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
장흥군 수양리 이조참판 변효경(卞孝敬) 신도비栢江 위성록/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위원
관리자  |  ch2300@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9.05.16  17:23:40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신도비(神道碑)란 가선대부(嘉善大夫)이상의 종이품 품계 또는 참판(參判)·관찰사(觀察使)·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 관직이 종이품 이상에 해당된 벼슬아치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여 무덤의 길목 큰길가에 세운 비석을 말한다. 유교사상을 중요시한 조선시대에서는 가문의 영예로움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현재 장흥군내에는 1)장흥위씨/충렬공 위계정(1038~1107)/고려 수태보 문하시중/2018년 장흥읍 평화리 회주사 앞 2)청주김씨/고려 참찬 김린(1338~1410)/부산면 호계리 동백정 옆 3)초계변씨/변효경(?~1458)/이조참판/1990년 구)안양서초교 앞 4)영광김씨/설암 김필(1426~1470)/경기도관찰사/장흥읍 사인정 내 5)수원백씨/정해군 백수장(1481~1543)/공조판서/1956년 안양면 수양리 23번 국도 도로변 6)남평문씨/풍암 문위세(1534~1600)/贈 병조참판/유치면 강성서원 내 7)영광정씨/반곡 정경달(1542~1602)/함경도관찰사/장동면 반계사 내 8)장흥위씨/위덕화(1551~1598)/贈 호조판서/1938년 관산읍 방촌유물전시관 앞 9)수원백씨/술고당 백민수(1577~1615)/贈 이조판서/2000년 안양면 풍암마을 도로변 등 9곳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기타 신도비로 옛 장흥부 회령방 출신인 贈 영의정 병조판서·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장흥부원군 마천목(1358~1431) 신도비가 곡성군 석곡면 사당, 마천목 묘소 부근에 있으며, 옛 장흥부 회령방 출신인 석담 백한남(1567~1639) 신도비가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에 있다.

장차 신도비 입비 관력요건에 해당하는 장흥출신 고관들은 아래와 같다.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정경공 임의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문숙공 임원숙
-문하시중 문충공 임원후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문헌공 임원준 등 장흥임씨의 고려조 일부 선조
-광산노씨/긍재 노자형(1414~1490) 대사헌
-영광김씨/월봉 김광원(1478~1550)贈 이조참판
-초계변씨/월산헌 변국간(1527~1591) 병마절도사
-영광김씨/헌헌헌 김여중(1566~1630)贈 좌찬성
-함평노씨/관암 노홍(1566~1617) 贈 호조판서
-보성선씨/매곡 선세강(1576~1636) 贈 병조참판 등 다수가 있다.

   
 

안양면 수양리 357-2번지 (구)안양서초등학교 앞 밭에는 조선조 단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변효경의 신도비가 초계변씨 13 충혼비 옆에 세워져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비신석 상단 두전(頭篆)은 吏曺參判草溪卞公神道碑라 새겼다.
전면 양서(陽書)는 嘉靖大夫吏曺參判兼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副摠管草溪卞公神道碑銘 幷序라 새겼다.

한국고문연구회대표 변시연(황주人 1922~2006) 근찬(謹撰)하다. 19대손 만섭(1937년 경남 창원시 태생) 근서(謹書)하다.
단기 4323 1990년(庚午) 7월 10일 세웠다. 도유사 17대손  변익수(1917~1993 안양면 수양리 태생, 초계변씨 대종회장 역임)

●변효경(卞孝敬 10세, ~1456) 
조선조 태조 때 한성윤(漢城尹)을 지낸 변남룡과 정부인 충주지씨, 정부인 파주염씨 사이에서 일곱형제 중, 여섯째로 충청도 직산현(지금의 충남 천안시 일원) 태생이며, 생년은 미상이다. 1414년(甲午 태종14) 식년 생원시 3등 44위로 입격하고 1419년(己亥 세종1) 증광시 동진사 12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그 후 1440년 승문원지사를 거쳐 1443년 봉칙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445년 사간원 사간을 지내고 1452년 인수부윤에 제수되었다. 1453년 정조사부사로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고 1454년 이조참판에 제수되었다. 1455년 판영흥대도호부사에 제수되고 좌익원종공신에 훈록되었다. 配는 정부인 여산송씨다. 묘소는 안양면 지천리이다.
자문 : 학산(鶴山) 변성세(18대손 1938년 안양면 수양리 태생, 장흥읍 남동리 거주)<이조참판 변효경 신도비 번역문>

<이조참판 변효경 신도비 번역문>

가정대부이조참판겸동지경연의금부춘추관성균관사홍문관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오위도총부부총관초계변공신도비명 병서.

한국고문연구회대표 황주 변시연 근찬
십구대손 만섭 근서

단종 계유 변효경이 유익명과 함께 명나라 하정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세조가 정치를 맡게 되었는데 출척당하여 영흥대도호부사가 되었다. 그러한 이유는 공이 일찍이 충장공 정분과 충정공 민신에게 중히 여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병자년 6월 5일에 졸하였는데 예조에서 조문하고 치제를 청하였고 임금을 이를 따랐다. 묘는 직산 송정에 있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실전되었다. 그런데 최근 명확한 증거를 얻어 장흥군 안양면 모령리 목단 언덕 화심지로 옮겼다. 여러 후손들이 돈을 모아 장차 대비를 세우기 위해 의논했는데 나에게 문장으로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한 사람들은 변익수와 변만섭이었다. 실록과 흠재 최병심이 찬한 행장을 고증하여 삼가 서술한다.

공의 선조는 초계인이고 문하시중에 오른 문열공 변정실이 비조가 된다. 칠세는 휘가 변빈으로 문하평리인데 고려가 망하자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 분은 공의 조부가 된다. 아버지는 변남룡이고 호는 정암이다. 한성윤으로 충주지씨 정승 지득홍의 딸과 파주 염씨 곡성부원군 충경공 매헌 염제신의 딸이다. 공은 일곱 형제 중 여섯 번째이다. 형제들이 모두 벼슬길에 나갔다. 공민왕 때 대사헌을 지낸 임헌과 판서를 지낸 양경공 정희계가 모두 질부이며 국파 염국보와 동정 염흥방은 둘 다 대제학을 역임했는데 외삼촌들이다. 이로써 문벌이 화려함을 알 수 있는데 공은 이런 환경 속에서 교화를 받고 자라서 익힘이 있었을 것을 가히 생각해 볼 수 있다. 세종 기해년에 생원이 되어 증광전시에 정재 조상치 부학 최만리 강호 김숙자 정정 이변 필문 이선제 남정 이견기 등과 함께 과거에 합격하여 함께 교유하는 관계가 되었다.

을사년에 승정원 주서로 어가를 따라 강원도 평강 등에서 병법을 강의했다. 경신년에는 지승문원사로써 사은사 검찰관이되어 입조했다. 그런데 장령 김소남이 이변은 간관으로써 입조하고 변모는 대간이 아님에도 노자를 인솔하고 입조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국법을 위반했습니다. 세종이 말하길 이변이 비록 대간이나 이변이 아님면 사대의 업을 달성할 수 없고 변모가 비록 대간은 아니나 이미 검찰관이 되었은 즉 노자가 없이 입조함이 또한 불가하다. 관압관인 지승문원사 변효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중국 황제의 칙서를 받들고 홀라온(忽剌溫)에게 잡혀갔던 우리 나라 여자 송가이(松加伊)를 대동하고 요동(遼東)으로부터 돌아왔다. 을축년에 좌사간대부가 되어 이 때 경상도에 한재가 심하여 곡식이 여물지 않았는데 감사 유수강이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또 어려움을 구하려는 계책도 없었으므로 교체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경차관을 여러 도에 보내 도망한 노비나 부역, 병역 따위를 기피한 사람을 붙잡아 본래의 주인이나 본래의 고장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이에 대해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경차관(敬差官)을 여러 도에 보내어 유이(流移)한 인물을 추쇄(推刷)하게 하시니, 추쇄할 즈음에 이리저리 서로 연루되고 끌어대어 때리고 가두는 소요의 폐단이 없지 않으니 청컨대 이를 정지하여 백성을 실업한 자로 하여금 추경(秋耕)하는 등의 일을 오로지 다스려서 그 생명을 이루게 하소서 하였다. 또 남포(南浦)와 전라·경상도의 석보 쌓는 것을 정지하여 풍년이 들기를 기다리라고 임금에게 간하였다. 임금도 이를 따랐다. 또, 조순생은 수령을 지내지 않았는데 통훈을 제수하였고 한질과 이계녕은 이조판서 한확의 동복 아우이고 한 사람은 사위인데 한질은 중추 도사로 부곡참(副曲籤)에 옮기고, 계녕이 상서녹사(尙瑞錄事)로 직장에 승진되었으니, 상피의 법이 이미 엄한데도 틈을 타서 계달하여 성법을 무너뜨렸으니 고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순생은 오래 마정(馬政)을 맡았으므로 내가 특지로 제수하였고, 한질은 상의원(尙衣院)에 겸임하고 있기 때문에 한관에 옮기려 한 것 뿐이다. 어찌 사의가 있겠는가. 계녕은 내가 장차 고치겠다. ”하고, 도승지 유의손에게 이르기를, “간신(諫臣)의 말이 실은 정대하니, 금후로는 이같이 상피하는 사람은 제수하지 말라.” 하였다.

또 효녕대군 보가 그 아들을 위해 양가의 여자를 멋대로 불러 그 아름다움과 추함을 보니 임금의 간택과 같습니다. 사유를 갖추어 핵문을 청하여 성상께 아뢰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다시 상소하기를 보가 비록 대군이긴 하나 궁금(宮禁)의 예절이므로 신하가 참람히 본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는 참의지죄가 드러난 것입니다. 대군은 종부시(宗簿寺)에 명하여 옳고 그른 것을 변명하게 하소서. 최사직과 조참판은 그 나이 어리고 아는 것이 없는 딸로 하여금 얼굴을 예쁘게 단장하여 선보였는 데 혼인의 예절이 허물어지고 남녀의 분별이 문란해졌습니다. 곧 유사에 내려서 충분히 조사하게 하여, 모두 법대로 처하여 인륜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로잡게 하소서하였다. 다음 해에 우사간 대부가 되었는데 임금에게 10조소를 상소했다.

인사가 아래에서 감동하면 천도가 위에서 응하는 것입니다. 근년 이래로 수재와 한재가 서로 겹치어, 밭의 화곡이 수확이 적어서, 결식하는 백성이 많사온데, 또 금년에 이르러 봄부터 가물어서 밀·보리가 모두 말라 죽고 벼·기장 등 여러 종류가 또한 말라서 추수의 소망을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옵건대, 민심이 화평하지 못하여 이 재변을 부르는가 두렵사와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도와 흉년을 구제하는 계책을 진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삼가 좁은 견해를 가지고 뒤에 조목조목 열거하옵니다.

◆공법이 비록 좋은 법이기는 하나, 우리 나라는 산과 계곡이 험한 것이 중국의 평평하고 넓은 땅과 달라서, 좋은 밭은 적고 척박한 밭이 많은데, 품등을 나누어 관원이 잠깐 경과하는 사이에 갑작스레 6등의 밭으로 나누어 좋은 밭을 나쁜 밭으로 하고, 나쁜 밭을 좋은 밭으로 하여, 등급의 법칙을 그르친 것이 많이 있고, 또 재해로 상한 밭이 반드시 5결이 연복되어 있어야 면세를 허락하고, 만일 경작하는 밭이 혹은 1결, 혹은 2결, 혹은 3결, 혹은 1결 미만인 것이 모조리 재해를 입었어도 연복의 예에 얽매이면 면세를 받지 못하고, 꾸어서 창고에 바치게 되니 근심과 탄식이 일어납니다. 비옵건대, 태조의 성헌에 의하여 손에 따라 손을 주어서 민생을 편안하게 하소서.

◆동서 양계에 입거시키는 법이 변방을 실하게 하는 좋은 법이기는 하나, 본인들이 이미 향토를 떠나고, 또 도로에서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어, 고생이 막심하여 원망과 탄식을 일으키며, 아직 입거하지 않은 자도 오는 가을이면 입거할 것이라 생각하여, 농상을 힘쓰지 않고 한갓 억울함만 더하여 화기를 상하니, 아직 이 시행을 정지하여 민심을 편안케 하소서.

◆양계에 성을 쌓는 것은 비변의 장구한 계책이오나, 지난 해에 여러 도의 군현이 모두 한재의 흉년을 당하였는데, 지난 봄에 평안 · 황해 두 도의 인민으로 하여금 일정을 계산하여 성을 쌓게 하다가 백성들이 굶주리고 고달픔이 많아서, 성상께서 진려하시어 유사로 하여금 먼저 황해도 백성들을 놓아보내게 하였으니, 지금 만일 이 거행을 정지하지 않는다면 오는 가을에 차례가 되어 성을 쌓을 백성들이 굶주림 속에서도 일에 나갈 괴로움을 미리 생각하여, 반드시 근심과 원망을 일으킬 것이오니, 청하옵건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축조하여 민심을 위로하소서.

◆의염의 법은 비록 백성을 위하는 것이나, 역시 새 법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고, 또 사사로 소금을 굽는 사람들이 장차 적에 오를 것을 두려워하여, 구어서 팔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소금 값이 비싸서 백성들이 모두 병이 드니, 아직 이법을 정지하여 민생을 편하게 하소서.

◆여러 곳의 긴급하지 않은 공억(供億)의 비용과 공사 토목의 역사를 일절 정지하여 파하소서.

◆군사 및 성중관 중에 귀농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모두 그 소원에 따르고, 총통위는 비록 군국의 중한 것이나, 총통이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아니하였고, 또 본인들이 역시 익히지도 못하였는데, 한갓 월료만을 허비하고 있사오니, 아직은 놓아보내어 각각 농업을 힘쓰게 하소서.

◆지금 공름이 넉넉지 못한 때를 당하여, 사역에 나온 군인 중에 당번인 방패 · 섭육십 등은 이미 월봉을 받고, 또 하루 두 때의 요를 받으며, 하번인 방패 · 육십과 승도들이 모두 세 때의 요를 받아 허비하는 것이 적지 않으오니, 이제부터는 상항의 당번 군인은 한 때만 주고, 하번 군인과 중들은 또한 두 때를 주어서 공름을 저축하소서.

◆각도에서 만드는 책지는 비록 봄·가을 양등에 만들어 바치게 하오나, 각도에서 충납하기가 쉽지 아니하여, 농민들을 모아서 연속하여 사역을 시켜, 농사에 방해되고 업을 폐하는 탄식이 없지 않사오니, 아직 정지하게 하소서.

◆국가의 조장이 모두 《원속육전(元續六典)》과 《등록(謄錄)》에 실려 있는데, 지금 경외의 관리들이 다투어 새 법을 세워, 봉행하는 아전이 시행하는 데에 현란되어 법을 범하는 무리가 가끔 나오니, 이제부터는 《속육전(續六典)》 ·《등록(謄錄)》외에는 새 법을 세우지 말도록 하소서.하니, 명하여 정부(政府)에 내려 상고하고 의논하게 하였다. 정부에 의계하게 하고 그대로 따랐다.
다시 좌사간이 되었는데 평안도 함경도가 농사를 짓지 못함이 심각했다. 그래서 임금에게 성을 쌓는 일을 중지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동궁에게 칭신(임금으로 예우하여 대우하는 것)의 예를 갖추게 했다. 이에 좌상 하연 이상 김종서와 이하 육조 판서 참판 등 십사인이 그것이 불가함을 계청했다. 임금이 듣지 않자 공과 대사헌 이계린이 불가함을 논했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또 종실 이담의 양처가 예를 넘어 분수를 넘어섬을 논했다. 또 임금이 장차 대자암에다 불사를 배설하려 하자 때가 흉년이이 정지할 것을 연일 진청하였다. 이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의금부에 가두어 버렸다. 다시 서용되어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조참의로 전직되었다. 이 때 함흥 토관들이 잠재 능력이 특이한 자는 감사로 하여금 천망하여 경외관으로 서용할 것을 청했고 도의 감사는 한 방면의 중임인데, 임기가 1년이어서 도내의 폐막을 고루 알지 못하고 겨우 문서를 행하니 깊이 미편하옵니다. 청하옵건대 여러 도와 양계를 모두 만 30삭이 되어야 체임하게 하고, 경상도 상주, 전라도 전주, 황해도 해주, 강원도 원주, 충청도 청주, 경기 광주는 직질에 따라 겸임하고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게 하며, 또 아울러 서울 안의 좌목에 기록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또 역산관은 본래 구전하지 않고 임시로 명령을 받아 사진하기 때문에 앙조와 포폄하는 법이 없으니, 지금 생도는 학관이라 칭하고 관원은 훈도라 칭하여 예조에 붙이어 포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신미년에는 겸지병조사에서 이조참으로 옮겼는데 무릇 병조의 일이 모두 불편함이 일반이었다. 한 가지씩 진계했했다. 취라적과 태평소의 각사와 각령 인원이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취라적은 오십명 태평소는 이십 명이 예상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연구하여 그 자리를 두십시오. 또 말하였다. 황해도 화곡이 여물지 않았는데 연호군 5000명을 부역에서 면제하고 극성 서쪽에 21결 동쪽에 20결 등 도합 41결을 둔전으로 만드십시오. 병조의 일은 번잡하여 일을 해 나가기에 앞서 인원이 부족하니 10명을 늘이십시오. 또한 소나무 벌목을 금하는 것을 한성부에서 관장하게 하고 평안도 좌우 병영에 의원을 각기 차등있게 두어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또 파록도에서 사열하고 여기에서 육변의 법을 연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건의하기를 방어하는 각색의 군사의 군장을 빌려주는 전차지폐가 있으므로 일시에 소재 수령으로 하여금 점고하여  일일이 모아 모두 갑옷을 입고 활을 차게 하여 같은 때에 점고하게 하고, 그 번하하는 갑사 · 별시위 · 총통위 · 방패 · 섭육십 · 근장도 역시 같은 때에 점고하게 하며, 또 당번인 영진군과 기선군은 각각 그 영 · 진과 포소에서 동시에 점고하게 하소서. 연변의 수령과 만호 소속인 총통군은 다른 일을 시키지 말고 오직 그 일을 익힘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소서. 함길도 수성도의 명원참이 사람과 말이 왕래하는데 어렵고 조잔하니 거산도로 이속하고 각도 각진과 해변의 제읍이 총통을 제작하는 부역을 농사짓는 달을 계수하지 않아서 불편하니 3월에서 6월까지는 정지하소서 또 임금에게 건의하기를 강원도 · 황해도 두 도는 본래 인물이 조잔한데 더욱이 흉년이 들었으니 청컨대 금년 가을과 겨울에 굽는 염초를 반감하고 또 감련관을 보내지 마소서. 각 도와 각 포의 병선이 망실되거나 낡거나 파손된 정도에 일정한 법도도 없고 일정한 값을 매기지도 않았으니 불편합니다.
그 병선의 크기와 조작 연도에 따라 값을 정해 추징하소서 의주 축성에 대한 까닭은 묻지 마시고 군인을 치제하소서. 복호 손계서와 송처검을 서로 바꾸어야 합니다. 손은 사정랑감을 맡아 도성을 수리하고 축성하도록 하고 송은 무비 사정랑을 맡겨 오로지 무비의 일을 하게 해야 합니다. 임금이 모두 이를 따랐다.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즉 임신년 시월에 인수부윤이 되었는데 그 것이다. 부인은 정부인 여산송씨 호군 송렴의 딸로 찬성 송자상의 증손이다.

묘는 공의 곁에 있으며 아들은 1명인데 이름은 변강으로 안악군수를 지냈다. 딸은 둘을 두었는데 박기명과 진극충에게 시집보냈다. 진극충은 군수를 지냈다. 손자는 변옥으로 충순위이었고 증손은 변온으로 현감을 지냈다. 현손 변효인은 생원 변효의 변효례는 참봉 변효지는 무과에 합격하고 변효충은 첨사를 역임하였다. 이하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오대손 변대손은 진사 변희손은 도사 육대손 변국량은 진사직장 변국필은 현감 변국수는 진사 변국형은 수사 변국간은 병사 변국경은 첨사를 지냈다. 임진 정유난에 칠대손 변홍원 변홍제 변홍주 변홍건 변홍달 변홍적 변홍량 팔대손 변공의 변연수 변덕황 변덕장 변덕임 구대손 변립 등이 창의하여 적을 토벌하여 녹훈받기도 하고 정려각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혹은 증관되기도 했다.

금곡사에 배향된 분이 5명 성구사에 배향된 분이 2명이다. 이 사실들이 역사책에 올랐는데 세상에서는 변씨 15충이라 한다. 얼마나 위대한가! 이것이 변효경이 남긴 음덕이 아니고 무엇이랴! 공은 대대로 벼슬이 이어지는 가문에서 탄생하여 학문에 근면하였고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들어가서 생활한 것이 37년 동안 어리석게도 정직했다. 감히 전후로 논한 말들은 국가와 백성들을 위한 것이 아닌 바가 없었다. 그리고 척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죄 하나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고 단종과 세조의 왕위 교체시에는 내직으로 2품직에서 물러나 천리 밖을 지켰던 신하였다. 능히 빛이 바뀌는 것을 판별하여 안분지족했으니 학문의 힘이 아니었으면 어찌 능히 그렇게 했겠는가? 을해년의 녹훈은 회용지책에서 나온 것이니 장릉의 절신들은 녹훈 된 것을 심히 모멸했으니 공도 어찌 이와 같이 이어지는 이름을 떨어내지 않았겠는가?

세종과 같은 사람은 말한다면 동방의 요순이라네

현명한 자를 들어올려 능히 맡은 임무를 주니

공도 뽑혀가는 것을 옳게 여겼네

승정원과 승문원의 모든 일들을

모두 근면하게 수행하고

좌우 사간의 어른으로 논한 생각도 또한 정직했네

십조헌책은 정부에서 옳게 여겨 받아들이고

척불을 연이어 계청하다가

의금부에 하옥되기도 하였다네

임금이 후회하고

서용하여 중추부사가 되고

다시 이조로 옮겨서는

나라의 고굉지신이 되었다네

병조에서는 옛 제도의

불편한 것들을 살펴 모두 정리하였고

이조  참판에 올라서는

영예와 총애가 여전했지

다시 조정에 돌아와서

명망이 넘쳐났고

임금의 수레타고 하늘의 손님이 되었네

창졸간에 변천이 일어나서

아! 여러 현사들이 화를 입었구나

혹은 순절하고 혹은 은거하니

삶과 죽음은 비록 다르나

지절에 있어서는 서로 비슷하다네

무릇 위대한 업적이

오래도록 그늘 속에 잠져 있으니

이제 역사책을 들추는 것은

구름을 갈라서 해를 보게 하는 것이네

수 백세 후세에도 대략을 잡아 기념하지 못하리니

말을 풀어 돌에 새기어 큰 비를 만들었네

서술하기만 했지

내가 지은 것은 없었다네

단기 4323년 (서기 1990년) 경오년 7월 10일 수립

도유사 17대손 변익수

십조소 번역은 왕조실록 내용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이 신도비의 총 글자 수는 2738자입니다.

번역문 출처 : 변수남(20대손, 목포시 거주)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가장 많이 본 기사
여백
여백
칼럼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전남 장흥군 장흥읍 건산리 470-1  |  농협 657-01-073148(장흥신문)  |  문의전화 061-864-3721  |  청소년보호책임자 최정옥
Copyright © 2013 장흥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