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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효자공 정광노 묘역(墓域)(3)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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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6.07  16:2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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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면 계산리 산 3-1번지, 차동마을 뒤 수리봉(鳶峯 140m) 아래에는 충장공 정분(?~1454) 등 7현(顯)의 위패가 봉안된 충렬사(忠烈祠), 진주정씨삼세충효문 정려각, 영모재(永慕齋), 불천지위 부조묘(不遷之位 不?廟) 등이 위치한 진주정씨의 성지(聖地)이다.

   
 

충렬사 뒤 우측 자락에는 조선조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 정분의 아들 효자공 정광노 등 후손 묘 11기가 위치하고 있다. 이곳 묘역은 수양대군 일파가 단종을 폐하고 3相(황보인, 김종서, 정분) 등을 사사하면서 집권하자 정분의 아들 정원은 정광노로 개명하고 현재의 장흥읍 충렬리에 은거하였다. 진사 백 회(白 繪)의 도움을 받아 연명하면서 사위가 되었다. 이후 1496년 타계하자 이곳에 안장되었다. 1746년(丙寅 영조22) 충장공 정분을 복관하여 신원(伸寃)되었으며, 1758년(戊寅) 충장(忠莊) 시호를 내렸다. 1765년(乙酉) 묘소에서 지석(誌石) 출토로 269년동안 묻혀 있던 충장공 정분, 효자공 정광노 부자의 행적이 새롭게 확인되고, 1786년(丙午) 충렬사를 사액하였다. 1804년(甲子) 충신의 표상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1808년(戊辰) 부조묘(不?廟) 지위를 받았다. 묘역은 2013년(癸巳) 효자공 15세손 정한우(일본 거주) 등 후손 헌성으로 정화사업을 완료하였다. 역사적 흔적이 남아 있어 묘의 위쪽부터 아래 쪽으로 위치한 순에따라 소개하고자 한다.

■ 효자공 정광노(15세 1425~1496) : 초휘(初諱)는 정 원(鄭 遠) 자는 기지(器之), 자호는 광노자(狂奴子), 개명한 휘(諱)는 정광노(鄭光露)이다. 1425년 세종 7년 출생하니 3일 후 조고(祖考) 문정공(文定公)이 안아보고 크게 기뻐하면서 이름을 정 원(鄭 遠) 자를 기지(器之)라 지어 주고 가솔에게 말하기를 10여년 후 가문과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 이 손자로 하여금 종사(宗祀)가 끊이지 않으리라 말하였다. 문종(文宗)이 승하하자 원(遠)은 시국이 어지러움을 예지하고 부친 우의정 정분(鄭?)에게 퇴관하여 화(禍)를 피할 것을 간곡히 진언을 했으나 부친은 사생이지(死生以之)라 넉자를 서시(書示) 하였다. 公은 부친의 뜻을 알고 광노자(狂奴子)라 자호 하고 거짓으로 광인(狂人) 행세하며 남쪽으로 부지거향(不知去向) 하셨다. 단종조 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난(癸酉靖亂) 다음해  8월 20일 유배지 전라도 낙안에서 부친 정분에게 사약이 내릴 적에 정 원(鄭 遠)이 형장에 돌입 슬피 호곡(呼哭) 하니 정 분이 조용히 말씀을 하시되 "미친 종아 미친 종아 어서가거라, 어서가거라." 광노광노(狂奴狂奴) 수거수거(須去須去) 하니 아들 정 원(鄭 遠)은 존사(存祀)의 뜻을 품고 이름을 정광노(鄭光露)로 개명하고 장흥부로 은신하였다. 광노자(狂奴子)는 임종에 이르러서 세 아들에게 신분을 감추고 숨어서 살라고 유계(遺戒) 하였다. 빙부 진사 백 회(白 繪) 유언으로 묘 아래에 장사하니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차동 임병지원(壬丙之原) 이다. 배는 정부인 창녕성씨는 도총관(都聰管) 성 승(成 勝)의 딸로 충문공(忠文公) 성삼문의 매(妹)이다. 정부인 수원백씨(水原白氏)는 진사 백 회(白 繪)의 딸로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수원백씨 묘소는 公의 묘소 상위 임좌(壬坐)이다.

1) 18세 學生鄭公諱希章之墓  配孺人興德張氏雙兆(2기)

2) 22세 梅軒居士晉州鄭公諱晟之墓  配孺人靈光金氏墓合封(1기)

3) 孝子晉州鄭公諱光露之配  貞夫人水原白氏之墓(1기)

   
 

4) 15세 孝子晉州鄭公諱光露之墓  貞夫人昌寧成氏부左合펌(1기)

   
 

구)원수형 묘갈명 前書는 狂奴子鄭公之墓  配水原白氏펌上 이라 새겼다.
후면에 公諱遠字器之晉州人大提學 諡文定公諱以吾孫右議政 諡忠莊公諱분子也 공의 휘는 원(遠)이요 자는 기지(器之)시다. 진주인으로 대제학 시문정공(諡文定公) 휘 이오(以吾)의 손자요. 우의정으로 시호는 충장공이신 휘 분의 아드님이 되신다. 라고 비문의 서두에 기록되어 있다.
崇禎紀元後四甲辰十月(1844년 10월) 10대손 인학(1774~1846) 근술(謹述)하다. 11대손 효충(1776~1869) 립(立)하다. 11대손 사충(~?) 근서(謹書)하다.

 

   
 

새로운 묘갈명 전서에 孝子晉州鄭公諱光露之墓  配貞夫人昌寧成氏부左合펌  配貞夫人水原白氏부上壬坐라 새겼다.
2013년(癸巳) 5월 진주정씨 충장공파종중 근찬(謹撰)하다. 효자공 15대손 일본거주 한우(1926~2018) 근수(謹竪)하다.

5) 20세 通德郞晉州鄭公諱軸之  配恭人寶城宣氏墓合封(1기)

   
 

6) 19세 通政大夫贈都承旨通訓大夫行海美縣監晋州鄭公名世之 配淑夫人淸風金氏墓合封(1기)

■ 도승지공 정명세(19세 1550~1593) : 자는 백시(伯時), 호는 독곡(獨谷)이며, 단종조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 정분의 5세손이다. 1570년(庚午 선조3) 식년 진사시에서 2등(二等) 2위로 입격하였다. 1579년(己卯 선조12) 식년 문과에서 병과(丙科) 15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사헌부 감찰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592년 해미현감을 재임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대를 이끌고 왜적과 싸웠다.
1593년 일본군은 전 해에 2만명의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실패한 진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함안(咸安), 반성(班城), 의령(宜寧)을 차례로 점령하고 3만7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이때 公은 군기사 첨정 겸 조방장이 되어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崔慶會), 의병복수장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城을 지키다가 순절하였다. 1609년(광해군 1년)에 도승지에 추증되고, 1611년 정려(旌閭)를 세웠다. 이후 1683년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配는 숙부인 청풍김씨(金氏)이다.
묘갈명 비신석 상단 두전(頭篆)은 贈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官正行通訓大夫海美縣監獨谷鄭公墓碣銘이라 새겼다.
萬曆二十一年癸巳六月倭陷晉州助防將鄭公名世隨金黃崔三將士日死之 만력 21년 계사(1593년) 6월 왜적에게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정명세는 김천일, 황진, 최경회 등과 함께 순국하셨다. 라고 비문의 서두에 기록되어 있다.
1900년(庚子) 8월 자헌대부 공조판서 지의금부사 월성人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 찬(撰)하다. 전자(篆字)는 참봉 행주人 송사 기우만(1846~1916) 선생 서(書)하다.
종8대손 방덕(1848~1903) 서(書)하다. 9대손 경흠(~?) 립(立)하다.

7) 孺人草溪卞氏之墓(1기)

8) 17세 晉州鄭公諱瑾之墓  孺人草溪卞氏펌上(1기

   
 

9) 16세 晦齊晉州鄭公諱變韶之墓  配孺人松京馬氏壬坐雙墳(2기)
묘소 앞 오석비는 2013년(癸巳) 5월 충장공파종중에서 근찬(謹撰)하다. 회제공 14대손 일본거주 한우(1926~2018) 근수(謹竪)하다.

자문 : 정용길(효자공 18대손 1959년생, 화순군 북면 서유리 태생,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 거주), 정연재(효자공 16대손 1963년생,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태생, 수원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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