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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산(芙蓉山)’, 1895년 1월5일예강칼럼(70)/박형상/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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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16  17: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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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산(芙蓉山)

<정묘지,1747>에는 남면방 '불용산(佛聳山)'으로 기록되고 있다. 607미터 높이로 장흥부 남쪽 15리에 있다. 산 북쪽에 ‘불용암’, 동쪽에 ‘반운대’가 있다했다. '용두(龍頭)천'이 발원하나, '용두산' 명칭은 아니었다. 약재가 많아 '약다산(藥多山)'이었고, 산삼(山蔘)도 있었다한다. <정묘지>에도 '부용산(芙蓉山)' 명칭은 언급되며, '용산 8景'에 물론 등장한다.

<정묘지>는 ‘佛聳山’ 유래를 <芙容山기(記)>에 나온 "황금직불용출(黃金直佛聳出)"에서 찾았다. 직불용출(直佛聳出)은 고려시대 법화신앙체 백련결사(結社)가 받들었던 <법화경>에 나온 '지용(地湧)보살'에 해당할지 모르겠다. 그 법화신앙은 '장보고 법화사, 만덕산 백련사', '천인(天因,1205~1248)'의 <천관산기(記)>에 그 맥이 닿을 것. 天因 스님은 ‘탐진현 백련사’의 백련결사2세 법주이다. ‘영이재 위문덕(1701~1784)’의 詩에 "부용산 도중"도 있다. 그 ‘芙蓉山’ 인근 '묵촌'마을에 묵촌파(派)로 지칭할만한 지역선비들이 있었다. ‘지지재 이상계(1758~1822), 남파 이희석(1804~1889), 나중엔 월산정사를 지킨 ’학남 김우(1833~1910), 사복재 송진봉(1840~1898)’과 월림으로 이거한 ‘방언 이정석(1840~1895)’ 등이다.

- 1895년 1월5일에 있었던 일
1894넌 12월2일에 ‘전봉준(1855~1895)’은 순창 쌍암리에서 체포되었다. 그럼에도 장흥동학군은 12월4일에 장흥 벽사역을, 12월5일에 장흥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12월14일~15일 장흥읍 석대들 패전이 있었고, 관군과 일본군에 의한 대대적 토벌이 시작되었다. 그 악명 높은 '이두황(1858~1916)'은 12월20일에 장흥부에 입성했으며, 12월24일에 '이방언'은 1차 체포되었다. 수색과 토벌은 동남 해안선으로, 또한 자울재(면치) 너머 본도(本道) 육로를 따라 계속되었다. 남쪽으로 내몰리던 일부 동학군은 ‘芙蓉山’으로 은거하였을 것이다. 용산면에서는 1895년 1월 초순경에 무명용사 7명이, 1895년 6월6일에는 2명이 사살되었다. (1908년에도 의병 사살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芙蓉山’ 화재사건은 언제 있었는가? 동학혁명 연구자료, <동학혁명 지도자들(위의환, 2013)>과 <용산면지(1995)>를 합쳐보면, '芙蓉山' 산불과 '芙蓉寺' 소실은 1895년 1월5일로 짐작된다. 아마, 동학군 7명이 사살되던 그날에 방화(放火)가 있었을 것. 그런데 그 현장 목격담으로 짐작되는 詩가 있다. 강진에서 이거해온, 어느 묵촌 선비가 ‘그 불기둥이 된 芙蓉山’을 '옥(玉)을 태우는 슬픔'으로 탄식하며 지켜보았다. 그가 그 날짜를 명기해 둔 것은 아니다.

- 탄(歎) 부용산 실화(蓉山 失火), 사복재 송진봉(1840~1898)
蓉山磅박正西來 芙蓉山 방박(磅박)하게 西로 곧장 치달았네
忽地烈炎焚玉哀 갑작스런 세찬 불길에 옥(玉)을 태운 슬픔이라
惟嶽千年終作炬 천년 산악이 끝내 횃불 봉우리 되고 말았다니
老夫一夕驚登臺 노부(老夫)는 놀라 이 저녁 돈대에 올라 섰네
雖欲挽河天絶梯 은하수 당겨쓰려 해도 하늘 사다리 끊어졌고
空思酌海   如盃 헛되이 표주박 잔으로 바다를 재는 격이라네
斧斤餘孼賁回厄 도끼 맞은 여얼(餘孼)에 큰 액(回厄)은 도나니
莫道玆山本不材 이산 본디 부재 산목(不材 散木)뿐이라 말 마소

  대명유민(大明遺民)을 자처하며 척사파(斥邪派)에 속한 '사복재 송진봉'은 '오남 김한섭, 방언 이정석'과 함께 동문(同門)수학을 하던 사이였는데, 1892년에 동학(東學) 입교활동을 하던 ‘이방언’에게 절교 편지를 보냈으며, ‘이방언’은 학파에서 삭적되었다. 詩語 '부재(不材)'는 <장자(莊子), 산목(山木)편>에 있는 '材(用,쓰임새)‘와 '不材(無用,쓰임새 없음)'를 염두에 두고 끌어온 것 같다. ‘무용(無用)’과 ‘무용지용(無用之用)’은 상대적이다. 본디 ‘芙蓉山’은 버려진 ’산목(散木)‘과 ’부재지목(不材之木)‘의 땅이 아니었다는 역설적인 말 아닐까?.
'송진봉'은 1897년에 천관산 양촌재로 이거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98년에 타계했다. 같은 1840년생 두 인물, ‘송진봉’은 척사(斥邪)의 길, ‘이방언’은 동학(東學)의 길을 선택하였으며, 그들 삶은 서로 충돌되는 부분도 있다. 그 시제(詩題) ‘용산실화(蓉山失火)’에 나온 ‘失火’는 ‘잘못된 불’ 정도로 새겨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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