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
‘그 시절 문씨 부춘정(富春亭)’- 예양강 8정자(3)예강칼럼(75)/박형상/변호사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6.21  11:44:54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청풍김씨 富春亭’의 전사(前史,前事)로서 이제 ‘남평문씨 富春亭’시대를 살펴본다. 그 시절 富春亭에 관련하여 여러 추측들이 오가는 현실이다. 돌이켜 ‘문씨 부춘정’ 사연의 배경에는 그 시절 남평문씨 집안과 수원백씨 집안의 교분이 있었기에 <기봉집, 옥봉집>에 등장하는 ‘문씨형제, 문씨인물’들을 알아야, ‘용호, 청영정, 부춘정’에 관련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그 시절 그 형제들의 생몰연대부터 정리해보자.

-백씨 3형제, 기봉 백광홍(1522~1556), 1549년 사마 양시, 1552년 대과/ 풍잠 백광안(1527~1567), 40세 타계 / 옥봉 백광훈(1537~1582), 1564년 진사

-문씨 3형제, 춘정 문위천(1529~1573), 자 백장(伯章)/ 읍청정 문위지(1532~1610), 자 중장(仲章). 무반 만호/ 풍암 문위세(1534~1600), 자 숙장(叔章), 1567년 진사, (위 문씨 3형제들은 해남윤씨 ‘귤정 윤구’의 생질들이다.)

-문씨후손들, 청영정 문희개(1550~1610), 자 순거, 1576년 진사, 위 ‘춘정 문위천’의 아들 / 용호 문익명(1577~ ), 위 ‘청영정 문희개’의 아들.

<기봉집>에 나온 첫 사연이다. 기봉 백광홍이 주도했었을까?

백씨 형제들은 보림사 서계(西溪)에서 문씨 형제들과 ‘삼야(三夜)’를 함께 보냈다. 기봉은 그 친교 사연을 詩,<증별중장(贈別仲章)>에 남겨 두었고, 그 무렵에 서로 각별해졌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기봉집>에는 <贈문伯章 2수, 贈別仲章>이, <옥봉집>에는 <叔章 관련 2수, 순거 관련 2수>가 실려 있다. 당시 문씨들은 ‘부동방 춘정(春亭)’ 마을에서 살았으며, <문씨 집안기록> 등에 따르면, 그 부근 예양강변에 ‘伯章 문위천- 청영정’, ‘仲章 문위지- 읍청정’, ‘叔章 문위세- 풍암서실’을 두고 3형제가 척령(??)지세로 정립(鼎立)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문희개’와 1567년 진사시 동방인 ‘백호 임제(1549~1587)’가 아마 1583년경 장흥 방문길에 쓴 것으로 짐작되는 詩, <청영정(淸暎亭)> <贈읍청정 주인>으로 재확인된다.

여기서 몇 의문점을 검토해보자. 첫째, ‘옥봉 백광훈(1537~1582)’이 13세 연하 후배인 ‘순거 문희개(1550~1610)’를 존경한 나머지 (또는 ‘문희개, 문익명 부자’ 또는 ‘문익명 형제’를 二龍으르 보고서) 그 ‘용호(龍湖) 각자’를 써 바쳤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미 1582년에 타계해버린 ‘백광훈’이 ‘문희개’가 일시 은거하던 1585년경 무렵에 (이때 ‘문희개’의 진사시 동방인 ‘계은 이정립’이 ‘장흥 淸映亭’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또는 정유재란이 끝나고서 은거하던 시점에 ‘옥봉’이 그 정자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이 부분 사정을 오도한 일부 기록은 크게 잘못된 것. ‘옥봉’의 사후(死後) 훗날에 ‘문희개’ 또는 ‘문익명’이 ‘용호(龍湖) 각자’를 스스로 옮겼을 가능성은 있겠다. 둘째, ‘청영정’은 ‘백장 문위천’이 창정하고 그 아들 ‘문희개’가 이어 받은 것인데, ‘그 청영정’은 ‘백호 임제’가 남긴 詩 <용호(龍湖) 청영정>과 서로 다르다. 또한 ‘옥봉 백광훈’이 남긴 詩 <龍湖잡영>과 <淸暎亭 사시詞>의 공간과도 전혀 다르다. 우리들은 어떤 지명의 당대성(當代性)과 증복성(重複性) 여부를 체크할 수 있어야 한다. 그저 ‘부춘정, 용호, 청영정’ 명칭이 등장만 하면 무턱대고 ‘장흥 용호, 장흥 부춘정, 장흥 청영정’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터, 기실 ‘富春亭, 龍湖, 창랑정’ 등은 전국적으로 흔한 명칭이니, 그 시문 맥락을 살펴보아야 한다.

여기서 묻노니, 이른바 ‘장흥 용호 부춘정(청영정)’ 그 자리가 과연 금배옥잔(金杯玉盞)과 기생풍악이 어울리며, 잦은 이별이 이루어지던 나루터 장소이던가? 도처에서 선비들이 모여 새로운 교분을 나누던 곳이던가? 만약 그렇게 유명한 취루(翠樓) 풍류처였다면 왜 그 당대장흥의 다른 선비들은 ‘그런 용호, 그런 부춘정, 그런 청영정’을 눈 앞에 두고 단 한 마디 말도 안 남겼다는 말인가? 장흥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셋째 청영정(淸瑛亭) 표기가 경우에 따라 다르다는 사정도 정리되어야 한다. ‘淸瑛亭, 淸映亭, 淸暎亭, 淸潁亭’으로 등장한다. 넷째 그 집안 후손 ‘장육재 문덕구(1667~1718)’의 <예양구곡(九曲)>을 보더라도 ‘제6곡 부춘정’과 ‘제8곡 용호’는 서로 구별된 장소이다, 더구나 훗날엔 그 상류에 ‘최씨 용호정’까지 따로 들어섰지 아니한가? ?

필자는 “<옥봉집>에 나온 <용강사(龍江詞)>와 <龍湖>는 ‘장흥 용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이미 논증한 바 있다. 오늘 말하는 ‘청영정’도 다시 정리하자면, ‘조용한 시골 장흥 정자‘와 ’한강 龍湖의 풍류처 정자‘로 구별할 수 있을 것. 그런 사정 때문에 훗날 수원백씨 후손 ‘계서 백진항(1760~1818)’이 ‘옥봉 백광훈’의 방문 기행(紀行)처에 관한 여러 차운詩를 시도하면서도 ‘청영정, 용호’에 대한 차운詩를 남길 수 없었던 것이리라. 또한 그 시절 ‘문씨 청영정’을 계승하여 그 자리에 들어섰을 후대정자에 대해 1601년경 장흥판관을 역임했던 ’유숙(1564~1636)‘은 1612년경 ’문씨별업(別業)‘이라 지칭했고,1722년경 방문객 ’이하곤(1677~1724)’은 ’문씨별업,富春亭‘이라 불렀다.

장흥출신 ’방호 김희조(1680~1752)‘는 ’富春亭, 부춘어화(富春漁火)‘를 남겼다. 과연 원래 있던 ’청영정‘이 언제 富春亭으로 개명되었는지, 아니면 어느 무렵에 富春亭이 따로 신축되었는지는 더 규명할 과제이다. (왜란을 겪고 소실된 폐허에 신축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제 마무리한다. 오늘 정자는 비록 ’청풍김씨 富春亭‘으로 빛날지라도 그 앞을 흐르는 예양강물은 ‘옥봉 백광훈’, ‘문위천,문의지.문희개’, ‘백호 임제’ ‘청영정, 문씨별업, 富春亭’,‘취흘 유숙. 담헌 이하곤’,‘방호 김희조’, ‘청풍김씨 富春亭’에 얽힌 사연을 가리지 않고 두루 품었을 것이니, 한낱 상투적 자랑거리로만 반복하는 富春亭 홍보수준을 벗어나 그 ‘예양강 시절에 소쇄 담공 소박했던 강정 부춘정(富春亭)’을 오고간 사람들 사연을 좀 더 차분하게 되돌이켜 보았으면 한다.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칼럼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