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로 고제환(國櫓 高濟渙,1810~1890)'을 추모 변론함

(전회에서 계속) 조선 후기 이래로 누적된 삼정(三政)문란의 폐해, 특히 전세와 대동세의 결세(結稅)로 야기된 과다 징수분에 대한 불만이 드디어 1862년 민요(民擾) 열풍 속에 장흥에서 터진 것. 더구나 조관(朝官) 전관(前官) 군수 신분의 '고제환'이 1,000여명 읍민의 앞장을 선 것은 매우 이례적이어서 “처음 보는 변괴”라며 서울 조정은 깜짝 놀랐다. (훗날 장흥동학혁명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나선, 향반 출신 ‘이방언’보다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비록 일부 민가와 관아를 방화하였어도 결코 王朝 전복을 꾀하는 반란이나 反봉건적 체제투쟁은 아니었다.

王을 부정하지도, 수령(守令)과 아전을 참살하지도 아니한, 세금저항 투쟁으로서 민요(民擾)였을 뿐이다. 1862년 민요사태를 기록한 <임술록>은 “‘유향 정방현(鄭邦賢), 임재성(任在星)'이 아전들과 합세하여 ‘高濟渙’의 평화리 자택을 보복 방화한 사실”에 착안하여 ‘장흥민요(民擾)’의 본질을 ‘高 지지세력’과 ‘鄭,任 지지세력'이 충돌한 '향권 주도권 다툼’으로 보았다.

아마 <임술록>은 체제의 위기의식을 크게 느낀 데서 사건의 심각성을 희석시킬 의도로 그렇게 돌렸을 것. 그런데 일각에서는 “유향 ‘鄭, 任’이 ‘高제환’을 뒤따르며 함께 反官 투쟁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장흥군 향토지,1975>도 ‘장흥민란’ 항목 하에 “高濟渙, 정방현, 임재성이 부정한 수령(不正守令)에 항거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장흥읍지, 2018>에는 아예 어떤 언급도 없다. 살피건대, 사건의 발단배경 및 전개과정을 보면, 향촌사족(士族)들의 구조적인 주도권 싸움이라 단정할 수 없으며, 反官 세금투쟁이었을 뿐이다.(다만 ‘城안 세력’과 ‘城바깥 세력’의 다툼 양상은 있었을 것)
반면에 “서로 도당을 불러 모았다는, 호상취당(互相聚黨)”을 지적한 <철종 실록>기사가 있고, ‘읍성으로 진입하는 읍민들’ 쪽에서 ‘鄭, 任’의 가옥을 먼저 소훼하고, 이에 대해 ‘鄭, 任’이 이끄는 도당이 ‘高’의 평화리 가옥 등을 보복 방화한 점, ‘鄭, 任’ 경우는 단지 곤장 치죄(治罪)로 그쳤을 뿐 어떤 유배 처벌도 없었으며, 얼마 후 향교활동에 평온하게 복귀한 사정 등을 두루 합쳐 보면, ‘高’와 ‘鄭, 任’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 대립했을 것. 어쨌거나 ‘高濟渙’은 보성에서도 장흥에서도 부패한 아전들과 결탁하지 아니했으며, 그때마다 북쪽 유배를 갔고 그 3년 만에 돌아왔다.

1874년 ‘무산부사’로 출사 했던 ‘高무산’은 1889년에 80세에 ‘가선대부 내금위장(종2품)’이 되었으며, 1890년에 귀향 도중에 장성에서 타계하였다.
1862년경에 방화를 당한 ‘高濟渙’의 평화리 자택은 지금도 빈터로 남아 있다. 당시 자신을 찾아와 억울함을 호소하는 읍민들을 ‘고제환’이 위로하며 그 앞장을 섰던 현장일 것.

-덧붙인다.
1) 장흥(장택) 高氏는 장흥 土姓이었으나, 중도 이산되었고, 1770년경 일부 高氏 세력의 재입거 이래 장흥읍 평화, 안양면 모령, 용산면 운주 등에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장흥향교 색장(色掌) 장의(掌議)에도 적극적으로 다수 참여했으며, 재장(齋長)으로 ‘1765년 고만엽, 1842년 고오진, 1849년 고홍진’이 있었고, ‘高濟渙’의 조카, ‘고언주(1861년 장의, 1863년 색장)’는 1877년과 1880년에 재장(齋長)이 되었다.
1862년 당시에 ‘고언주’의 자택도 방화되었는데, 그는 ‘무계 고영완(1914~1991)’의 고조부가 된다. ‘고영완'은 항일운동으로 1944년경 함흥형무소 복역을 했고, 일제기 향교임원록에는 한 명 高氏만 발견된다.

2) 한편 장흥 재입거 이후에 이른바 ‘高氏 5관장(官長)’으로 '진해현감 고석겸, 오위장 고재흥, 하동부사 고혜진, 내금위장 고제환, 고창현감 고재성'을 배출하였으니, 장흥 지역의 신흥(新興) 무반가로 떠올랐다.

3) 장흥 高氏 중에 장흥의 ‘평화 高氏’는 ‘제봉 고경명(1533~1592)’의 장자(長子) ‘준봉 고종후(1554~1593, 복수 의병장, 진주 3장사)’의 후손들이고, 세칭 담양의 ‘창평 高氏’는 고경명의 차자(次子) ‘학봉 고인후(1561~1592)’의 후손들이다.
안양면 모령리 봉강사(祠)에는 ‘김천일, 최경회, 고종후’등 진주성 3장사와 함께 ‘고수위, 고언장’ 등 다섯 선현들이 함께 모셔져있다.

4) 크게 아쉬운 점이 있다. 왜 그 당대 장흥선비들은 1862년 임술년 민요항쟁의 목격담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단 말인가? ‘남파 이희석(1804~1889)의 <남파집(역,이병혁)>에 운주리 출신’ ‘고제홍(1827~1897), 고제명(1833~1873/1854년 향교 색장 역임)’과의 일부 교류관계가 언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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