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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서원, 충장공 정분(鄭 苯 ) 부조묘(不祧廟)와 유허비(遺墟碑)<2>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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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31  1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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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177-1번지 차동마을 수리봉 아래 수리골에 위치한 충렬사(忠烈祠) 내에는 조선조 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장공 정분(鄭분, ?~1454)의 부조묘(不조廟)가 있다.

부조묘란 불천위 제사의 대상이 되는 신주를 둔 사당을 말한다. 본래 4대가 넘는 조상의 신주는 사당에서 꺼내 묻어야 하지만 나라에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위는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가 된다. 따라서 불천지위가 된 대상은 사당에 계속 두면서 기제사를 지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부조묘가 등장한 것은 고려 중엽 이후 사당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불천위가 된 신주는 처음에는 무덤 밑에 설치할 것을 원칙으로 하였으나 종가 근처에 사당을 지어 둘 수 있게 됨으로써 부조묘가 등장하게 되었다. 숭유(崇儒)사상을 국가 이념으로 한 조선조에서 불천지위 부조묘는 가문의 큰 영광으로 받들었다. 장흥군 내에는 이곳 정분, 용산면 상금리에 위치한 정해군(貞海君) 백수장(1469~1543)의 별묘(別廟) 등 2곳의 부조묘가 위치하여 역사적 의미와 사료적 가치가 있다 사료되며, 당국과 장흥군민의 관심이 필요하다.
원래 충장공 정분의 부조묘는 1808년(戊辰 순조8) 진사 이기선 등의 상소로 나라의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옮기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모시도록 하는 부조지전(不조之典)의 특전을 받아 잡안에서 제사를 모셔왔다. 이러함은 1819년(己卯) 진주정씨 충장공파종중에서 간행한 "충효록(忠孝錄)"에서 뒷받침 하고 있다.
 

   
 

진주정씨 종파인 충장공파 종가는 정분의 아들 효자공 정광로(鄭光露 1425~1496)부터 현재의 장흥읍 충렬리에서 거주해왔다. 이후 15대 종손 정한종(1889~?)이 평장리로 이사하였으며, 1959년(己亥) 부조묘를 중건하였다. 16대 종손 정귀식(1921~?)을 거쳐, 17대 종손 정형용(1938~2016)이 거주하였다.
1980년경 순천시로 이사하면서 종택이 헐리게 되자 충장공파종중에서 현재의 장소인 충렬사 내 영모재(永慕齋) 강당에 제실을 마련하고 신주(神主)와 존영(尊影)을 옮겨 지금에 이른다.
제실에 신주와 존영이 모셔져 있고, 벽에 앙지당(仰止堂)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매년 음 9월 9일 충렬사 제향과 10월 13일 영모재에서 시제를 모실 때 별도로 제사를 드린다.

   
 

신주에는 顯十六代祖考大匡輔國崇祿大夫右議政 諡忠莊公府君神主 十六世孫貴植奉祀, 顯十六祖비貞敬夫人邊氏神主 十六世孫貴植奉祀, 顯十六代祖비貞敬夫人鄭氏神主 十六世孫貴植奉祀라 썼다. 이는 충장공 정분과 배(配) 원주변씨와 하동정씨 신주로 16대 종손인 귀식이 제사를 받들어 모셨음을 알 수 있다.

   
 

존영 좌측 상단에는 萬古之忠 :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終身之孝 : 부모를 내몸이 다하도록 영원히 모신다. 
見義授命 : 의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日月爭光 : 해,달빛을 다툴만한 업적이나 인덕이 뛰어난 인물이다. 라는 글이 남겨져 있다.

■정분(鄭분 ?~1454) : 진주人으로 자는 자외(子畏),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1416년(태종 16) 친시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421년(세종 3) 이조좌랑을 거쳐 1425년 병조정랑이 되었다. 1428년 사인(舍人)으로 함길도경차관(咸吉道敬差官)이 되어 수재민 구호에 공을 세웠다. 1430년 집의(執義)로서 성개(成개)의 노비사건을 계문(啓聞)하지 않은 죄로 유배되었다가 1432년 풀려나와 우승지,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그 후 공조참판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오고 1444년 예조참판, 호조판서를 지냈으며 1447년 좌참찬으로 숭례문(崇禮門)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1450년 우찬성으로 충청, 전라, 경상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직하였다. 1451년(문종 1) 좌찬성과 호조판사를 겸임하고 이듬해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문종의 고명지신(顧命之臣)으로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1453년(단종 1)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체찰사가 되어 임무를 마치고 귀로 중에 충주 용안역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해 낙안에 안치되었다가 사사(賜死)당했다. 그 후 1786년(정조 10) 사액 신원(伸寃)되었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상대동 산 3-2번지이며,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 159호에 지정되었다. 장흥군 충렬사와 창원시 회원구 구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충렬서원(忠烈書院)은 원래 임진왜란 때 순절한 충신 도승지공 정명세(鄭名世 1550~1593)와 그의 동생 충신 청안현감공 정명원(鄭名遠 1559~1592)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1683년(癸亥 숙종9) 지방 유림들의 공론에 따라 전라도 선유어사(宣諭御使) 이동욱이 장흥읍 충렬리에 석대사(石臺祠)를 건립하였다.

   
 

그 후1555년(乙卯) 임진왜란의 전초전인 달량진(지금의 해남군 남창)사변에서 순절한 장흥부사 한온(?~1555)을 1689년(己巳) 배향하면서 충렬사라 칭하고 한온 부사를 주벽으로 모셨다.
그 후 1786년(丙午 정조10) 단종조 황보인, 김종서, 정분 3相 중, 정분(鄭분 ?~1454)만 은전을 입지 못하고 있음을 이유로 5세손 정명세와 정명원이 배향된 충렬사에 배향할 것을 전라도 유학 김익현 등의 청액소(請額疏)로 사액을 건의하여 충렬사라 사액되면서 정분을 주벽으로 배향하고 정광로를 추배하고 향사해왔다.
이후 1868년(戊辰 고종5) 흥선대원군(李昰應)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면서 충렬사가 있었던 장흥읍 충렬리에 유허비를 세웠다.
 

   
 

그 후 1954년(甲午) 용산면 계산리 177-1 차동마을 뒤 수리봉 자락 수리골 현 위치에 충렬사를 복원하면서 온성현감공 정명진(鄭名振 1573~1635)과 훈련원판관공 정곤수(鄭崑秀 1560~1593)를 추배하여, 현재 충렬사에는 충장공 정분(鄭분) 등 7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때 기존의 유허비는 매안(埋安)하고 현재의 유허비는 1955년(乙未) 3월 진주정씨 충장공파종중 일을 주관한 15대 종손 한종(漢鍾)을 비롯한 용식(庸植), 명식(明植), 내식(來植)이 삼가 세웠다.
이후 1973년 목포~여수간 국도 확장 공사로 인하여 함께 위치한 진주정씨 삼세 충효문(晉州鄭氏三世忠孝門) 정려각(旌閭閣)은 용산면 차동마을 뒤 수리골 충렬사 내로 옮겨 지었고, 충렬서원 유허비는 충렬리와 경계된 장흥읍 남외리 195-1번지 공유지인 현위치에 옮겨 세워 오늘에 이른다.
지금의 장흥읍 충렬리는 조선조 장흥성의 남문 밖에 있다 하여 남문밖으로 불리어 오다가 수양대군의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연루된 우의정 정분(鄭분)의 아들 정광로(鄭光露 1425~1496)가 터를 잡아 숨어 살았던 곳이며, 1683년 유서 깊은 충렬사가 창건되어 1973년까지 관련 흔적 등이 위치해와 충렬사에서 충렬리 마을명이 유래되었다.

자문 : 진주정씨 충장공 19대손 정용길(1959년생, 곡성군 옥과면 무창리 거주), 정연재 충장공 17대손(1963년생, 보성군 웅치면 용반리 태생, 수원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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