壬辰倭亂에 이르러 國事에 정성껏 힘을 다하여 盟府에 功績을 記錄한 者 그 數가 가장 많았으니 魏公 諱 德和 字 和之 같은 분이 그중의 한사람이다. 幽宅은 長興 ?德島 酉坐 辛向의 언덕에 있으며 屛溪 尹文獻公이 이미 碑文을 새기었다. 嗣孫 啓文이 宗族들과 모의하기를 我朝의 功烈이 이미 顯著하고 또한 높은 벼슬을 받았으니 禮法에 의하여 마땅히 神道碑가 있어야 한다. 하고 드디어 大石을 다듬고 그의 일가인 相과 璟奎에게 위촉하여 내게 碑銘을 求하게 하니 착하지 못한 말로 어떻게 족히 讚揚할 것이며 하물며 앞서 사실을 修記하였으니 필요 없는 말을 덧붙일 수 없다고 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더욱 부지런히 請함으로 이에 文獻公의 뜻을 記述하여 敍述하였다.<중략>

돼지나 뱀처럼 욕심 많고 흉포한 놈들이 누에가 뽕잎 먹듯이 천천히 國土를 침범하여 八方 땅 끝까지 傾覆하려고 하는구나. 서울을 떠나려는 한 가지 計策 저 서방으로 가는구나. 王이 탄 수레 피란길에 오르니 萬事가 경황이 없구나. 용감한 忠臣으로 魏公이 있었도다. 고삐 잡고 王의 수레 護衛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忠誠을 다했도다. 말 타고 따르는 臣下 적은데다 邊方에 비바람은 왜 이리 몰아 친고 눈물 뿌리며 결렬한 言論 大臣들이 얼굴을 붉히었네. 領海를 두루 바라보니 적세가 참으로 치열하네. 왕성한 기세 꺾으리라 맹세하여 萬번 죽기를 피하지 아니했네. 빛난 듯 一片丹心 王의 四聰에 올랐네. 彦陽縣에 부임하여 여러 번 軍功을 아뢰었네. 병들어 故鄕으로 돌아오니 運命이 이에 바싹 닥쳐왔네. 憂國의 한 생각 마음속에 맺히었네. 큰 賞으로 記錄하고 높은 벼슬 내리었네. 祠宇에 配享하니 동생과 兄이로다. 氣槪는 山河 같이 씩씩하고 찬란한 빛 온 나라에 나타났네. 큰 碑에다 말을 실으나 말이 끝이 없네.
 

丙子季冬 通政大夫前秘書院承 安東 金?漢이 撰하노라.
戊寅 五月 日  嗣孫  啓文
十一代孫  璟奎  謹竪

■위덕화(魏德和 21세, 1551~1598) : 자는 화지(和之)이다. 성균 진사 위 곤(魏 鯤)과 광주李氏 사이에서 사자(四子)로 태어났다. 1585년(乙酉 선조18)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하자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하였다. 1593년 언양현감(彦陽縣監)에, 1594년 군자감정(軍資監正)겸 언양현감에 제수되어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596년 훈련원정(訓鍊院正)으로 있을 때에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비분하여 병을 얻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1598년 타계하자 조정에서는 1609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에 따라 贈通政大夫刑曹參議에, 1612년 호성원종훈(扈聖原從勳)에 따라 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에 추증하였다. 1626년 아들 위정철의 정사일등훈(靖社一等勳, 인조반정 功)에 따라 贈資憲大夫漢城判尹兼義禁府使에, 1631년 8월 아들 위정철의 진무일등훈(振武一等勳, 이괄의 난 功)과 후금 심양 회답사 사행(使行) 등의 功을 감안하여 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知義禁府使에 추증하였다. 配는 정부인 죽산안씨 이다. 묘소는 회진면 대리로 합조(合兆)이다. 1806년 죽천사(竹川祠), 2015년 울산시 충의사(忠義祠)에 배향(配享)됐다.

(子)는 병조참판(兵曹參判) 정철(廷喆 1583~1657), 통덕랑(通德郞) 정혁(廷赫 1588~1627)이다.
손자(孫子) 상원군수(祥原郡守) 동전(1649~1713)은 정철(廷喆)의 출(出)이고, 청우당(淸友堂) 동익(東翼 1622~1686)은 정혁(廷赫)의 출(出)로 위덕화, 위정철, 위동전으로 이어진 3대 무반가 이다.

신도비(神道碑)는 1936년(丙子) 늦은 겨울에 김영한이 비문을 짓(撰)다. 서(書)와 전자(篆字)는 민병승이 썼다. 1938년(戊寅) 5월 사손 계문(啓文), 11대손 경규(璟奎) 근수(謹竪)하였다.

- 김영한(金영漢 1878~1950) : 안동人으로 자는 기오(箕五), 호는 급우재(及愚齋)이다. 청음(淸陰) 김상헌의 13대손이며, 충남 공주 태생이다. 1894년(甲午 고종31) 식년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901년(광무5) 용인군수, 이듬해에는 양근(양평)군수, 1903년 9월 비서원승에 제수되고, 품계는 통정대부 이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 민병승(閔丙承 1866~1946) : 여흥人으로 자는 공우(公祐), 호는 단운(丹雲)이다. 조선말 개항기에 고종의 척신(戚臣)으로 이조판서와 강화부 유수 등을 지낸 민응식의 아들이다. 1885년 정시에서 문과 급제하였다. 1886년 이조정랑과 승정원승지, 성균관대사성, 1888년 이조참의, 1890년 이조참판, 1899년 종궁내부특진관, 1905년 규장각직학사 등 조선말기에 관직을 두루 지냈으며, 품계는 가선대부 이다.
민병승이 위덕화 신도비의 서(書), 전자(篆字)를 쓰게된 연유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의 4촌 오빠는 우의정 등을 지낸 문효공 민진장, 오빠는 우참찬 등을 지낸 충문공 민진후, 좌의정 등을 지낸 문충공 민진원으로 민병승은 민진원의 8대손이다. 민씨 종형제 3명을 위덕화의 손자로 상원군수 등을 지낸 위동전이 모두 수행하였다. 고흥군 도화면 천등산에 위치한 위동전 묘소 묘표는 1809년 현손 삼회당 위도임(1765~1838, 장흥향교 재장)이 세웠다. 묘표 찬(撰)은 민진장의 증손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민창혁이 하였다. 묘표에는 가장(家狀)에 의거 두 집안간 우애의 정을 기록하고 있다. 위덕화 신도비에서도 240여년이 지난 장흥위씨와 여흥민씨 집안 후손들은 우애를 계속 유대함을 알 수 있다.

- 위계문(1865~1951) : 자는 창여(昌汝), 호는 죽암(竹菴)이다. 위덕화의 10대 종손이자 장천재 4차 중수(重修)에 공헌(貢獻)한 농포(農圃) 위 송(魏 松)의 아들이다. 선대 교지 61점, 철피리, 옥퉁소 50점 등 유품 111점을 보수 관리하였다. 이중에는 병조참판 위정철이 남긴 "瀋陽往還日記"를 호를 따라 "만회당실기(晩悔堂實記)"로 필사(筆寫)하여 오늘날까지 보존케 하였다. 1916년 편찬한 장흥위씨 병진보(丙辰譜) 편찬시 교정, 재무를 맡아 참여하였다. 1945년 현 판서공파 종택 안채를 신축하고 당대 본향 문중사를 이끌었다. 죽암유고(竹庵遺稿)가 있다.

- 위경규(1887~1947) :  자는 석언(錫彦), 호는 단강(丹江)이다.  유치면 단산리 태생으로 영귀정(詠歸亭)을 세운 복재(復齋) 위계민(魏啓玟) 선생의 아들이다. 판서공파종중에 논 3두락과 신도비 근수에 거금  四百三十원을 헌성하였다. 1937~1939년간 장흥향교 11대 직원(直員 현 전교)과 1937~1938년간 제8대 장흥군유도회 회장을 겸하였다. 1946년 장흥유림의 산실인 향교 전교를 2번 역임한 대표적 유학자이다.
 

1938년 5월 신도비 제막식이다. 중앙 신도비 기준으로 좌측 첫번째는 판서공 10대 종손 죽암(竹庵) 위계문, 두번째는 관산읍 옥산 태생 춘헌(春軒) 위계반(1848~1939), 네번째(짧은머리) 유치면 단산 태생 단강(丹江) 위경규, 우측 첫번째는 방촌리 태생 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 등 당대 문중사를 이끈 주역들이다. 우측 앞 두번째 앉자 얼굴을 내미는 11살 소년은 현재 판서공파 종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13대 종손 향산(위성렬 1928년생, 장흥위씨 제 2대 도문회장)丈이다.

신도비 비석 재료는 청쑥색 바위가 생산된 관산읍 죽청 앞 바다에서 채석하여 수레로 현 장소인 방촌유물전시관 앞까지 이동하였다.

하단부 거북 좌대 석재는 건너편 지석묘군(支石墓群) 내 바위를 사용하여 석공 여러 명이 참여한 큰 공사였다고 한다.

헌성(獻誠) 내역은 관산읍 방촌에서는 사손(嗣孫) 계문(啓文) 등 13명, 대덕읍 초당 만기(萬基) 등 4명, 안양면 기산 신권(信權) 등 18명, 관산읍 와룡 성권(聖權) 등 9명, 장동면 율곡 계래(啓來) 등 2명, 유치면 단산 경규(璟奎) 등 34명, 관산읍 당동 계복(啓馥) 등 2명, 보성군 회령 계춘(啓春) 등 9명 총 91명의 직계후손이 헌성에 참여하였다.

또한 부산면 기동 계래(啓來) 등 5명이 개별 헌성에 참여하였다. 판서대종중, 화원소종중, 대문중, 청계파종중, 무기계중, 판사파종중, 훈도파종중, 운암파종중, 안항파종중, 양곡파종중, 서원계중 등 9개 종ㆍ문중(宗·門中)과 2개 계(契)에서 헌성 참여하였다. 의연비(義捐碑)는 근수 때 세우지 못한 것을 2003년 5월에 판서종중과 방촌리 묘선계(墓先契)에서 신도비 뒤쪽에 세웠다.

위덕화의 묘소는 회진면 대리(舊 德島)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장소에 신도비를 세운 연유는 비석을 세울 당시 대리는 연육(連陸)이 되지 않았고, 종손 위계문의 소유 밭(田)이어서 현 자리에 세웠다. 회진면 대리는 1964년 관덕지구 간척사업이 조성되면서 연육되었다.

公의 교지는 11매가 현존하며 방촌유물전시관에 전시 소장되어 있다.

후손들은 관산읍 방촌, 당동, 용전, 대덕읍 초당, 도청, 김제시 월현, 안양면 기산, 당암, 여수시 개도, 용산면 모산, 장동면 율곡, 유치면 단산, 보성군 회천면 도강, 웅치면 유산, 예천군 효갈 등 지역에서 세거하였다.
현대의 대표적 인물은 위성동(송원대학교 총장), 위행복(문학박사, 한양대 교수), 위구복(의학박사, 병원장), 위승훈(회계사), 위태웅(프로바둑기사), 위대훈(변호사), 위계점(행정학박사, 에스티유니타스 숨마투스 행정학 교수), 위계찬(법학박사, 한양대 교수), 위재춘(여수 여상목재 대표), 위광환(나주시부시장), 위성식(체육학박사 고려대 교수, 한국레크리에이션협회 회장), 위상양(의학박사 전북대 의대 교수), 위성곤(국회의원 제주도 서귀포), 위성국(부장 검사), 위승호(육군 중장, 정책연구관) 등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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