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풍김씨 富春亭’의 전사(前史,前事)로서 이제 ‘남평문씨 富春亭’시대를 살펴본다. 그 시절 富春亭에 관련하여 여러 추측들이 오가는 현실이다. 돌이켜 ‘문씨 부춘정’ 사연의 배경에는 그 시절 남평문씨 집안과 수원백씨 집안의 교분이 있었기에 <기봉집, 옥봉집>에 등장하는 ‘문씨형제, 문씨인물’들을 알아야, ‘용호, 청영정, 부춘정’에 관련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그 시절 그 형제들의 생몰연대부터 정리해보자.

-백씨 3형제, 기봉 백광홍(1522~1556), 1549년 사마 양시, 1552년 대과/ 풍잠 백광안(1527~1567), 40세 타계 / 옥봉 백광훈(1537~1582), 1564년 진사

-문씨 3형제, 춘정 문위천(1529~1573), 자 백장(伯章)/ 읍청정 문위지(1532~1610), 자 중장(仲章). 무반 만호/ 풍암 문위세(1534~1600), 자 숙장(叔章), 1567년 진사, (위 문씨 3형제들은 해남윤씨 ‘귤정 윤구’의 생질들이다.)

-문씨후손들, 청영정 문희개(1550~1610), 자 순거, 1576년 진사, 위 ‘춘정 문위천’의 아들 / 용호 문익명(1577~ ), 위 ‘청영정 문희개’의 아들.

<기봉집>에 나온 첫 사연이다. 기봉 백광홍이 주도했었을까?

백씨 형제들은 보림사 서계(西溪)에서 문씨 형제들과 ‘삼야(三夜)’를 함께 보냈다. 기봉은 그 친교 사연을 詩,<증별중장(贈別仲章)>에 남겨 두었고, 그 무렵에 서로 각별해졌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봉집>에는 <贈문伯章 2수, 贈別仲章>이, <옥봉집>에는 <叔章 관련 2수, 순거 관련 2수>가 실려 있다. 당시 문씨들은 ‘부동방 춘정(春亭)’ 마을에서 살았으며, <문씨 집안기록> 등에 따르면, 그 부근 예양강변에 ‘伯章 문위천- 청영정’, ‘仲章 문위지- 읍청정’, ‘叔章 문위세- 풍암서실’을 두고 3형제가 척령(??)지세로 정립(鼎立)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문희개’와 1567년 진사시 동방인 ‘백호 임제(1549~1587)’가 아마 1583년경 장흥 방문길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詩, <청영정(淸暎亭)> <贈읍청정 주인>으로 재확인된다.

여기서 몇 의문점을 검토해보자. 첫째, ‘옥봉 백광훈(1537~1582)’이 13세 연하 후배인 ‘순거 문희개(1550~1610)’를 존경한 나머지 (또는 ‘문희개, 문익명 부자’ 또는 ‘문익명 형제’를 二龍으르 보고서) 그 ‘용호(龍湖) 각자’를 써 바쳤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미 1582년에 타계해버린 ‘백광훈’이 ‘문희개’가 일시 은거하던 1585년경 무렵에 (이때 ‘문희개’의 진사시 동방인 ‘계은 이정립’이 ‘장흥 淸映亭’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또는 정유재란이 끝나고서 은거하던 시점에 ‘옥봉’이 그 정자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 부분 사정을 오도한 일부 기록은 크게 잘못된 것. ‘옥봉’의 사후(死後) 훗날에 ‘문희개’ 또는 ‘문익명’이 ‘용호(龍湖) 각자’를 스스로 옮겼을 가능성은 있겠다. 둘째, ‘청영정’은 ‘백장 문위천’이 창정하고 그 아들 ‘문희개’가 이어 받은 것인데, ‘그 청영정’은 ‘백호 임제’가 남긴 詩 <용호(龍湖) 청영정>과 서로 다르다. 또한 ‘옥봉 백광훈’이 남긴 詩 <龍湖잡영>과 <淸暎亭 사시詞>의 공간과도 전혀 다르다. 우리들은 어떤 지명의 당대성(當代性)과 증복성(重複性) 여부를 체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부춘정, 용호, 청영정’ 명칭이 등장만 하면 무턱대고 ‘장흥 용호, 장흥 부춘정, 장흥 청영정’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터, 기실 ‘富春亭, 龍湖, 창랑정’ 등은 전국적으로 흔한 명칭이니, 그 시문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묻노니, 이른바 ‘장흥 용호 부춘정(청영정)’ 그 자리가 과연 금배옥잔(金杯玉盞)과 기생풍악이 어울리며, 잦은 이별이 이루어지던 나루터 장소이던가? 도처에서 선비들이 모여 새로운 교분을 나누던 곳이던가? 만약 그렇게 유명한 취루(翠樓) 풍류처였다면 왜 그 당대장흥의 다른 선비들은 ‘그런 용호, 그런 부춘정, 그런 청영정’을 눈 앞에 두고 단 한 마디 말도 안 남겼다는 말인가? 장흥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셋째 청영정(淸瑛亭) 표기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사정도 정리되어야 한다. ‘淸瑛亭, 淸映亭, 淸暎亭, 淸潁亭’으로 등장한다. 넷째 그 집안 후손 ‘장육재 문덕구(1667~1718)’의 <예양구곡(九曲)>을 보더라도 ‘제6곡 부춘정’과 ‘제8곡 용호’는 서로 구별된 장소이다, 더구나 훗날엔 그 상류에 ‘최씨 용호정’까지 따로 들어섰지 아니한가? ?

필자는 “<옥봉집>에 나온 <용강사(龍江詞)>와 <龍湖>는 ‘장흥 용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이미 논증한 바 있다. 오늘 말하는 ‘청영정’도 다시 정리하자면, ‘조용한 시골 장흥 정자‘와 ’한강 龍湖의 풍류처 정자‘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그런 사정 때문에 훗날 수원백씨 후손 ‘계서 백진항(1760~1818)’이 ‘옥봉 백광훈’의 방문 기행(紀行)처에 관한 여러 차운詩를 시도하면서도 ‘청영정, 용호’에 대한 차운詩를 남길 수 없었던 것이리라. 또한 그 시절 ‘문씨 청영정’을 계승하여 그 자리에 들어섰을 후대정자에 대해 1601년경 장흥판관을 역임했던 ’유숙(1564~1636)‘은 1612년경 ’문씨별업(別業)‘이라 지칭했고,1722년경 방문객 ’이하곤(1677~1724)’은 ’문씨별업,富春亭‘이라 불렀다.

장흥출신 ’방호 김희조(1680~1752)‘는 ’富春亭, 부춘어화(富春漁火)‘를 남겼다. 과연 원래 있던 ’청영정‘이 언제 富春亭으로 개명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무렵에 富春亭이 따로 신축되었는지는 더 규명할 과제이다. (왜란을 겪고 소실된 폐허에 신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마무리한다. 오늘 정자는 비록 ’청풍김씨 富春亭‘으로 빛날지라도 그 앞을 흐르는 예양강물은 ‘옥봉 백광훈’, ‘문위천,문의지.문희개’, ‘백호 임제’ ‘청영정, 문씨별업, 富春亭’,‘취흘 유숙. 담헌 이하곤’,‘방호 김희조’, ‘청풍김씨 富春亭’에 얽힌 사연을 가리지 않고 두루 품었을 것이니, 한낱 상투적 자랑거리로만 반복하는 富春亭 홍보수준을 벗어나 그 ‘예양강 시절에 소쇄 담공 소박했던 강정 부춘정(富春亭)’을 오고간 사람들 사연을 좀 더 차분하게 되돌이켜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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