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억불산, 지금이야 ‘억불산(億佛山)’이지만, 옛 문헌에는 ‘憶,億,佛,夫’ 등이 엇갈려 조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천관산 봉수는 북쪽으로 어화(於火)산과, 수인산 봉수는 동쪽으로 어불(於佛)산과 통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於火山, 於佛山’이 바로 ‘億佛山’을 지칭한다. 읍치(本府)에서 동쪽7리에 억불산이 있고, 동쪽5리에 있는 ‘정화소(丁火所)’ 다소(茶所)에는 봉수(烽燧)를 관리하는 장정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丁火所의 ‘丁火’와 억불산 봉수와의 상관성 여부는 여전히 의문이다.

- 은경암. 억불산 며느리바위는 부암(婦巖) 또는 망부석(望夫石)이라 불려졌고, 그 부근에는 ‘은경암(隱景庵)’과 작은 샘(寒泉)이 있었다 한다. 존재 위백규(1727~1798)의 <지제지>는 “천관사의 말사 은선암”이라 지칭하고 있다.
안양 선비 육우재 백영직(1841~1912)은 ‘안양팔경, 은대모종(隱臺暮鐘)’을 노래하며, “훼손 후 수 백년이어서 아무도 ‘안양八景’에 드는 隱臺를 모른다.”고 한탄하였다. 그 한탄을 책 첫머리에 소개한 <안양면지,1998>는 정작 그 은대(隱臺) 위치를 말하지 않았는데, ‘사자산 은대암(은적암)’보다는 ‘억불산 은경암’으로 여겨진다. 육우재 선생은 안양八景으로 ‘억불봉수, 수대폭포’를 함께 노래했는데, <정묘지,1747, 안양방 편>은 ‘憶夫山’에 대해 “위는 봉수요, 아래는 폭포(上有烽燧 下有瀑布), 며느리바위가 산허리에 있고(婦岩 在腰), ‘은경암’이 그 사이에 있다가 지금은 없다(隱景庵 亦在其間 今廢)”라고 기록하였다. 지오재 선시계(1742~1826)의 비천12영에도 ‘은경석봉(隱鏡夕峰)’이 나왔다.

- 은대모종(隱臺暮鐘), 육우재 백영직
爲愛庵臺最勝形 암대(庵臺)를 사랑함에 최고승경이어라
蒼屛초絶白雲경 창병(蒼屛) 가파른 절경은 白雲에 걸리고..
鐘聲一斷千巖古 종소리 한번 끊긴 千巖은 옛스러울 뿐
中有寒泉發地靈 거기 가운데 한천(寒泉)에서 지령 발하네

  - 와우산.. 억불산을 ‘와우산(臥牛山)’으로 보면, ‘우각(牛角)’은 며느리바위요, ‘우목(牛目)’에 우목리 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뻗는 산줄기 ‘우복(牛腹)’에는 ‘우복동 우복천(泉)’이 있다. 또한 臥牛 억불산을 동쪽 남쪽으로 감아도는 ‘차동, 포곡’ 산등에 여러 명당이 있다했다. <정묘지 남면방> 총묘(塚墓)편을 보면, 남쪽으로 용산 포곡에는 그 시절 명망가 묘소가 집중되어 있다.
자봉포란(雌鳳抱卵) 8明堂이 있다했다. 또한 동쪽 산록에도 ‘수원白씨 진주鄭씨 장흥高씨’의 묘소 음택이 즐비하다. 臥牛山의 잔등 우미(牛尾)로 흘러가는, 북쪽 ‘찻등, 개손등’에 장흥위씨 묘소가 있다. 평화에서 남쪽 포곡으로 넘어가는 쪽엔 창녕조씨 묘소가 있다. 가는 세월에 억불산 그 자신도, 억불산을 바라보는 시선도 변하는 것 같다. 억불산의 당당했던 상징이던 오백년 소나무는 진작 사라지고, 억불산록에 꽤 많던 고인돌은 없애버렸다. 牛目里는 牛山里로 그 이름이 바뀌어졌다. 둥근 달이 걸린 억불산 능선을 장흥읍에서 바라보면 ‘덕림명월(德林明月)’이요, 안양면에서 석양녘에 서쪽 억불산을 바라보면 ‘덕림반조(德林反照)’였건만, 그 원만한 산세 선형이 날로 끊어지고 가려져간다.

- 평화. 우복(牛腹)에 안겨있는 ‘평화(平化)’ 명칭 유래를 생각해본다. 차라리 ‘平火’였으면 ‘火(불) <부리, 벌, 벌판’으로 쉽게 이해되려만, ‘平化’이기에 혼선이 잦다. 속설로 ‘평산申氏 화속지(化屬地)설’이 거론되나, 그 근거는 크게 부족하다.
어느 시절 평산 申氏인지도 모호하며 어떤 기록이나 물적 유적도 없다. 더구나 ‘화속지(化屬地)’용어 자체부터 없고, 오히려 ‘화속(火贖地, 火粟田)’ 용어가 있을 뿐이다. 마치 역촌과 옹기촌 사람들이 그 지명을 살짝 비틀어 감추듯, ‘丁火村’에서 온 ‘平火’를 ‘平化’로 살짝 비틀었을 수도 있고, 예양강 제방공사를 계기로 상습적 침수 저지대가 새로운 평야 들판으로 조성된 데서 ‘平地化變’의 ‘平化’일 수 있다. 또한 ‘丁火所’ 다소와 함께 있었다는 ‘정화사(淨化寺, 淨化舍)’의 ‘淨化’에서 ‘平化’가 유래할 수도 있겠다.(별도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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