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뒷산을 산책 하다가 외진 모양의 차나무 한그루와 조우하였다.
그리 건강해 보이지 않은 차나무는 그래도 제법 여문 잎새를 떨치고 있었다.
그 잎새를 보니 문득 하세월이 금새 유월이구나.그러면 다인들은 진즉에 자생의 찻나무를 찾아 기슭과 계곡을 헤메며 여린 찻잎들을 따서 덖음차를 구중구포 하고 청태전을 빚고 황차를 말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장흥의 야산에서 영롱한 잎새로 생성 하다가 한 웅큼의 차로 환생한 향기로운 음료가 간절하게 다가 오는 겄이었다.
금년에는 어느 지인이 당신의 손속이 베인 찻봉지를 보시할까. 은근히 기다려 지는 산책길이었다. 그 길목에 유월의 신록은 충만한 생성의 기운과 함께 심신의 갈증을 충동질 하고 있었다.

내 고향 부산면 용반리  선영 아래  기슭에는 야생의 차나무들이 지천으로 자생하고 있다.
그 키작은 관목의 상록수들은 겨울이면 더 푸른 기운을 떨치며 야산의 생성을 주도하고 있는듯 보였다. 더불어 혹한의 추위나 함빡 내린 눈발의 행간에서 함초롬히 꽃을 피우는 경이로운 경관을 연출 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동樵童이던 우리들은 겨울 땔나무를 채취 하면서 그 푸른 잎새 때문에 쉽게 손대지 않았던 효용없는 잡목일 뿐이었다.
초동들이 외면 하는 잡목의 차나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야물게 익은 차돔박(차나무 열매)을 한웅큼 따기도 하였고 연초록의 튼실한 차잎을 정갈하게 채취해서 집으로가져오곤 하였다.차돔박은 마당 한켠에 파종 하였고 찻잎은 깨끗이 씻어서 양은 그릇에 담아 여물 솥에서 쪄내는 겄이었다. 쪄낸 찻잎은 그늘에 말리었지만 우리들은 간식거리도 되지않은 말린 찻잎에 관심이 없었다.그렇게 잘 말린 찻잎은 우리 형제들이 고뿔 기운이 들어 콜록 거리면  팔팔 끓인 찻물로 우려 한 그릇씩  먹게 하였다.
그리고 어느 해 초겨울 어머니가 심은 차나무에서 몇송이의 하얀 꽃이 피어 있던 정경은 설명할 수 없는 유년의 추억으로 어슴프레 간직되고 있다.

오래전에 지인 한 분이 청태전을 선물해 주었다.
썩 매력적이지 않은 색깔의 고형固形을 정성스럽게 포장한 이 차들이 장흥의 유명한 청태전이라는 설명과 함께 그 효능과 맛에 대한 자상한 설명이 곁들여진 선물이었다. 기왕에 청태전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은 있었지만 예사롭지 않은 포장으로 언뜻 과분해 보이는 청태전의 선물은 적이 부담 스럽기 까지 하였다. 양력 새 해 정월 안팎에 예사롭지 않은 폭설로 몇일 발이 묶이면서 서가를 정리 하고 그간의 메모들을 정독하고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다가 문득 청태전이 생각나서 물을 끓였다. 서툴기는 하지만 아내와 둘이서 마주 앉아 마실 요량이어서 “청태전 우리는 방법”을 참고 하여 제법 정성을 들여 찻물을 우려 내었다.
조금은 번거롭다 싶게 우려낸 찻물을  백자의 찻잔에 따르고 난 후에 나는 이 예사롭지 않은 찻덩이가 표현해 내는 색깔과 맛에 이윽한 감동을 받았다. 우선은 폭설로 막힌 외부와의 소통에 조급해 지던 심정이 차분하게 정리 되고 색깔과 맛의 은은함과 여운에 몰입해 가는 심신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 참 오묘 하구나. 서너잔을 거푸 마시었지만 어떤 부담도 없이 몸과 마음을 은근한 온기로 덮혀 오는 기운이 절묘 하였다. 하여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면서 지난 언행을 유추 하여 혹은 반성하고 혹은 다짐 하는 사유의 시간으로 승화 되는 겄이었다.

문득, 근세의 큰 위인이었던 다산정약용선생의 유난한 차사랑에 대한 일화가 떠오르는 겄이었다. 1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남도의 벽촌인 강진의 귤동에서 보내면서 유배지의 소외와 고통의 심화를 이겨내고 방대한 학문의 업적을 이룬 그 이면에는 차를 우려내고 음미 하면서 사유의 시간으로 승화한 덕분이 아니었을가.
언제였던가. 다산의 차이야기를 담은 서책에서 읽은 걸명소(乞茗疏)라는 편지를 읽은 생각이 났다.
유배 생활에서 교류 하던 지인이었던 승려 아암 혜장에게 보냈다는 편지의 구절이다.
“(전략) 이제 나에게 병이 있어 애오라지 차를 구걸하는 심정을 담아 보냅니다.
  가만히 아뢰오니, 고통이 많은 이 세상 중생을 제도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보시를 베푸는 일이며, 이름난 산의 좋은 차를 몰래 보내주는 것이 가장 상서로운 일이 아닐까요.
  모쪼록 목마르게 바라고 있음을 생각하고, 은혜 베풀기에 인색하지 마옵소서”유배와 소외의 고통을 학문으로 승화 시킨 다산이 마치 구걸하는 심정으로 지인에게 세 번씩이나 차 한봉지를  보내 주기를 애소 하는 편지를 쓴 그 심정이 헤아려 진다고 하면 너무 방자한 해석일까.

수십여년전 폭설의 계절 어느 한 날 청태전과의 만남으로 우리 장흥의 고유한 전통차인 청태전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 금년에는 유월의 신록에 기대어 다시 청태전의 향과 색깔을 그리워 하고 문득 그 차 한잔을 우려 내는 심정으로 단아하고 세밀한 일상을 꿈꾸어 본다. 자주 청태전을 우려 내며 이 땅의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삶의 현장에 대한 진지한 사유의 시간을 가지리라 다짐해 본다 더불어 그 사유의 행간에서 아름다운 화두들을 끌어 내고 이웃들과 공유 하는 세월을 소망 하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이 장흥 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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