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장흥군 안양면 용안로 535-89, 모령리 봉동(鳳洞 샛골)에는 장흥고씨 소유 봉강사(鳳岡祠)가 위치한다.

 이곳은 문열공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 충의공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 효열공 준봉(?峰) 고종후(高從厚), 호조참의공 기봉(箕峰) 고수위(高守緯), 곡성현감공 문성(文成) 고언장(高彦章)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954년(甲午) 설단(設壇)하고 陰 9월 15일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향사해왔다. 이후 1979년(己未) 후손들의 헌성으로 사당을 신축하여 위패를 봉안하여 오늘에 이른다.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2015년부터 陰 10월 15일 후손들이 제향을 봉행한다. 사당은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봉안한 위패(位牌)는 문열공 김천일을 주벽으로 좌측부터 배향되었으며, 이런 형태를 연벽식(連壁式)이라 한다. 본 사당은 액호를 걸지 않고 내삼문에 액호를 걸어 다른 사우(祠宇)와 비교 된다.

●배향된 다섯분의 행장을 살펴본다.

◆김천일(1537~1593) : 언양人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다.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1573년(癸酉) 군기시주부, 1578년(戊寅) 임실현감과 이후 지평과 담양부사, 한성서윤, 수원부사를 지냈다. 1592년 6월 임진왜란 때 고향 나주에서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에게 글을 보내 거의(擧義)하고 의병을 일으켜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갔다. 조정에서 8월 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를 받고 장례원판결사(掌禮院判決事)에 임명되었다. 강화(江華)로 진을 옮긴 후 연안 각처에 주둔한 왜적을 소탕하고 배를 몰아 양화도에서 대승하였다. 1593년 6월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될 무렵 아들 상건(象乾)과 촉석루 아래서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좌찬성, 영의정에 추증되고 나주시 정열사, 진주시 창렬사, 순창군 화산서원, 정읍시 태인 남고서원, 임실군 학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최경회(1532~1593) : 해주人으로 자는 선우(善遇), 호는 일휴당(日休堂)이며,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에 참전한 의병장이다. 1561년(명종 16) 진사가 입격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寧海郡守)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전공을 세워 이듬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승진했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순절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화순군 포충사, 진주시 창렬사에 배향되었다.

◆고종후(1554~1593) : 장흥人으로 자는 도충(道?), 호는 준봉(?峰), 시호는 효열(孝烈)이며 공조참의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이다.
1570년 진사가 된 후 1577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78년 임피현령을 지냈고 지제교로 선임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아버지 고경명을 따라 의병을 일으키고 금산전투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1593년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의병장(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여러 곳에서 큰 功을 세웠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을 사수하다가 왜병에게 함락될 때 김천일, 최경회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그의 3부자를 3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고 광주광역시 포충사, 진주시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정충단비(旌忠壇碑)를 세우고 정조 1786년(丙午)에 부조(不?)의 전(典)을 내렸다.

◆고수위(1531~1593) : 장흥人으로 자는 천여(天與), 호는 기봉(箕峰)이다.
명종조 때 사마시에 입격하고 소재(蘇齋) 노수진, 송천(松川) 양응정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백두서인으로 제술종사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창의사 김천일의 천거로 의병청 향량유사가 되어 각지에서 큰 功을 세웠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 등 여러 장수와 함께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고언장(1539~1597) : 장흥人으로 자는 사문(士文), 호는 문성(文成)이다. 정유재란 때 첨정으로 거의(擧義)하고 의병장 최경장(1529~?) 군에 종군하여 유격전술로 전국 각지 전투에서 많은 功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훈록 되고 곡성현감에 제수되었다.

봉강사의 강당은 추모재(追慕齋)이다. 1910년(庚戌)에 건축한 묘각으로 농한기에는 후손들의 강학과 종중회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건물은 세월이 흘러 노후 되자 2006년 여러 종친들의 발의로 재각 신축추진위원회(회장 고영찬, 1927년생, 용산면 청전마을 거주)가 구성되었다.

문유사 고영길(1938~2013)의 열성적인 추진과 후손들의 적극적 헌성 참여로 2007년(丁亥) 5월 4칸 건물로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량문(上樑文)은 前 용산면 노인회장을 역임한 안일남(죽산人, 1929~2013, 월림리 태생)이 썼다. 이때 기존의 외삼문(外三門)은 철거하고 신축하지 않아 현재 외삼문이 없으며, 그 자리에 관리사 1동을 현대식으로 신축하여 관리인이 거주하고 있다.
신축시 재원은 후손 헌성금 120,000,000원과 전라남도 지원금 100,000,000원 이다. 이중 200,000,000원 가량을 들여 재각 건립 숙원사업을 완료하여 후손의 단합과 숭조돈목(崇祖敦睦)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강당 처마에는 해산(海山) 정영주(~?)가 쓴 추모재 액호 1점, 수원人 금강(金岡) 백영윤(1884~?) 근고(謹稿) 봉강사 원운과 창령人 조희수(~?) 근고(謹稿) 차운 1점, 1957년(丁酉) 봄 1월 월성人 송포 정노수(1877~1964, 관산읍 죽교 태생) 선생 근지(謹識) 봉강사기(鳳岡祠記) 1점 등 3점을 기존 건물에서 옮겨 걸었다. 또한 기존에 걸려 있었던 1953년(癸巳) 9월 후손 고재근(1875~1944) 근찬(謹撰) 봉강사서(鳳岡祠序), 1955년(乙未) 3월 고광칠(1897~1984) 근찬(謹撰) 봉강사기(鳳岡祠記), 1971년(辛亥) 9월 김승식(영광人 1896~1979, 장흥읍 건산리 태생, 제 2대 장흥향교 전교 역임) 근찬(謹撰) 고광수제전치수공적기(高光洙祭田治水功績記) 등 시운 편액 3점은 걸지 않고 창고에 보관되고 있다.
※高光洙祭田治水功績記는 1970년 3월 3일~1971년 8월 20일 간 제 16대 장흥군수를 역임한 고광수(나주시 태생)의 제사 밭의 물 관리 공적을 기린 내용임.

이곳에서는 매년 陰 10월 15일 봉강사에 배향된 7位 제향 봉행을 마치고 7세 생원공 고자량(~?) 이하의 선조 43位에 대한 가을 시제를 모신다.
봉강사는 600여평 대지에 사당 1동, 내삼문 1동, 강당 1동, 관리사 1동과 봉강사 중건기와 연혁 표지석 2기, 헌성 의연비 등 비석 8기, 주차장 등 시설물이 조성되어 있다. 재원(財源)으로는 용산면 포곡마을 뒤 임야와 모령리 봉강사 일대 임야 7정과 답(畓) 20두락, 밭(田) 12두락 가량이다. 장흥고씨 생원공파종중의 소유로 관리되고 있다.
후손들의 대표적 세거지는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 이다. 후손들은 학문을 익혀 조상을 숭상하는 유교문화를 중요시해왔다. 이중, 고영재(1948년생) 前 경향신문사 사장, 고영록(1949년생) 변호사, 고낙섭(1949년생) 회계사, 고홍천(1952년, 유치면 대리 태생) 前 농협중앙회 감사, 고영윤(1958년생) 前 영암군부군수, 고영전(1955~2014) 前 판사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밖에 장평면 봉림리, 용산면 운주리, 화순군 춘양면 화림리 광대마을, 곡성군 삼기면 등이 또다른 후손의 세거지 이다.
찾아가는 길은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 풍암마을 원형인터체인지에서 용산면 계산리 차동마을 방향으로 500여미터 가다보면 도로변 우측에 봉강사(鳳岡祠) 표석이 세워져 있다. 진입로 좌측 논에는 1973년(癸丑) 9월 후손 고임석(1931~2018) 근수(謹竪) 長興高氏世葬碑가 위치한다. 야산 아래 농로를 따라 400여미터 들어가면 봉강사 재각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이 농로는 2007년 장흥군에서 시멘트로 포장하여 지역 주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다.

봉강사 탐방에는 장흥군 향토문화사에 큰 관심을 가져온 장흥군의회 백광철 의원님이 바쁜 군정임에도 동행하여 큰 도움을 주었다. 장흥고씨 생원공파종중에서는 고연두(1951년생)님, 고황식(1965년생)님이 현장에 나와 안내해주었다. 동행과 협조에 깊이 감사드린다.

※자문/고영도(1949년 모령리 태생, 광주광역시 거주), 고연두(1951년 부산면 내안리 태생, 용산면 풍길마을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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