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유배객이 강진에 머문 ‘다산 정약용(1762~1836)’만 있었겠는가?
장흥에도 ‘신잠(1491~1554), 심동구(1594~1660), 민정중(1628~1692), 유정양’ 등 여러 유배객들이 오갔다. ‘영천 신잠’은 17년, ‘노봉 민정중’이야 불과 넉달이었지만, ‘정약용’의 강진 18년처럼 그 시절에 장흥 18년을 보낸 유배객이 있었다.

-치교 이관기(穉敎 李寬基)
연안(延安)이씨, 생몰연대 미상, ‘연원부원군 이광정’의 후손, 유생(儒生), 1801년11월 장흥유배 ~1819년 해배. 1801년경 ‘황사영 백서사건’에 대한 조사를 받고 ‘정약용, 정약전’ 형제를 포함하여 전라도 남쪽으로 찬배된 6인 유배객에 들어간다. 그때 ‘정약용은 강진’, ‘이관기(李寬基)는 장흥’으로 정배(定配)되었음에도, 그 ‘李寬基’의 장흥 쪽 기록을 찾을 수 없고, 단지 ‘정약용’의 편지글에 남아있다. (혹자는 그 편지 수신인을 ‘제자 정수칠’로 오해하나, ‘유배객 이관기’이다.) 정약용은 그를 ‘관성(冠城)’의 ‘예려객(汭旅客)’으로 불렀는데, ‘冠城, 汭’는 ‘장흥, 예강(汭江)’을 지칭한다. ‘정약용’은 강진 다산초당에서 만든 차(茶)를 장흥 汭旅客에게 보내주었다. 그는 ‘정약용’이 1810년경에 보낸 詩, “기(寄)치교(穉敎)”의 수신 당사자로, 그 詩 내용처럼, ‘정약용’의 증조부(정지눌)가 ‘李寬基’의 외증조부였다. 집안 간에 겹친 인척 관계로 西學 혐의에 연루되었다. (그의 고모가 진산 사건의 ‘진사 윤지충’의 처(妻)이다.) 그는 ‘30리 떨어져 있다(相去三十里)’고 정약용이 언급한 장흥 어디에서 살았을까? 누구는 대뜸 고약하게 학대했겠으나, 누구는 나중에 위로했을 것.
혹 장동 반곡에 살던, 정약용의 제자 ‘정수칠(丁修七.1768~1835)’이 강진을 오가면서 위로해줄 법 하지만, 감시의 눈총 때문에 역시 어려웠을 것. 李寬基도 다른 유배객처럼 억불산 부암(婦岩)을 망부석(望夫石)으로 여기고 북망(北望)의 그리움에 사무쳤을까? 북쪽 ‘수인(修仁)산’이 ‘수인(囚人)산’이었을 것. 그 시기는 다르지만, 장흥 부산 출신 ‘방호 김희조(1680~1752, 생원)’가 노래한 ‘부산八景’에 ‘신정설월(新亭雪月)’이 있다. 李寬基 역시 거기에 나오는 남쪽으로 쫒겨 온 ‘신정초수(新亭楚囚)’, 즉 죄수 신분이었다.

- 신정설월(新亭雪月), 김희조
何煩楚囚淚. 얼마나 괴로운 楚囚의 눈물이랴
閑步古原東. 느릿느릿 옛 동쪽 벌판을 걷네
無限夜來好. 밤 찾아오면 한 없이 즐거워라?
亭梢雪月籠. 新亭 끝에 雪月峰이 걸렸다네 
옛 장흥적객(謫客) 초수(楚囚)들처럼 혹 ‘李寬基’도 그런 新亭 마을 부근에서 지냈던 것일까? 1801년 6인 유배객 중에 그 둘은 중간에 물고(物故,사망)되고, 그 둘은 24년 유배였으니, 그래도 그는 행복했던 것일까? 18년 후에 고향에서는 잘 정착했을까? 그 6인 유배객, ‘낙하생 이학규’ (1770~1835)는 능주에서 경상도 김해로 옮겨가  24년 만에 해배되고서도, 그 배소(配所)를 못 떠난 채 고향을 오가며 살았다. 한편, 강진의 ‘정약용’은 장흥의 ‘천관山, 수인山, 보림寺’도, ‘장동 반산, 고읍 학교의 영광丁氏들’ 도 잘 알고 있었고, 영광丁氏에게 ‘영호정 八景詩’도 써주었다. 그럼에도 그가 직접 장흥 땅을 오갔다고 볼 근거는 없다. 사회비판적 우화詩, “충식송”은 장흥 천관산을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가능한 관념詩이다. 강진을 함부로 벗어나지 말라는 유배규칙도 있지만, 혹 장흥의 ‘李寬基’ 때문에 장흥에 오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두 유배객이 만난다면 또 다른 의심을 낳게 된다. 詩 “寄 치교”를 보면, 강진의 정약용은 처음 10년 동안 30리길 장흥에 살던 李寬基를 만난 일이 없다. 1521년에 유배와 17년을 살았던 ‘영천 신잠’은 예양강의 벽수(碧水)와 황창(黃漲)에 시름을 풀며 여러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李寬基는 과연 그 어떤 일락(一樂)도 없었을까? 마무리한다. 얼룩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라진, 18년 장흥 유배객 ‘李寬基’, 해배 후에는 ‘정약용’과 만날 수 있었을까? 혹 장흥 적소(謫所)를 다시 찾아왔을까? 성균관 유학(幼學) 유생임에도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아니했을까? 李寬基 묘소는 '충남 연기군 금남면 부용리'에 있다한다. 생어우환(生於憂患), 그 인생을 위로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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